2021. 9. 10. 10:50ㆍ장자 내편 이야기 - 완결/원문 번역(하단 주석)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내편》 번역에는 혜원출판사에서 나온 이민수(李民樹)의 2007년 번역,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安東林)의 2019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안병주(安炳周)와 전호근(田好根)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王先謙의 《莊子集解》, 郭慶藩의 《莊子集釋》를 참고하였습니다. 두 책은 모두 淸나라 말기에 《장자》에 대한 주석들을 취합하고, 편저자인 王先謙과 郭慶藩 자신들의 의견을 덧붙여 둔 글입니다. 본래 《장자》의 주석으로는 郭象의 《注》, 成玄英의 《疏》가 유명합니다. 그러나 郭象의 말은 간혹 핵심을 찌르지만, 문장이 간결하고 현학적이라서 사람들이 칭송한 만큼 도움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成玄英은 대체로 논지가 郭象과 비슷하지만, 문장이 상세하여 도움이 꽤 되었습니다. 다만 도교 도사의 입장에서 해설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점에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莊子集釋》에서는 이 두 주석과, 陸德明의 《經典釋文》에 실린 주석을 아주 충실히 인용하고, 또 간혹 兪樾, 郭嵩燾, 李楨 같은 淸代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해 두었습니다. 간혹 郭慶藩 본인의 견해도 들어 있습니다. 한편 《莊子集解》에서는 郭象과 成玄英, 陸德明의 주석을 인용하되, 王先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만 발췌해서 인용하고, 또 거기 王先謙의 견해를 붙여 두었습니다. 다만 《莊子集解》에는 宣穎, 姚鼐, 王念孫, 郭嵩燾, 兪樾, 蘇輿 같은 淸代 학자들의 견해가 인용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또 참고할 만합니다. 부분적 발췌이긴 하지만, 《莊子集釋》에는 宣穎이나 姚鼐, 蘇輿 같은 학자들의 견해는 아예 실려 있지 않습니다. 이 글에는 《莊子集解》와 《莊子集釋》에서 인용한 모든 인용문이 인용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또, 선학들의 견해가 제 견해와 항상 일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최대한 많이 인용하여, 옛 견해는 이러하였다는 점을 소개해 드리려 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장자》, 《장자 내편》,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向秀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인간세」, 「제물론」, 「응제왕」,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지금 번역하고 있는 글이나 유명한 글은 한글로 표기하고, 다른 책이거나 유명하지 않은 글은 한자로 표기하였습니다. 유명하냐, 유명하지 않냐의 기준은 제 주관입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양생주」에 ≪足丌≫이라는 예가 있었습니다.
* 《내편》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 홍용현과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0년 5월 9일 12시 46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74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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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68
장자 내편 - 2 - 제물론 - 2 - 장자의 도론 첫 번째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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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책으로 출판되어 교보문고를 통해 유통되고 있습니다. 전문을 다 읽으시려면 책을 구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莊子內篇孃注》, 李相珉, 책과세계)
** 블로그를 통해 공개한 내용은, 번역문 전체 및 주석 일부입니다. 그러나 번역문과 주석 모두 중간 부분을 {...}라는 표시로 비워 뒀습니다. 책을 구입하기 전 열람할 수 있는 견본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 전자책으로도 출판되었습니다. 교보문고와 리디북스 두 개 서점을 통해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 가능한 링크는 아래에 기재해 두었습니다.
1.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3332426(양장본, 품절)
2.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09069155(문고판, 상권 및 하권으로 분절, 세트로 판매, 재고 있음)
3. 전자책
3-1. 교보문고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405
(전자책, 교보문고, 합본)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1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16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35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63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2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E000005410397
(전자책, 교보문고, 편별로 분권)
3-2. 리디북스
(전자책, 리디북스, 합본)
(전자책, 리디북스, 편별로 분리)
2-2
大知閑閑,小知閒閒;大言炎炎,小言詹詹。
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與接爲搆,日以心鬭。縵者,窖者,密者。小恐惴惴,大恐縵縵。
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其殺如秋冬,以言其日消也;其溺之所爲,之不可使復之也;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近死之心,莫使復陽也。
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樂出虛,蒸成菌。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已乎已乎!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非彼無我,非我無所取。是亦近矣,而不知其所爲使。必有眞宰,而特不得其眹。可行已信,而不見其形,有情而無形。
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吾誰與爲親?汝皆說之乎?其有私焉?如是皆有,爲臣妾乎,其臣妾不足以相治乎。其遞相爲君臣乎,其有眞君存焉。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眞。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人謂之不死,奚益?
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無師乎?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
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是以無有爲有。無有爲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奈何哉!
夫言非吹也。言者有言,其所言者特未定也。果有言邪?其未嘗有言邪?其以爲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
道惡乎隱而有眞僞?言惡乎隱而有是非?道惡乎往而不存?言惡乎存而不可?道隱於小成,言隱於榮華。故有儒、墨之是非,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物無非彼,物無非是。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方生之說也。
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是以聖人不由,而照之于天,亦因是也。是亦彼也,彼亦是也。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故曰「莫若以明」。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可乎可,不可乎不可。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無物不然,無物不可。故爲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爲一。
其分也,成也;其成也,毀也。凡物無成與毁,復通爲一。唯達者知通爲一,爲是不用而寓諸庸。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適得而幾矣。因是已。已而不知其然,謂之道。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謂之朝三。何謂朝三?曰狙公賦芧,曰:「朝三而莫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莫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爲用,亦因是也。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是之謂兩行。
古之人,其知有所至矣。惡乎至?有以爲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其次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也。其次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道之所以虧,愛之所以成。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無成與虧乎哉?
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唯其好之也,以異於彼,其好之也,欲以明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
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無成。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爲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爲類,則與彼無以異矣。雖然,請嘗言之。
有始也者,有未始有始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有有也者,有無也者,有未始有無也者,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今我則已有謂矣,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
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爲小;莫壽乎殤子,而彭祖爲夭。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爲一。既已爲一矣,且得有言乎?既已謂之一矣,且得無言乎?一與言爲二,二與一爲三。自此以往,巧歷不能得,而況其凡乎!故自無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無適焉,因是已。
대지는 여유롭고, 소지는 편협하다. [마찬가지로] 대언은 담백하지만, 소언은 잡다하기만 하다. 1 2
[소지나 소언을 일삼는 놈들은] 장차 잠이 들면 넋이 섞이고, 잠에서 깨면 육신이 열려서 [외물과] 함께 이어져서 얽힌다. [잘 때는 혼에 시달리고, 깨 있을 때는 외물에 시달리니, 날마다 정신을 가지고 싸움을 벌인다. [이렇듯 소지나 소언을 일삼는 놈들 중에는] 태만한 놈도 있고, 소심한 놈도 있으며, 깐깐하게 구는 놈도 있다. 3 [하지만 이런 놈들은] 조금만 을러도 벌벌 떨며, 크게 겁을 주면 혼비백산해 버린다. 4 5
이 놈들이 지껄이는 모습은 기괄[에서 탄이 튀어 나오는 모습] 같으니, 이는 [이 놈들이] 시비를 따지고 다닌다는 점을 이르는 말이요, [또,] 이 놈들이 개기는 모습은 저맹을 벌이는 것 같으니, 이는 [이 놈들이 자기] 승리를 사수하려 드는 꼴을 이르는 말이다. 6 이런 놈들이 쇠약해지는 꼴은 가을과 겨울[에 만물이 수그러드는 모습]과 같으니, 이 말을 가지고 이 놈들이 나날이 쇠약해진다는 점을 표현할 수 있겠고 7, 이 놈들이 [자기가] 저지른 짓에 빠져 들게 되면,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 줄 수도 없다. 8 이런 놈들[의 본성]이 짓눌려 있는 꼴은 봉인[으로 봉해 놓은 모습]과 같으니, 이 말을 가지고 이 놈들이 늙어 가면서 [스스로 감당할 만한] 한계를 넘기게 될 것이라는 점을 표현할 수 있겠다. 9 [이렇듯 소지와 소언을 일삼는 자들은 살아 있는 내내 추태를 부리고, 안으로는 혼에, 밖으로는 외물에 시달리다가 그] 정신이 거의 망가지고 말 것이니, [어떤 방법으로도] 다시 살려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10 11
[소지와 소언을 일삼는 놈들의 행태는 이다지도 비루하다. 이번에는 대지와 대언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무릇] 희노와 애락, 여탄과 변접, 요질과 계태[와 같은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 행위]는, 허한 데에서 음악이 나오고, 습한 데에서 버섯이 생겨나듯 12, 밤낮이 서로 바뀌어가면서 [우리] 앞에 생겨난다. 하지만 이 감정들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아낼 수가 없다. 13 모르겠구나, 모르겠구나. 14 15
[그런데 우리가 그 원인에 대해 잘 모른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이 감정들을 느끼는 것을 보면, [이 감정들은] 아마도 [감정의] 원인이 되는 바가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 자신도 [존재한다 할 수] 없을 것이요, [반대로]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감정이] 깃들 곳도 없게 될 것이다. 이 설이 역시 [사실에] 가까울 것이로다. 16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감정들을 일으키는 바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17 [감정을 주관하는] 진재가 존재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진재의 낌새를 알아 낼 수는 없다. 18 [진재의] 형체를 드러내 보일 수 있었다면 [사람들이 진재의 존재를] 벌써 믿었겠지만 19 진재의 형체를 [직접] 드러낼 수는 없다. 20 [따라서 진재는] 실체는 있되 형체는 없을 것이다. 21 22
[진재의 존재성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의 몸을 예로 들어 보자. 사람은] 뼈 백 개, 구멍 아홉 개, 장 여섯 개를 갖추어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사람의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장기의 기능을 무언가가 주관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장기 중] 어느 하나가 [다른 장기들을] 주관한다고 할 수 있을까. 23 [이제 따져 보겠다.] 너는 장기 모두를 좋아하느냐. [그런데 모두를 좋아하다 보면 장기 중에] 편애하게 되는 것이 생기게 되지 않겠느냐. 24 그렇다면 [아예 장기] 모두를 신첩[처럼 다른 것에게 부려지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25 그런데 [장기 모두를 신첩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장기가 부려지고 있다는 말일 텐데, 그러면] 신첩[인 장기]들끼리 서로가 서로를 다스린다고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26 [그렇다면 장기들이] 서로서로 번갈아 가면서 군주와 신하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27 아마도 [우리 장기의 작용을 모두 통솔하고 있는] 진군이 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28 [따라서] 만약 진재의 실체를 알기 위해 노력하여 그 실체를 깨달았든, 깨닫지 못했든 간에, 진재가 실재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가감할 것이 없을 것이다. 29 30
[나의 설처럼 진재가 우리의 생사를 주관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단 [우리가 진재에게서] 우리의 온전한 형체를 받았다면, [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진재의 것이므로] 소홀히 하지 말고 [우리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온전히 수명이 다하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외물들과 서로서로 해치고 쓰러뜨리고, 이에 [자신을] 소진시키면서 치달아 나가지만, [이 꼴을] 그치게 할 수가 없으니, 또한 가여운 일이 아니겠느냐. 31 [이런 자들은] 평생토록 고생하지만 자신이 [진정] 이루어야 할 것을 깨닫지는 못하고 32, [충분히 쉬지도 못해서] 나른한 상태로 고생하면서도 자신이 [진정] 돌아가야 할 곳을 깨닫지도 못하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33 [뭇] 사람들은 이런 꼴을 보고도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도대체 이런 꼴이 죽은 것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느냐. 34 35
[내 주장처럼 사람들은 진재에게서 타고난 자신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하여, 살아 가면서] 그 육신이 훼손될 것이요, 그 정신 역시 육신과 함께 손상될 것이니, [이 꼴 또한] 아주 가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사람의 삶은 원래 이렇게 고달픈 것일까. 혹시 [이렇듯 도를 따르지 않는 삶을] 나 혼자 고달프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은 또 고달프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을까. 36 37
그런데 [진재에게 받은 육신을 보존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성심을 좇아 이 견해를 [자기 행위와 삶의] 모범으로 삼는다면, 다만 누구인들 [자기 성심에] 근거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 할 수 있겠느냐.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찌 [자기 감정이] 번갈아 바뀌는 양상과 [자기] 정신을 이해하고, 스스로 다스릴 만[큼 현명하고 똑똑]한 사람이어야만이 꼭 성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느냐. 어리석은 놈도 마찬가지로 [자기 견해를] 갖고 있는 법이다. 38 39
[이번에는] 성심이 아직 생기지 않았는데도 [이미] 시비가 생겨났다는 말을 생각해 보자. 이 말은 오늘 월나라로 떠났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말[처럼 모순되는 진술]이다. [또한] 이 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짓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한다고 하는 짓은 [전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비록 신묘한 우가 [곁에]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깨우쳐 줄 수가 없을 것이니, 다만 나인들 어찌 깨우쳐 줄 수가 있겠는가. 40 41
저 말은 [단순히] 숨을 내뱉는 소리가 아니다. 말이라는 것에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만약 [어떤 말의] 의미가 다만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면 42, 과연 [그 말이]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43, 아니면, 의미를 내포한 적이 없다고 해야 할까. 44 또 [사람들은 사람의 말이라는 것을] 새 새끼가 내는 소리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는데, [사람의 말과 새 새끼가 내는 소리 사이에는] 구별되는 점이 또한 있다고 해야 할까, 없다고 해야 할까. 45 46
[소리와 의미가 괴리되어 말이 이지러진 것처럼, 도 역시 가려져 있다.] 도는 어디에 가려져 있기에 [세상에는] 진위가 생겨나고 말았을까. [진정한] 말은 어디에 가려져 있기에 [세상에는] 시비가 생겨나고 말았을까. 47 도는 [세상] 어디로 가 버렸기에 [지금은 도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까. 48 [진정한] 말은 [세상] 어디에 있길래 [지금은 말이] 옳지 않게 되어 버렸을까. 49 도는 소성에 가려져 버렸고 50, [진정한] 말은 영화에 가려져 버렸다. 51 이에 유묵의 시비가 생겨났으니 52, [유가와 묵가놈들은 이] 시비를 가지고 그른 것을 옳다고 하였고, 옳은 것을 그르다고 하였다. 53 [유가와 묵가놈들은] 그른 것을 오히려 옳다고 하려 하고, 옳은 것을 오히려 그르다고 하려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따위 행태는 그 어떤 것도 도를] 밝히는 것만 못하다. 54 55
[유묵의 시비 논쟁이 도를 밝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설명했으므로, 이번에는 혜자의 방생지설 역시 도를 밝히는 것만 못하다는 것을 설명해 보겠다. 무릇] 세상에는 저것이 아닌 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 것이 없다. [저것이 저것이라는 점은 내가 저것과 함께] 저기 있다는 점으로부터는 드러나지 않지만, [자신이 저곳이 아니라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부터는 저것이 저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56 이에 대해 이런 말이 있다.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 역시 저것에 근거하여 생겨난다.' 57 [이런 설은 바로] 저러한 입장과 이러한 입장이 [언제나] 나란히 생겨난다는 이론이다. 58 59
[그런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방생지설은] 삶이 있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 삶이 있다고 하며, 좋은 것이 있어 좋지 않은 것이 생기고, 좋지 않은 것이 있어 좋은 것이 생긴다고 하며, 옳은 것이 그른 것에서 나오고, 그른 것은 옳은 것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말로 귀결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성인은 [방생지설을] 따르지 않고, [그저] 하늘[의 이치]로 밝히고, 또한 이를 좇을 뿐이다. 60 [이렇듯 성인처럼 원래 그러한 이치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61, 저것 역시 이것일 뿐이다. 62 [하늘의 이치 앞에서는] 저것[이라는 개념] 또한 옳거나 그른 것 하나에 불과하고, 이것[이라는 개념] 또한 옳거나 그른 것 하나에 불과하다. 63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증을 감안할 때] 과연 또한 저것과 이것[이라는 관념]이 존재하는 것일까,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64 65
[하늘의 이치로써 따져 보면] 저것과 이것에 대해 각 개념들에 대응[되는 개념]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경지가 있다. 그런 경지를 도추라고 한다. 지도리는 근본적으로 치우쳐져 있지 않은 상태에 들어 맞기 때문에, [도는] 무궁한 변화에도 어우러져 나가는 것이다. 66 [그런데] 옳다는 것도 무궁한 변화 중 하나일 뿐이요, 그르다는 것도 무궁한 변화 중 하나일 뿐이므로, [앞에서] '그 어떤 방법도 [도를] 밝히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던 것이다. 67 68
[유묵의 시비와 혜자의 방생지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으니, 이번에는 아열의 주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아열처럼] 손가락을 가지고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은, 손가락이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을 손가락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만 못하다. [마찬가지로] 말을 가지고 말을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은, 말이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을 말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 [아열처럼 이렇고 저렇고 한 것이 다르다고 생각할 것 없다. 도를 밝힌다면] 천지는 손가락 하나와 같고, 만물은 말 한 마리와 같기 때문이다. 69 70
[어떻게 천지를 손가락 하나와 같다고 할 수 있고, 만물은 말 한 마리와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자. 세상 사람들은 자기] 좋은 것을 옳다고 하고,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한다. 71 길이 [사람들이] 길로 다니기에 [길로써] 이루어지듯이 72, 사물은 [사람들이] 사물을 [그 이름으로] 부르기에 [역시] 그렇게 인식되고 만다. 73 왜 그렇게 불리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그러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왜 그렇게 불리지 않게 되었을까. [사람들이] 그러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지 않게 되었다. 74 [하지만 사람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사물은 본래적으로 그러한 면이 있고, [또한] 사물은 본래적으로 마땅한 면이 있는 법이다. 75 [하늘로부터 타고난] 그러한 면이 없는 사물은 없고, [또한 하늘로부터 타고난] 마땅한 면이 없는 사물도 없다. 76 이에 이 설에 대해, 풀줄기와 기둥, [그리고] 문둥이와 서시를 예로 들어 보자. [이들의 쓰임새나 모습이 상이하기에,] 아주 이상하기는 하지만, [상기한 설을 따른다면, 이 모든 것들은] 도로써 하나로 통한다고 할 수 있겠다. 77 78
[이런 이치로,] 만약 [옳음과 그름, 그리고 이것과 저것이] 나뉘면 [사물은 타고난 본질을 잃고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며, [또,] 만약 [사람들의 인식 대로 사물이] 이루어지면, [사물의 본래적 본질은] 무너지고 만다. 79 [따라서] 만물이 [사람들 멋대로] 이루어지거나, [본질을 잃고] 무너지지 않도록, [만물을 도에 따라] 다시 하나로 통하게 해야 할 것이다. 80 오로지 [도에] 통달한 사람만이 [만물을] 하나로 통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알고 있으니, 이를 위하여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만물을] 타고난 그대로에 맡겨 둘 뿐이다. 81 [만물이] 타고난 그대로의 상태라는 것은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만물의] 쓰임새이고, [만물의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쓰임새라는 것은 [바로 만물이 하나로] 통하는 지점이다.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만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아는 경지에] 이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82 [이러한] 경지에 이른다면, [비로소 도에] 가깝게 될 것이로다. 83 [이처럼 진리를 좇으려면, 상기한 것처럼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만물이] 타고난 그대로에 맡겨야 할 것이다. 84 [그리고] 이미 그렇게 [행동하게] 되었을 뿐, [스스로] 그렇게 하는 줄도 깨닫지 못하는 경지, 이를 [바로] 도라고 한다. 85 86
[그런데 만물이] 동일하다는 점을 깨달아 보기 위해서 정신을 쏟지만, 만물이 같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놈들이 있다. 이런 놈들을 조삼이라고 한다. 87 [그러면] 무엇을 조삼이라 할까. 저공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저공이] 말했다. 88
"아침에 세 개, 저녁에 네 개다."
[그러자] 뭇 원숭이들이 모두 빡쳤다. [이에 저공이 다시] 말했다.
"그러면 아침에 네 개, 저녁에 세 개다."
[그러자] 뭇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과 실이 [모두] 이지러지지 않았는데도, [원숭이들에게는] 기쁨과 빡침이 일어나고 말았으니, [이 원숭이들] 또한 만물이 같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성인은 시비를 조화시키고, 천균을 편안하게 받아 들일 뿐이다. 89 이것을 양행이라 한다. 90 91
[이번에는] 옛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중에는 그 식견이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옛 사람의 경지는] 어디에까지 이르렀을까. 92 [먼저] 원래부터 사물이 존재하지조차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경지는] 지극하고, 극진하니, 말을 덧붙일 수가 없다. 93 그 다음은, 사물은 있지만, [사물들의 구분이] 아직 생겨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지로다. 94 [다시] 그 다음은, [사물들 사이에] 구별되는 점은 있지만 옳거나 그르거나 하는 구분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경지로다. 95 시비[의 차이]가 뚜렷해지는 것은 도가 이지러지는 원인이요 96, 도가 이지러지는 것은 편애가 생겨나는 까닭이다. 97 [그런데] 과연 [편애가] 생겨났기 때문에 [도가] 또한 이지러졌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면 편애가]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편애와는 상관 없이 도는] 또한 이지러지는 것일까. 98 99
[만약 편애가] 생겨났기 때문에 [도가] 이지러졌다고 본다면, [그 의견은] 소씨가 거문고를 탄 일에 비길 수 있겠고, [반대로 편애가] 생겨나지 않았는데도 [도가] 이지러졌다고 본다면 [이 의견은] 소씨가 거문고를 타지 않는 일에 비길 수 있겠다. 소문은 거문고를 [잘] 탔고, 사광은 채찍으로 기예를 [잘] 부렸으며, 혜자는 안석에 기대 논변을 [잘] 펼쳤다. [소문, 사광, 혜자, 이] 세 선생들의 재주는 지극하였다. 100 [이들] 모두는 [자기 분야에서] 정점에 오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세에까지 [그 재주에 대해] 기록이 남았던 것이다. 101 다만 소문과 사광, 혜자가 좋아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과는 달랐기 때문에 102, [이들은] 자신들의 취미에 대해, 이를 [남들에게] 밝히고자 했다. 103 [그런데] 세 사람이 좋아한 것들은 드러낼 만한 바가 아니었음에도 [세 사람은] 드러내 버렸다. 이에 [세 사람은 자신들의 재주를] 견백론 같이 바보 같은 짓으로 끝내 버렸고 104, 그리고 그 자식들 또한 [세 사람이 이룬] 학문적 성취를 [이어 가지 않고] 맺어 버렸다. [이처럼 세 사람은 그 재주가 뛰어났지만] 평생토록 도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105 106
세 사람과 같은 경우를 보고 [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 같은 사람조차도 또한 [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세 사람과 같은 경우를 보고 [도를] 이루었다고 할 수 없을까. [그렇다면] 만물이든 나든 [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07 이러한 까닭으로 성인들은 골의지요[가 도를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방도]를 세우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하여서 [성인들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만물을] 타고난 그대로에 맡겨 둘 뿐이다. 이 방법을 [도를 가지고 만물을] 밝히는 일이라고 한다. 108 109
이번엔 설을 [하나] 생각해 보자. [하지만] 이 설이 유묵의 설, 방생지설이나 백마론과 같은 부류인지, 같은 부류가 아닌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같은 부류가 아니든, 맞든, 다 같이 같은 부류라고 생각하든, 저 설들과 다를 것은 없겠다. 그렇기는 해도, 한 번 말을 해 보겠다. 110 111
[무언가의] 처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처음이 있다면] 처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112 [그런데 처음이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면] 저 처음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113 [마찬가지로 내가 앞에서 이야기했던 설이] 생겨났을 때가 있었을 것이다. 114 [그러면 이 설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115 [그런데 설이 생겨나지 않았을 때가 있었다면, 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116 [그런데 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다면,] 저 [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조차 아직 존재하지 않았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117 [그런데 세상에는] 갑자기 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에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설을 두고] 존재한다고도 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하는 말 중,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존재하지 않는지를 알지 못하겠다. 118 [마찬가지로] 지금 내가 [설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 그리고 설의 시원, 또 이것들이 소급되는 양상에 대해서] 벌써 설을 폈다고는 하나 119, [나는] 내가 말한 것들에 과연 의미가 존재하게 될런지, 의미가 존재하게 되지 않을런지 알지 못하겠다. 120 121
[그렇다면, 무엇이 생겨나거나, 생겨나기 이전 같은 것을 따지지 말고, 만물을 모두 동등하게 받아 들이면 어떨까.] 천하에 추호의 끄트머리 만큼 큰 것이 없다고 보면, 태산을 작다고 생각할 수 있고, 상자 보다 오래 산 사람이 없다고 보면, 팽조를 요절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천지와 우리가 함께 생겨났다고 보면, 만물과 우리를 동일하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만물과 내가] 이미 하나가 되었는데, [이 설 외의 다른] 설이라는 것이 또 있을 수가 있겠느냐. 122 [또한,] 이미 만물이 하나라는 점을 설명하였는데, 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또 [주장]할 수 있겠느냐. 123 [본래] 하나였는데 [이 점을 설명한답시고 여기에다] 설을 보태면 둘이 된다. [이제 원래 하나인 데다 설을 붙여서] 둘인데 [여기에다 다른] 하나를 [또] 덧붙인다고 하면 셋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한다면, 계산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나중에는 몇 개나 될지를] 계산해 낼 수 없을 것인데, 하물며 장차 보통 사람에게야 어떻겠느냐. 124 이에, [만물이 모두 하나라는 설 외의 다른 설이] 없는 상태에서 설을 보태도 [벌써 설이] 세 가지나 되고 마는데, 하물며 [원래] 설이 있는 상태에다가 [또] 설을 보탠다면 어찌 되겠느냐. 125 [그러한 즉,] 다른 설을 좇지 말고, [오직] 도를 따라야 할 것이다. 126 127
- 大知閑閑/小知閒閒, ◈ 大知는 명사구로, '{...}'이라는 뜻이다. 大는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知는 체언으로, '{...}'이다. 「逍遙遊」에 나왔던 大知와 같다. 학자에 따라서 「齊物論」에 나오는 知 일체를 {...}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陸德明은 知에 대해 音智//下及注同, '{...}'라고 하였다. ◈ 閑閑은 '{...}'을 이르는 말 같다. 閑은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閑閑/寬裕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李云/無所容貌///簡文云/廣博之貌, '{...}'라고 했다. ◈ 小知는 명사구로, '{...}'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小는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知는 체언으로, '{...}'이다. ◈ 閒閒은 '{...}'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閒은 '{...}'이다. '{...}'이라고 읽는다. 成玄英은 閒閒/分別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古閑反/有所閒別也, '{...}'라고 하였다. 俞樾은 廣雅釋詁/閒/覗也///小知閒閒/當從此義/謂好覗察人也//釋文曰有所閒別/非是, '{...}'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 郭象은 此蓋知之不同,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智惠寬大之人/率性虛淡/無是無非//小知狹劣之人/性靈褊促/有取有捨//有取有捨/故閒隔而分別//無是無非/故閑暇而寬裕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此智識之異,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大言炎炎/小言詹詹, ◈ 大言은 명사구로, '{...}'이라는 말일 것이다. 大는 관형어로, '{...}'이라는 말일 것이다. 言은 체언으로, '{...}'을 이를 것이다. ◈ 炎炎은 아마 '{...}'라는 말인 듯하다. 炎은 아마 淡의 가차자일 것이다. 그렇게 볼 정황이 있다. 《外篇》 「山木」에 且君子之交淡若水/小人之交甘若醴//君子淡以親/小人甘以絕, '{...}'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淡은 물과 같은 것이고, 감주의 달콤한 맛과 대조되고 있다. 즉, 淡은 {...}는 뜻이다. 「山木」에서 郭象은 無利故淡/道合故親, '{...}'라고 하였다. 이 부분의 炎도 「山木」의 淡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炎炎은 大言을 {...} 것이다. 炎炎을 淡淡으로 본다면, 詹詹의 의미와도 분명히 대조될 것이다. 「應帝王」에 汝遊心於淡, '{...}'라는 말이 있는데, 이 淡의 의미 역시 이와 같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炎炎/猛烈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于廉于凡二反/又音談//李作淡/徒濫反//李頤云/同是非也///簡文云/美盛貌,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炎炎/有氣燄, '{...}'라고 하였다. ◈ 小言은 명사구로, '{...}'을 이를 것이다. 小는 관형어로, '{...}'이라는 말일 것이다. 言은 체언으로, '{...}'을 이를 것이다. ◈ 詹詹은 아마 '{...}'라는 말일 것이다. 詹은 '{...}'는 말이다. 따라서 詹詹은 아마 '{...}'을 묘사한 말이 아닐까 하다. 成玄英은 詹詹/詞費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占//李頤云/小辯之貌///崔本作閻, '{...}'라고 하였다. 閻은 아마 '{...}'는 말 같다. ◈◈ 郭象은 此蓋言語之異,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詮理大言/猶猛火炎燎原野/清蕩無遺//儒墨小言/滯於競辯/徒有詞費/無益教方,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此議論之異,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寐也魂交/其覺也形開, ◈ 이 句부터 莫使復陽也까지는 {...} 해석해야 한다. ◈ 其寐也의 其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표현인 듯하다. 其覺也의 其도 그렇다. 《書》 「虞書 皋陶謨」에 天工人其代之, '{...}'라는 말이 있고, 《書》 「商書 湯誓」에 予其大賚汝, '{...}'라는 말이 있으며, 《書》 「商書 盤庚 上」에 天其永我命于玆新邑, '{...}'라는 말이 있고, 《春秋左氏傳》 「隱公」 11년에 吾子孫其覆亡之不暇/而況能禋祀許乎,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其는 모두 {...}라는 뜻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寐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其寐也魂交의 也는 '{...}'처럼 해석된다. 則과 같다. 其覺也形開의 也도 그렇다. ◈ 魂은 체언으로, '{...}'이다. ◈ 交는 용언으로, 交叉라는 말처럼 '{...}'라는 말이다. 즉, 魂交는 '{...}'라는 말일 것이다. 아마 '{...}'는 뜻일 것이다. 잘 때 {...}는 뜻일 것이다. 바로 뒤에 日以心鬭,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과 의미가 통한다. 陸德明은 司馬云/精神交錯也, '{...}'라고 했다. ◈ 覺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古孝反, '{...}'라고 하였다. ◈ 形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開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陸德明은 司馬云/目開意悟也, '{...}'라고 했다. ◈◈ 郭象은 此蓋寤寐之異,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凡鄙之人/心靈馳躁/耽滯前境/無得暫停//故其夢寐也/魂神妄緣而交接/其覺悟也/則形質開朗而取染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此寐覺之異,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大宗師」에는 古之眞人/其寢不夢이라고 해서 眞人이 {...}는 莊子의 대원칙 중 하나이다. [본문으로]
- 與接爲搆/日以心鬭//縵者/窖者/密者, ◈ 與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接은 용언으로, '{...}'는 뜻이다. ◈ 爲는 '{...}'라는 말이다. ◈ 搆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構/合也, '{...}'라고 하였다. 아마 판본에 따라 搆가 構로 되어 있기도 한 모양이다. 확인해 보면, 《莊子集解》와 《莊子集釋》에 모두 搆로 되어 있고, 《經典釋文》에는 構로 되어 있다. 아마 옛 판본에는 構로 되어 있었던 것 같다. 陸德明은 構에 대해 司馬云/人道交接/構結驩愛也, '{...}'라고 하였다. ◈ 日은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인 듯하다. ◈ 以는 '{...}'라는 말이다. 心을 받는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 鬭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 글자는 《莊子集解》에는 鬭라고 되어 있고, 《莊子集釋》에는 鬥라고 되어 있다. 宣穎은 心計相角, '{...}'라고 하였다. 心計는 '{...}'을 뜻하고, 角은 '{...}'는 말이다. 즉, '{...}'이라는 뜻이다. ◈ 縵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문맥상 縵, 그리고 뒤에 나오는 窖, 密은 모두 {...}으로 해석해야 한다. 陸德明은 末旦反//簡文云/寬心也, '{...}'라고 했다. ◈ 縵者의 者는 '{...}'이다. 縵을 받는다. 窖者, 密者의 者들도 모두 그러하다. 각각 窖와 密을 받는다. ◈ 窖는 '{...}'을 뜻한다. 窖는 관형어가 되어야 하므로 용언처럼 바꿔 보면, '{...}'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하다. 成玄英은 窖/深也/今穴地藏穀是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古孝反//司馬云/深也///李云/穴也///案穴地藏穀曰窖//簡文云/深心也, '{...}'라고 했다. ◈ 密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아마 '{...}'라는 뜻일 것이다. 成玄英은 隱, '{...}'라고 하였다. 宣穎은 謹, '{...}'라고 하였다. ◈◈ 郭象은 此蓋交接之異,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交接世事/構合根塵/妄心既重/愒日不足/故惜彼寸陰/心與日鬥也//其運心逐境/情性萬殊/略而言之/有此三別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此交接之異,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은 다소 난해하다. 나는 {...}고 간주하였다. 이에 대한 기술은 近死之心/莫使復陽也까지는 계속 이어진다. [본문으로]
- 小恐惴惴/大恐縵縵, ◈ 이 句는 小恐則惴惴/大恐則縵縵,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 小는 아마 부사어로 '{...}'이라는 말일 것이다. 小恐의 恐을 한정한다. ◈ 恐은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漢書》 「宣元六王傳」에 博辭去/令弟光恐云, '{...}'라는 말이 있다. 이 恐에 대해 顏師古는 恐謂怖動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陸德明은 曲勇反//下及注同, '{...}'라고 하였다. ◈ 惴惴은 '{...}'을 표현한 말인 듯하다. 惴는 '{...}'는 말이다. 《詩》 「國風 秦風」의 「黃鳥」에 惴惴其慄, '{...}'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惴惴/懼貌, '{...}'라고 하였다. 또, 《詩》 「小雅 小旻之什」의 「小宛」에 惴惴小心, '{...}'라는 말도 있다. 여기에서도 역시 '{...}'을 형용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惴惴/怵惕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之瑞反//李云/小心貌///爾雅云/懼也, '{...}'라고 하였다. ◈ 小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일 것이다. 大恐의 恐을 한정한다. ◈ 縵縵은 아마 '{...}'을 묘사한 말인 듯하다. 縵은 '{...}'라는 말이다. 아마 成玄英은 縵縵/沮喪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李云/齊死生貌, '{...}'라고 하였다. 宣穎은 縵縵/迷漫失精, '{...}'라고 하였다. ◈◈ 郭象은 此蓋恐悸之異,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境有違從/而心恆憂度/慮其不遂/恐懼交懷//是以小恐惴慄而怵惕/大恐寬暇而沮喪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此恐悸之異, '{...}'라고 했다. ◈◈ 孃破案 : 겉으로는 {...}이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其發若機栝/其司是非之謂也, ◈ 이 句는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앞의 其는 {...}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 其發의 其는 아마 지시대명사로, {...}을 가리키는 것 같다. ◈ 發은 아마 체언으로, {...}을 이르는 말 같다. 아마 '{...}'을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發은 본래 활이나 탄이 '{...}'라는 말이다. ◈ 若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機栝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成玄英은 機/弩牙也//栝/箭栝也, '{...}'라고 하였다. 또, 陸德明도 古活反//機/弩牙//栝/箭栝, '{...}'라고 하였다. 弩牙는 {...}를 이른다. 箭栝은 아마 {...}을 뜻하는 말 같다. 郭慶藩은 文選鮑明遠苦熱行注引司馬云/言生死是非/臧否交校/則禍敗之來/若機栝之發///釋文闕, '{...}'라고 하였다. 《文選》의 注는 李善의 注를 뜻한다. 「苦熱行」의 注에는 言生以是非/臧否交接/則禍敗之來/若機栝之發이라고 되어 있다. 郭慶藩의 인용문과는 글자가 조금 다르다. 특히 郭慶藩의 交校는 交接으로 고쳐서 번역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을 뜻한다. 또, 郭慶藩은 又案/機謂弩牙[見易繫辭鄭注]//釋名曰/弩/怒也///鉤弦者曰牙/牙外曰郭/下曰縣刀/合名之曰機/言如機之巧也[機栝與樞機義各不同//樞爲戶樞/機爲門橛]//廣雅/𣏔也///𣏔與梱同//說文/梱/門橛也///王引之曰/樞爲戶樞/所以利轉///機爲門梱/所以止扉//故以樞機並言/謂開閤有節也//書傳機與栝並言弩牙也, '{...}'라고 하였다. 인용문은 《釋名》의 「釋兵」에 나와 있다. 인용문은 부분적으로 발췌한 말로, 원문에는 弩/怒也/有勢怒也//其柄曰臂/似人臂也//鉤絃者曰牙/似齒牙也//牙外曰郭/爲牙之規郭也//下曰懸刀/其形然也//合名之曰機/言如機之巧也//亦言如門戶之樞機/開闔有節也, '{...}'라고 되어 있다. 부분 인용도 부분 인용이지만, 글자가 조금 다른 부분이 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書》의 傳 운운한 부분은 정확히 어느 부분의 傳을 지칭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찾아 보기로는 《書》의 「商書 太甲 上」에 若虞機張, '{...}'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은 機/弩牙也, '{...}'라는 말이 있다. 다만 栝에 대해서는 「夏書 禹貢」에 栝, '{...}'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孔安國이 柏葉松身曰栝, '{...}'라고 하였을 뿐, 이 외에는 孔安國이 栝에 대해 언급한 말이 없다. 애초에 孔安國이 弩에 대해 언급한 곳이 상기한 「商書 太甲 上」밖에 없다. 따라서 郭慶藩이 《書》의 傳에서 栝을 弩牙라고 했다고 한 것은 아마 착각이 아닐까 한다. ◈ 其司의 其는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을 가리킨다. 같은 지시대명사이기는 하지만, 이 其는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司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是非를 '{...}'는 말이니, 곧 是非를 '{...}'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周禮》 「地官司徒」에 居虎門之左/司王朝, '{...}'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司猶察也/察王之視朝/若有善道可行者/則當前以詔王,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主, '{...}'라고 하였다. ◈ 是非는 체언으로, '{...}'이다. ◈ 其司是非之謂也의 之는 {...} 같다. 이 句는 원래 대로라면 其謂司是非也가 되어야 할 것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謂也의 也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가 아니라, '{...}'으로, 者와 같은 말이 {...}의 목적어가 된다. ◈◈ 成玄英은 言發心逐境/速如箭栝//役情拒害/猛若弩牙//唯主意是非/更無他謂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發言即有是非/榮辱之主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과 바로 뒤의 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는, 앞의 句에서 {...} 이유가 된다. [본문으로]
- 其留如詛盟/其守勝之謂也, ◈ 이 句는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앞의 其는 지시대명사인 듯하고, 뒤의 其 역시 지시대명사이지만, 是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 其留의 其는 아마 지시대명사로, {...}을 가리키는 것 같다. ◈ 留는 아마 체언으로, '{...}'이라는 말 같다. 留는 본래 '{...}'라는 말이다. ◈ 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詛盟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이 표현은 일반적으로 {...} 쓰였던 것 같다. 《周禮》 「春官宗伯」에 詛祝/掌/盟/詛/類/造/攻/說/禬/禜之祝號//作盟詛之載辭/以敘國之信用/以質邦國之劑信,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八者之辭/皆所以告神明也//盟詛主於要誓/大事曰盟/小事曰詛, '{...}'라고 하였다. 또, 《荀子》 「大略」에 盟詛不及三王, '{...}'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涖牲曰盟/謂殺牲歃血/告神以盟約也, '{...}'라고 하였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11년에 乃盟諸僖閎/詛諸五父之衢,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詛/以禍福之言相要, '{...}'라고 하였다. 또, 《釋名》 「釋言語」에는 盟/明也/告其事於神明也, '{...}'라고 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詛/祝也//盟/誓也, '{...}'라고 했다. 陸德明은 詛에 대해서는 側據反//音明/徐武耕反/郭武病反, '{...}'라고 하였다. ◈ 其守의 其는 {...}을 가리킨다. 같은 지시대명사이기는 하지만, 이 其는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守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勝은 체언으로 '{...}'다. ◈ 其守勝之謂也의 之는 {...}이다. 之가 없다면 其謂守勝也가 되어야 할 것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謂也의 也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가 아니라, '{...}'으로, 者와 같은 말이 아닌가 의뭉스럽다. 이 句가 도치되어 {...}의 목적어가 된다. ◈◈ 郭象은 此蓋動止之異,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言役意是非/猶如祝詛/畱心取境/不異誓盟//堅守確乎/情在勝物,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留不發/若詛盟然/守己以勝人, '{...}'라고 하였고, 또 此語默之異,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殺若秋冬/以言其日消也, ◈ 이 句는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앞의 其는 지시대명사인 듯하고, 뒤의 其 역시 지시대명사이지만, 是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 같다. ◈ 其殺의 其는 {...}을 가리킨다. ◈ 殺는 아마 체언으로, '{...}'을 뜻하는 듯하다. 殺는 '{...}'라고 읽는다. 본래 '{...}'라는 말이다. 陸德明은 色界反/徐色例反//注同, '{...}'라고 했다. ◈ 若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秋冬은 체언으로, '{...}'이다. 秋는 '{...}', 冬은 '{...}'이다. 萬物은 {...}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듯하다. ◈ 以는 '{...}'다. 앞의 句인 其殺若秋冬을 받는다. ◈ 言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言其의 其는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을 가리킨다. 같은 지시대명사이기는 하지만, 이 其는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日은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消를 한정한다. ◈ 消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釋名》 「釋疾病」에 消/弱也, '{...}'라는 말이 있다. ◈ 消也의 也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가 아니라, '{...}'으로, 者와 같은 말이 아닌가 의뭉스럽다. 이 也를 者로 보면, 日消者가 되고, {...}의 목적어가 된다. ◈◈ 郭象은 其衰殺日消有如此者,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素秋搖落/玄冬肅殺/物景貿遷/驟如交臂/愚惑之類/豈能覺邪//唯爭虛妄是非/詎知日新消毀/人之衰老/其狀例然, '{...}'라고 하였다. ◈◈ 宣穎은 琢削/使天眞日喪,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과 뒤의 其溺之所爲之/不可使復之也, 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에서는 {...}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 其溺之所爲/之不可使復之也, ◈ 이 句는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앞의 其는 지시대명사인데,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之不可의 之는 則처럼 해석된다. ◈ 其溺의 其는 {...}을 가리킨다. 같은 지시대명사이기는 하지만, 是처럼 해석되고 있다. ◈ 溺은 용언으로, 어떠한 상황에 '{...}'는 말로 보인다. 陸德明은 奴狄反/郭奴徼反,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溺/沈溺, '{...}'라고 하였다. ◈ 溺之所爲의 之는 아마 '{...}'라는 말일 것이다. 之於와 같다. 《禮記》 「少儀」에 仆者右帶劍/負良綏/申之面/拖諸幦,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申之面/拖諸幦는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다. 즉, 申之面의 之는 拖諸幦의 諸와 같이 해석되어야 한다. 《孟子》 「滕文公 上」에는 禹疏九河/瀹濟漯/而注諸海//決汝漢/排淮泗/而注之江, '{...}'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 역시 而注諸海와 而注之江은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으므로, 諸와 之의 역할은 동일해야 한다. 이 사례들이 之가 諸의 의미로 사용된 사례들이다. 王引之는 之/猶諸也//諸之/一聲之轉, '{...}'라고 하였다. 之가 於를 대신하여 사용된 경우도 있다. 《大戴禮記》 「曾子事父母」에 養之內/不養於外/則是越之也//養之外/不養於內/則是疏之也, '{...}'라는 말이 있는데, 養之內와 不養於外, 그리고 養之外와 不養於內는 모두 의미상 대구를 이루고 있고, 之가 於의 의미라고 해석되고 있다. 《荀子》 「勸學」에 目好之五色/耳好之五聲/口好之五味,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도 之는 於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王引之는 之/猶於也//諸之/一聲之轉//諸訓爲於/故之亦訓爲於, '{...}'라고 하였다. 이 예시와 설명들은 《荀子》의 예를 제외하면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기술되어 있다. ◈ 所爲는 명사구로, 그 자신이 '{...}'을 이른다.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의 '{...}'을 뜻한다. 所는 '{...}'이라는 말이다. 爲는 용언으로, '{...}'라는 뜻인 듯하다. ◈ 所爲之不可의 之는 아마 '{...}'이라는 말인 듯하다. 則과 같다. 之를 爲의 목적어로 보고, 所爲之로 붙여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면 之를 어떻게 則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東略之不知/西則否矣, '{...}'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華則榮矣/實之不知,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之과 則은 모두 '{...}'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형식의 句에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과 之가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宣穎은 爲之之之/猶往//言一往不可復返, '{...}'라고 하였다. ◈ 不可는 '{...}'라는 말이다. ◈ 使는 '{...}'라는 말이다. ◈ 復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復之의 之는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을 가리킨다. ◈◈ 郭象은 其溺而遂往有如此者,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滯溺於境/其來已久/所爲之事/背道乖眞//欲使復命還源/無由可致,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厭也如緘/以言其老洫也, ◈ 이 句는 아마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앞뒤의 其는 모두 지시대명사인데, 전부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其厭의 其는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을 가리킨다.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厭은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 같다. 무엇이 짓눌려 있을까. 아마 道에게서 내려 받은 본성이 '{...}'는 말일 것이다. 厭은 '{...}'라는 말이다. 壓과 같다. '{...}'이라고 읽는다. 成玄英은 沒溺,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於葉反/徐於冉反/又於感反, '{...}'라고 했다. ◈ 其厭也의 也는 '{...}'이라는 말이다. 者와 같다. 따라서 其厭也는 其厭者, {...}'이라는 말이 된다.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緘은 체언으로, 상자 같은 것을 봉해 두는 '{...}'이다. 陸德明은 徐古咸反, '{...}'라고 하였다. ◈ 以는 '{...}'라는 말이다. 앞부분인 其厭也如緘을 받는다. ◈ 言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言其의 其는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을 가리킨다. 是처럼 사용되고 있다. ◈ 老洫은 老而洫, '{...}'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老와 洫 모두 용언일 것이다. ◈ 老는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인 듯하다. ◈ 洫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本亦作溢/同//音逸/郭許鵙反/又已質反, '{...}'라고 하였다. 郭慶藩은 闕誤引江南古藏本洫作溢, '{...}'고 했다. 《闕誤》는 陳景元의 《莊子闕誤》를 이른다. 陸德明이 本亦作溢, '{...}'라고 한 말이 《江南古藏本》을 뜻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溢은 '{...}'는 뜻이므로, 본문 맥락에 더 잘 맞는다. 아마 洫과 溢은 서로 통용되는 글자였을 것이다. ◈ 以言其老洫也의 也 역시 '{...}', 즉 者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其老洫을 받는다. 그러면 其老洫也, 즉 其老洫者가 명사구로써, 言의 목적어로 기능하게 된다. ◈◈ 郭象은 其厭沒於欲/老而愈洫/有如此者,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顚倒之流/厭沒於欲/惑情堅固/有類緘繩//豈唯壯年縱恣/抑乃老而愈洫, '{...}'라고 하였다. ◈◈ 宣穎은 厭然閉藏//緘/祕固//洫/深也//老而愈深, '{...}'라고 하였다. 여기서 厭然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大學」의 見君子而后/厭然/其不善, '{...}'에 대해 朱熹가 가 厭然을 消沮閉藏之貌, '{...}'이라고 해석한 견해가 이 부분의 뜻과 상통하므로, 宣穎의 厭然 역시 이렇게 봄이 타당할 것이다. [본문으로]
- 近死之心/莫使復陽也, ◈ 近은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死를 한정한다. 陸德明은 附近之近, '{...}'라고 하였다. ◈ 死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之는 아마 {...} 같다. 본래 문장은 心近死일 것이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 莫은 부정어다.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無, '{...}'라고 하였다. ◈ 使는 '{...}'는 말이다. ◈ 復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로 읽는다. 陽을 한정한다. ◈ 陽은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陽은 본래 '{...}' 따위를 뜻하지만, 이 句에서는 {...}처럼 해석해야 한다. 아니면 '{...}'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원래의 {...} 어울리는 것 같다. 成玄英은 生,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陽/謂生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其利患輕禍/陰結遂志/有如此者,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耽滯之心/鄰乎死地/欲使反於生道/無由得之,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日以心鬥/百變不窮//司是非者有萬應之機/守勝者有一成之見//或久倦思反而殺如秋令/或沈迷不悟而溺爲之/亦有深緘其機/無復生人之氣者//人心之相搆/各視所藏之機/以探而取之, '{...}'라고 하였다. ◈◈ 宣穎은 陰鷙無復生意, '{...}'라고 하였다. 生意는 아마도 '{...}'를 뜻하는 듯 보인다. ◈◈ 孃破案 : 이 문장을 끝으로 小知와 小言을 일삼는 놈들에 대한 기술은 끝난다. 이 다음 문장부터는 大知와 大言, 즉 莊子가 「齊物論」에서 근본적으로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가 시작된다. [본문으로]
- 喜怒哀樂/慮嘆變慹/姚佚啟態, ◈ 喜怒는 체언으로, '{...}'다 ◈ 哀樂은 체언으로, '{...}'이다. 陸德明은 樂에 대해 音洛, '{...}'라고 했다. ◈ 慮嘆는 체언으로, '{...}'이다. 宣穎은 慮多思/歎多悲, '{...}'라고 하였다. ◈ 變慹은 체언으로, '{...}'이다. 慹은 '{...}'으로 읽는다. 陸德明은 慹에 대해 之涉反//司馬云/不動貌, '{...}'라고 했다. 宣穎은 變多反覆/慹多怖/音執, '{...}'라고 하였다. ◈ 姚佚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佚은 '{...}'이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姚에 대해 郭音遙/徐李敕弔反, '{...}'라고 하였고, 佚에 대해서는 音逸, '{...}'라고 했다. 王先謙은 姚同佻, '{...}'라고 하였다. ◈ 啟態는 체언으로, '{...}'을 이른다. 陸德明은 態에 대해 敕代反/李又奴載反, '{...}'라고 하였다. ◈◈ 郭象은 此蓋性情之異者,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凡品愚迷/耽執違順/順則喜樂/違則哀怒//然哀樂則重/喜怒則輕//故喜則心生懽悅/樂則形於舞忭//怒則當時嗔恨/哀則舉體悲號/慮則抑度未來/嘆則咨嗟已往/變則改易舊事/慹則屈服不伸/姚則輕浮躁動/佚則奢華縱放/啟則開張情慾/態則嬌淫妖冶//眾生心識/變轉無窮/略而言之/有此十二//審而察之/物情斯見矣,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動止交接/性情容貌/皆天所賦//以上言人, '{...}'라고 했다. ◈◈ 孃破案 : 喜怒에서 啟態까지는 모두 사람의 감정이나 태도, 행위를 표현한 말로, 두 글자씩 짝을 이룬다. [본문으로]
- 樂出虛/蒸成菌, ◈ 이 句는 樂出於虛/蒸成於菌처럼 於를 넣어 보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 樂은 체언으로, '{...}'이다. '{...}'으로 읽는다. ◈ 出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虛는 체언으로, '{...}'이다. ◈ 蒸은 체언으로, '{...}'로, '{...}'을 이른다. 陸德明은 之膺反, '{...}'라고 하였다. ◈ 成은 生成이라는 말처럼, 용언으로 '{...}'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 菌은 체언으로, '{...}'이다. 陸德明은 其隕反//向云/結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此蓋事變之異也//自此以上/略舉天籟之無方//自此以下/明無方之自然也//物各自然/不知所以然而然/則形雖彌異/其然彌同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簫管內虛/故能出於雅樂//濕暑氣蒸/故能生成朝菌//亦猶二儀萬物/虛假不眞/從無生有/例如菌樂//浮幻若是/喜怒何施,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無聲而有聲//宣云/本虛器/樂由此作///無形而有形/皆氣所使//以上言物, '{...}'라고 했다. ◈◈ 孃破案 : 이 구문은 莊子가 喜怒 등의 감정과 행위가 사람에게 생겨나는 것을 비유하여 설명하기 위해 든 예시다. [본문으로]
- 日夜相代乎前/而莫知其所萌, ◈ 日夜는 체언으로, '{...}'이다. 日은 '{...}', 夜는 '{...}'이다. ◈ 相은 부사어로, '{...}'다. ◈ 代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乎는 於와 같다. '{...}'다. 前을 받는다. ◈ 前은 체언으로, '{...}'이다. '{...}'이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 而莫의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莫은 부정어다. '{...}'라는 말이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其所萌의 其는 {...}를 가리킨다. 所萌을 받는다. ◈ 所는 '{...}'다. 萌을 받는다. ◈ 萌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즉, 其所萌은 '{...}'이라는 말이 된다. 莫知其所萌은 '{...}'라고 해석된다. 나는 '{...}'처럼 의역하였다. 陸德明은 武耕反, '{...}'라고 했다. ◈◈ 郭象은 日夜相代/代故以新也//夫天地萬物/變化日新/與時俱往/何物萌之哉//自然而然耳,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日晝月夜/輪轉循環/更相遞代/互爲前後//推求根緒/莫知其狀者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日與夜代/於何萌生//上句又見德充符篇, '{...}'라고 했다. 上句는 日夜相代乎前을 이른다. ◈◈ 孃破案 : 莊子는 12개 감정, 태도, 행위가 어디서 생겨나는지를 따져 보려 한다. [본문으로]
- 已乎/已乎, ◈ 已乎는 아마 '{...}'라고 하며 탄식하는 표현인 듯하다. 已는 용언으로, 본래 '{...}'라는 말이다. 乎는 감탄사다. 따라서 정석적으로 {...}라고 번역하였다. 成玄英은 止,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 ◈ 旦暮는 부사어로, 아마 '{...}'라는 말 가탇. 旦은 '{...}'이고, 暮는 '{...}'이다. 陸德明은 暮에 대해 本又作莫/音同, '{...}'라고 하였다. 莫는 '{...}'일 때는 暮와 같이 '{...}'로 읽는다. ◈ 得은 용언으로, 아마 우리에게 '{...}'라는 말 같다. ◈ 此는 {...}를 가리킨다. ◈ 其所由의 其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 같다. 殆와 같다. {...}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볼 수도 있는데, 그러면 是처럼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其가 어떻게 殆와 같을까. 《禮記》 「檀弓 上」에 子張病/召申祥而語之曰/君子曰終/小人曰死/吾今日其庶几乎,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는 殆처럼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 6년에 善不可失/惡不可長/其陳桓公之謂乎, '{...}'라는 말이 있고, 《國語》 「周語」에는 我又章之/懼長及子孫/王室其愈卑乎, '{...}'라는 말이 있는데, 두 글에서 其는 모두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其와 殆의 의미가 같기 때문에, 두 글자를 붙여서 한 단어처럼 사용한 사례도 있다. 《易》 「繫辭 下」에 顏氏之子/其殆庶幾乎,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殆는 '{...}'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其는 아마 顏氏之子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아닐 것이다. 其가 지시대명사일 때는 항상 '{...}'처럼 해석되고, 其 다음엔 체언이 오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그렇지 않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所는 '{...}'이라는 말이다. 由를 받는다. ◈ 由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즉, 所由는 '{...}'이라고 할 수 있겠다. ◈ 以는 '{...}'다. 所由를 받는다. 其를 대명사로 해석한다면, 其所由를 받을 것이다. ◈ 生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生乎의 乎는 {...}다. ◈◈ 郭象은 言其自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推求日夜/前後難知/起心虞度/不如止息//又重推旦暮/覆察昏明/亦莫測其所由/固不知其端緒//欲明世間萬法/虛妄不眞/推求生死/即體皆寂//故老經云/迎之不見其首/隨之而不見其後///理由若此, '{...}'라고 했다. 《老經》은 《道德經》이다. 인용문은 《道德經》 14장이다. ◈◈ 王先謙은 既無可推求/不如其已乎//然俯仰旦暮間/自悟眞理//此者/生之根也, '{...}'라고 했다. [본문으로]
- 非彼無我/非我無所取//是亦近矣, ◈ 이 句는 若非彼/則無我, 若非我/則無所取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이에 맞추어 번역하였다. ◈ 非彼의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無와 같다. 非我의 非도 그렇다. 《史記》 「孔子世家」에 夫子則非罪, '{...}'라는 말이 있고, 《韓非子》 「有度」에는 故忠臣危死於非罪/姦邪之臣安利於無功, '{...}'라는 말이 있으며, 《春秋左氏傳》 「僖公」 4년에 君非姬氏/居不安/食不飽, '{...}'라는 말이 있고, 《管子》 「明法」에 是以忠臣死於非罪/而邪臣起於非功, '{...}'라는 말이 있다. 모든 사례들에서 非는 '{...}'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 彼는 {...}를 가리킨다. 郭象은 彼/自然也, '{...}'라고 하였고, 成玄英도 彼/自然也, '{...}'라고 했다. 한편 宣穎은 彼/即上之此也, '{...}'라고 하였다. 此는 旦暮得此의 此를 이를 것이다. {...}을 가리킨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 같다. ◈ 我는 자신을 가리킨다. ◈ 所取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所는 '{...}'이라는 말이다. 取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일 것이다. 取의 주체가 12개의 감정, 태도, 행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無所取는 '{...}'는 말이 된다. 成玄英은 取/稟受也, '{...}'라고 했다. ◈ 是는 {...}을 가리킨다. 아마 旦暮得此/其所由以生乎//非彼無我/非我無所取를 이르는 듯하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近은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아마 사실에 '{...}'는 뜻 같다. ◈◈ 郭象은 自然生我/我自然生//故自然者/即我之自然/豈遠之哉,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若非自然/誰能生我//若無有我/誰稟自然乎//然我則自然/自然則我/其理非遠/故曰是亦近矣, '{...}'라고 했다. 이처럼 成玄英은 我와 自然을 동일시하고 있다. 다만 내 생각에는 앞의 自然은 '{...}', 道를 뜻하고, 뒤의 自然은 '{...}'을 뜻한다고 보아야 말 뜻이 통하지 않겠나 하다. ◈◈ 孃破案 : 감정과 {...}의 관계 자체가 「齊物論」 전체의 핵심적인 주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본문으로]
- 而不知其所爲使,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는 부정어다. 知를 받는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其는 {...}를 가리킨다. ◈ 所爲使는 '{...}'이라는 뜻이다. 즉, 其所爲使는 '{...}'가 된다. 所는 '{...}'이다. 爲使를 받는다. 爲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使를 받는다. 使는 '{...}'이다. 陸德明은 于僞反//下未爲同, '{...}'라고 하였다. 爲가 于와 僞의 반절이면, '{...}'처럼 해석된다. 未爲는 본문이 아니라 郭象의 注에 있는 말이다. ◈◈ 郭象은 凡物云云/皆自爾耳/非相爲使也/故任之而理自至矣,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言我稟受自然/其理已具//足行手捉/耳聽目視/功能御用/各有司存//亭之毒之/非相爲使/無勞措意/直置任之, '{...}'라고 하였다. ◈◈ 宣穎은 究竟使然者誰邪,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與上怒者其誰邪相應,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必有眞宰/而特不得其眹, ◈ 必은 부사어로, '{...}'이다. 《莊子集解》에는 必有眞宰라고 되어 있고, 《莊子集釋》에는 若有眞宰라고 되어 있다. 必로 보아도 말이 되고, 若으로 보아도 말이 된다. {...}를 따랐다.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眞宰는 명사구로, '{...}'이다. 眞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宰는 본래 '{...}'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체언으로 '{...}'를 뜻한다. ◈ 而特은 아마 한 단어일 것이다. 부사어로, '{...}'이라는 뜻이다. 而는 본래 역접으로 사용된다. 特 역시 역접으로 사용된다. 乃와 같다. 아니면, 而는 역접으로 보되, 特은 '{...}'처럼 다른 부사어로 해석할 수 있다. 特을 '{...}'라고 해석한다면, 而特不得其眹은 '{...}'라고 해석될 것이다. 陸德明은 崔云/特/辭也, '{...}'라고 하였다. ◈ 得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淮南子》 「說山訓」에 吾聞得之矣, '{...}'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得/猶知也, '{...}'라고 하였다. ◈ 其는 眞宰를 가리킨다. ◈ 眹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본래 朕이었는데, 글자 모양이 眹으로 잘못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朕도 '{...}'를 뜻한다. 陸德明은 李除忍反//兆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萬物萬情/趣舍不同/若有眞宰使之然也//起索眞宰之眹跡/而亦終不得/則明物皆自然/無使物然也, '{...}'라고 하였다. 郭象은 {...} 만든다고 하고 있다. 郭象의 설은 분명히 틀렸다. ◈◈ 成玄英은 夫肢體不同/而御用各異/似有眞性/竟無宰主//眹跡攸肇/從何而有,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云若有眞爲主宰者使然/而其眹跡不可得見,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眞宰는 {...}로 사용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문으로]
- 可形已信, ◈ 可는 '{...}'라는 말이다. ◈ 形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 글자는 《莊子集解》에는 形으로 되어 있고, 《莊子集釋》에는 行으로 되어 있다. 行이라면 '{...}'이라고 볼 수 있겠다. 나는 《莊子集解》를 따른다. ◈ 已는 부사어로, 아마 '{...}'라는 말인 듯하다. ◈ 信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今夫行者/信己可得行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信己而用/可意而行/天機自張/率性而動/自濟自足/豈假物哉,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문맥상 可行已信이 아니라 可形已信이 되어야 한다. {...} 초점이 천이된 꼴이 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而不見其形,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은 부정어다. 見을 한정한다. ◈ 見은 용언으로, '{...}'라고 볼 수도 있고, '{...}'라고 볼 수도 있을 듯하다. 그러나 앞의 句에서 形, 즉 '{...}'라는 말이 나온 점을 감안하면, '{...}'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일 때는 '{...}'으로 읽는다. '{...}'일 때는 '{...}'으로 읽는다. ◈ 其는 眞宰를 가리킨다. ◈ 形은 체언으로, 눈으로 보이는 '{...}'를 이른다. ◈◈ 郭象은 不見所以得行之形, '{...}'라고 했다. ◈◈ 成玄英은 物皆信己而行/不見信可行之貌者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可運動者/已信能之/而不見運動我之形,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情而無形,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情은 체언으로, 아마 '{...}'를 뜻할 것이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無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形은 체언으로, 눈으로 보이는 '{...}'를 이른다. ◈◈ 郭象은 情當其物/故形不別見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有可行之情智/無信己之形質,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與我有相維繫之情/而形不可見,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百骸/九竅/六藏/賅而存焉, ◈ 百骸九竅六藏는 '{...}'라는 말이다. 즉, 우리의 '{...}'를 뜻한다. 骸는 '{...}', 竅는 '{...}', 藏은 '{...}'를 이른다. 百, 九, 六은 모두 관형어 역할을 하고 있다. 《荀子》 「天論」에 形具而神生, '{...}'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楊倞은 形謂百骸九竅, '{...}'라고 하였다. 또, 《詩》 「大雅 蕩之什」의 「烝民」에 天生烝民/有物有則, '{...}'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朱熹는 蓋自百骸九竅五髒/而達之君臣父子夫婦長幼朋友/無非物也, '{...}'라고 하였다. 髒은 아마 '{...}'가 아닐까 하다. 아마 骸, 竅, 藏은 사람의 신체를 표현하기 위해 고대부터 쓰던 관용적인 표현이었을 것이다. 나는 '{...}'로 총칭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百骸/百骨節也//九竅/謂眼耳鼻舌口及下二漏也//六藏/六腑也/謂大腸小腸膀胱三焦也, '{...}'라고 하였고, 또 藏/謂五藏/肝心脾肺腎也, '{...}'라고 하였다. 三焦는 목구멍에서 前陰, 後陰까지를 이른다. 上焦, 中焦, 下焦를 가리킨다. 陸德明은 戶皆反//才浪反//案心肺肝脾腎/謂之五藏//大小腸膀胱三焦/謂之六府//身別有九藏氣/天地人//天以候頭角之氣/人候耳目之氣/地候口齒之氣//三部各有天地人/三三而九/神藏五/形藏四/故九//今此云六藏/未見所出, '{...}'라고 하였다. 한편 李楨은 釋文云/此云六藏/未見所出//成疏遂穿鑿以六爲六腑/藏爲五藏/致與上百官九竅/訓不一例//按難經三十九難///五藏亦有六藏者/謂腎有兩藏也//其左爲腎/右爲命門//命門者/謂精神之所舍也//其氣與腎通/故言藏有六也, '{...}'라고 했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疏》는 成玄英의 주석을 뜻한다. 百官九竅는 아마 百骸九竅의 오기일 듯하다. 《難經》은 《八十一難經》이다. 《黃帝八十一難經》이라고 하기도 한다. 五藏亦有六藏者부터 끝까지가 모두 인용문인데, 사실 원문에는 謂精神之所舍也와 其氣與腎通 사이에 男子以藏精/女子以繫胞, '{...}'라는 말이 들어 있다. 생식 기관을 뜻함을 알 수 있다. 한편 王先謙은 眼耳鼻口七竅/與下二漏而九, '{...}'라고 하였다. 漏는 '{...}'는 말로, 아마도 二漏는 '{...}'을 뜻할 것이다. ◈ 賅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齊物論」 외의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다. 該가 잘못된 글자가 아닐지 의뭉스럽다. 該 역시 '{...}'라는 말이다. 該의 言이 뭉개지면서 貝처럼 잘못되어 賅가 되었을 것이다. 陸德明의 주석을 보면, 簡文帝는 賅를 兼, '{...}'라고 풀이했다고 했는데, 이 역시 그 증거다. 該는 '{...}'라는 의미로도 풀이되기 때문이다. 《春秋穀梁傳》 「哀公」 원년에 此該郊之變而道之也, '{...}'라는 말이 있는데, 范宁는 該/備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備, '{...}'라고 했다. 陸德明은 徐古來反//司馬云/備也///小爾雅同//簡文云/兼也, '{...}'라고 했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存은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 같다. ◈◈ 郭象은 付之自然/而莫不皆存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言體骨在外/藏腑在內/竅通內外//備此三事以成一身/故言存, '{...}'라고 했다. [본문으로]
- 吾誰與爲親, ◈ 吾는 1인칭 대명사다. 莊子 자신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좋을 것 같고, 아니면 '우리'라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 誰는 '{...}'이다. 몸 속에 있는 {...}를 이른다. ◈ 與는 아마 '{...}'인 듯하다. 따라서 誰與는 '{...}'라는 뜻이다. 본래는 어순이 與誰가 되어야 할 듯한데, 誰가 의문사처럼 기능하기 때문에 誰與처럼 도치된 듯 보인다. ◈ 爲는 아마도 '{...}'라는 말 같다. ◈ 親은 아마 체언으로, '{...}'이라는 말 같다. 親은 본래 '{...}'는 말이다. 그러나 뒤에 이어지는 君臣, 臣妾 같은 표현 및 그 내용을 고려할 때, {...}처럼 의역하였다. ◈◈ 郭象은 直自存耳,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제부터 莊子는 {...}를 따져 나간다. 뒤에 나오는 說, 私 역시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 汝皆說之乎//其有私焉, ◈ 汝는 2인칭 대명사다. ◈ 皆는 부사어로, '{...}'다. {...}을 가리키는 말이다. ◈ 說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라고 읽는다. 悅과 같다. 郭象은 皆說之/則是有所私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悅/注同//今本多即作悅字//後皆倣此, '{...}'라고 하였다. ◈ 說之乎의 之는 {...}를 가리킨다. ◈ 說之乎의 乎는 의문사다. ◈ 其는 아마 부사어 같다.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將과 같다. 《書》 「虞書 皋陶謨」에 天工人其代之, '{...}'라는 말이 있고, 《書》 「商書 湯誓」에 予其大賚汝, '{...}'라는 말이 있으며, 《書》 「商書 盤庚 上」에 天其永我命于玆新邑, '{...}'라는 말이 있고, 《春秋左氏傳》 「隱公」 11년에 吾子孫其覆亡之不暇/而況能禋祀許乎,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其는 모두 將, '{...}'라는 뜻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有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 같다. ◈ 私는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상기하였듯, 이 글에서 私는 親과 의미가 같다. '{...}'는 의미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 郭象은 有私則不能賅而存矣/故不說而自存/不爲而自生也,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言夫六根九竅/俱是一身/豈有親疏/私存愛悅//若有心愛悅/便是有私//身而私之/理在不可//莫不任置/自有司存//於身既然/在物亦爾,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將皆親而愛悅之乎//或有私於身中之一物乎,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私는 뒤의 師曠, 惠子의 예를 들 때 나오는 愛와도 의미가 같다. 愛 역시 '{...}'는 뜻이다. 우리 자신이 {...} 주재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본문으로]
- 如是皆有爲臣妾乎, ◈ 如는 若처럼 {...}이다. '{...}'처럼 해석하면 되겠다. ◈ 是는 {...}을 가리키는 듯하다. ◈ 皆는 부사어로, '{...}'다. ◈ 有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일 것이다. 又와 같다. 爲가 용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有가 용언이 아닐 것이다. ◈ 爲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臣妾은 체언으로, '{...}'이다. '{...}'을 이른다. 莊子는 장기들이 {...}을 표현하기 위해 도입하였다. 《書》 「周書 費誓」에 馬牛其風/臣妾逋逃/勿敢越逐, '{...}'라는 말이 있는데, 孔安國과 蔡沈은 모두 役人賤者/男曰臣/女曰妾, '{...}'라고 하였다. 役人은 아마 役於人, '{...}'이라는 말일 것이다. 또, 《周禮》 「天官冢宰」에 八曰臣妾,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臣妾/男女貧賤之稱,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臣妾者/士女之賤職也, '{...}'라고 하였다. ◈ 乎는 의문사다. ◈◈ 郭象은 若皆私之/則志過其分/上下相冒/而莫爲臣妾矣//臣妾之才/而不安臣妾之任/則失矣//故知君臣上下/手足外內/乃天理自然/豈眞人之所爲哉, '{...}'라고 했다. ◈◈ 成玄英은 且人之一身/亦有君臣之別/至如見色則目爲君而耳爲臣/行步則足爲君手爲臣也//斯乃出自天理/豈人之所爲乎//非關係意親疏/故爲君臣也//郭注云/時之所賢者爲君/才不應世者爲臣///治國治身/內外無異, '{...}'라고 하였다. 이 부분에서 인용된 郭象의 注는 아랫쪽 문장인 其遞相爲君臣乎에 대한 주석을 뜻한다. ◈◈ 孃破案 : 臣妾은 남을 {...}는 존재를 뜻한다. [본문으로]
- 其臣妾不足以相治乎, ◈ 其는 부사어로, '{...}'처럼 역접으로 해석된다. ◈ 臣妾은 체언으로, '{...}'이다. 莊子는 장기가 {...} 위해 도입하였다. ◈ 不는 부정어다. 足을 한정한다. ◈ 足은 '{...}'라는 말이다. ◈ 以는 '{...}'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所以와 같다. 相治를 받는다. ◈ 相은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治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즉, 不足以相治乎는 '{...}'라는 말이 된다. 臣妾은 {...}다는 뜻이다. 나는 '{...}'처럼 의역하였다. ◈◈ 郭象은 夫臣妾但各當其分耳/未爲不足以相治也//相治者/若手足耳目/四肢百體/各有所司而更相御用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臣妾御用/各有職司/如手執腳行/當分自足/豈爲手之不足而腳爲行乎//蓋天機自張/無心相爲而治理之也//舉此手足/諸事可知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臣妾은 남을 {...} 외부에서 찾아야 한다. [본문으로]
- 其遞相爲君臣乎, ◈ 其는 아마 부사어로,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若과 같다. 《詩》 「小雅 小旻之什」의 「小旻」에 謀之其臧/則具是違//謀之不臧/則具是依, '{...}'라는 말이 있다. 《禮記》 「文王世子」에 公族其有死罪/則磬于甸人, '{...}'라는 말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其濟/君之靈也//不濟/則以死繼之, '{...}'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에 其然/將具敝車而行,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는 모두 '{...}'이라는 말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遞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代와 같다. 陸德明은 音弟//徐又音第, '{...}'라고 하였다. ◈ 相도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君臣은 체언으로, '{...}'다. 君은 '{...}'로, '{...}'이고, 臣은 '{...}'로, '{...}'이다. 臣妾의 경우에는 모두 {...} 해 보면 어떻겠냐는 말이다. ◈ 乎는 의문사다. ◈◈ 郭象은 夫時之所賢者爲君/才不應世者爲臣//若天之自高/地之自卑/首自在上/足自居下/豈有遞哉//雖無錯於當而必自當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首自在上/足自居下//目能視色/耳能聽聲//而用捨有時/故有貴賤//豈措情於上下/而遞代爲君臣乎//但任置無心而必自當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앞에서는 장기를 {...} 해 본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其有眞君存焉, ◈ 其는 아마 부사어로, '{...}'일 것이다. 殆와 같다. 其가 殆와 통용된다는 점은 앞에 나온 其所由以生乎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有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일 것이다. ◈ 眞君은 명사구로, '{...}'다. 眞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고, 君은 체언으로, '{...}'다. 장기들 중에 장기의 작용을 일으키는 '{...}'를 찾는 대신, 이 모든 작용을 총괄하는 眞君을 상정하겠다는 말이다. ◈ 存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任之而自爾/則非僞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直置忘懷/無勞措意/此即眞君妙道/存乎其中矣, '{...}'라고 하고, 또 又解//眞君即前之眞宰也//言取捨之心/青黃等色/本無自性/緣合而成/不自不他/非無非有/故假設疑問/以明無有眞君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謂役使之也//言皆悅不可/有私不可//既如是矣/或皆有之/而賤爲役使之臣妾乎/然無主不足以相治也//其或遞代爲君臣乎/然有眞君在焉//即上眞宰也//此語點醒,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眞君은 앞에 나왔던 眞宰와 같다. 장기들을 {...} 상정된 개념이다. [본문으로]
- 如求得其情與不得/無益損乎其眞, ◈ 如는 가정하는 말로, '{...}'이다. ◈ 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得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淮南子》 「說山訓」에 吾聞得之矣, '{...}'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得/猶知也, '{...}'라고 하였다. ◈ 其情의 其는 眞君 혹은 眞宰를 이른다. 나는 眞宰라고 보았다. ◈ 情은 체언으로, '{...}'다. ◈ 與는 두 말을 병렬적으로 이어 주는 표현으로, '{...}'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 不得은 목적어인 其情이 생략되어 있다고 보고, 不得其情처럼 번역해야 한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益損은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益은 '{...}', 損은 '{...}'이다. ◈ 乎는 '{...}'라는 말이다. 於와 같다. ◈ 其眞의 其는 {...}를 이른다. 나는 {...}로 간주하였다. ◈ 眞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郭象은 凡得眞性/用其自爲者/雖復皁隸/猶不顧毀譽而自安其業//故知與不知/皆自若也//若乃開希幸之路/以下冒上/物喪其眞/人忘其本/則毀譽之間/俯仰失錯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心境相感/欲染斯興//是以求得稱情/即謂之爲益//如其不得/即謂之爲損//斯言凡情迷執/有得喪以攖心//道智觀之/無損益於其眞性者也,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彼我相形而有是非/而是非之成於心者/先入而爲之主//是之非之/隨人以爲役/皆臣妾也/而百骸九竅六藏悉攝而從之//夫此攝而從之以聽役於人/與其心之主宰/果有辨乎/果無辨乎//心之主宰有是非/於人何與//求得人之情而是之非之/無能爲益/不得無能爲損//而既搆一是非之形/役心以從之/終其身守而不化/夫是之謂成心//成心者/臣妾之所以聽役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眞宰, 즉 道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眞宰의 작용이 {...}는 점을 논증하였다. [본문으로]
- 一受其成形/不忘以待盡, ◈ 一은 부사어로, '{...}'이라는 뜻이다. ◈ 受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其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 成形은 명사구로, '{...}'다. 成은 관형어로 '{...}'이다. 形은 체언으로, '{...}'다. ◈ 不은 부정어다. 忘을 한정한다. ◈ 忘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아니면 亡의 가차자로 보고, '{...}'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그러면 忘이 왜 '{...}'라는 의미일까. 《國語》 「魯語」와 《史記》 「孔子世家」에 使無忘職業,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忘은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또, 《春秋左氏傳》 「隱公」 7년에 壬申/及鄭伯盟/歃如忘,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志不在於歃血, '{...}'라고 하였다. 이 역시 '{...}'라는 의미다. ◈ 以는 순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而와 같다. 《論語》 「爲政」에 使民敬忠以勸/如之何, '{...}'라는 말이 있다. 《禮記》 「爲政」에 治世之音安以樂/亂世之音怨以怒/亡國之音哀以思,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以는 모두 而, '{...}'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이 예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㠯以已」에 수록되어 있다. ◈ 待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盡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郭象은 言性各有分/故知者守知以待終/而愚者抱愚以至死/豈有能中易其性者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稟受形性/各有涯量/不可改愚以爲智/安得易醜以爲妍//是故形性一成/終不中途亡失/適可守其分內/待盡天年矣,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一受其成形/不亡以待盡///又見田子方篇/亡作化, '{...}'라고 하였다. 「田子方」은 《外篇》에 속한다. 「田子方」에는 吾一受其成形/而不化以待盡,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化는 단순히 '{...}' 보다는, '{...}'라고 이해하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 孃破案 : 일단 세상에 태어났다면, 眞宰, 즉 道에게서 받은 우리의 신체를 {...} 원칙은 「養生主」에서부터 상세하게 드러난다. [본문으로]
- 與物相刃相靡/其行盡如馳/而莫之能止/不亦悲乎, ◈ 與는 '{...}'라는 말이다. 物을 받는다. ◈ 物은 체언으로, 자기 자신 외의 '{...}'을 이른다. ◈ 相은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刃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逆, '{...}'라고 하였다. ◈ 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미'라고 읽는다. 成玄英은 順, '{...}'라고 하였다. ◈ 其行의 其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 같다. 乃와 같다. 《禮記》 「月令」에 五者備當/上帝其饗, '{...}'라는 말이 있고, 《春秋左氏傳》 「僖公」 5년에 鶉之賁賁/天策焞焞/火中成軍/虢公其奔, '{...}'라는 말이 있으며, 《春秋左氏傳》 「宣公」 2년에 非馬也/其人也, '{...}'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喪田不懲/禍亂其興,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其는 모두 乃처럼 '{...}'라고 해석된다. ◈ 行은 용언으로, '{...}'라는 말 같다. ◈ 盡은 체언으로, '{...}'라는 말 같다. 자기 命을 '{...}'시키다는 말이다. ◈ 如는 아마 '{...}'와 같은 말일 것이다. 而와 같다. 《春秋左氏傳》 「隱公」 7년에 壬申/及鄭伯盟/歃如忘, '{...}'라는 말이 있는데, 林堯叟는 服虔曰/如/而也//蓋歃血而忘之, '{...}'라고 했다. 또, 《春秋左氏傳》 「莊公」 7년에 星隕如雨,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如/而也, '{...}'라고 하였다. 또, 이 말은 《漢書》 「五行志 下之下」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五行志」 본문에는 如/而也/星隕而且雨, '{...}'라고 하며 劉歆의 설이 인용되어 있다. 또, 《荀子》 「儒效」에 鄕是如不臧/倍是如不亡者/自古及今未嘗有也, '{...}'라는 말이 있는데, 盧文弨는 正文兩如字/俱讀爲而, '{...}'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典釋文》 「如」에 수록되어 있다. ◈ 馳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사람들이 {...}는 뜻이다. ◈ 而莫의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莫은 부정어다. '{...}'라는 말이다. ◈ 莫之能止의 之는 아마 {...} 같다. 之가 없어도 莫能止로 충분히 말이 된다. ◈ 能은 '{...}'라는 말이다. 止를 받는다. ◈ 止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따라서 能止는 '{...}'는 말이 되고, 莫之能止는 '{...}'는 말이 된다. ◈ 不은 부정어다. 悲를 한정한다. ◈ 亦은 부사어로, '{...}'이다. ◈ 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郭象은 群品云云/逆順相交/各信其偏見而恣其所行/莫能自反//此比眾人之所悲者/亦可悲矣//而眾人未嘗以此爲悲者/性然故也//物各性然/又何物足悲哉,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群品云云/銳情逐境//境既有逆有順/心便執是執非//行有終年/速如馳驟//唯知貪境/曾無止息//格量物理/深可悲傷,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終身役役而不見其成功, ◈ 終身은 아마 부사어구로,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終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身은 체언으로, '{...}'이다. 즉, 終身은 '{...}'라는 뜻이 된다. ◈ 役役은 '{...}'라는 말 같다. 앞의 役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뒤의 役은 체언으로, '{...}'이다. 眞宰, 즉 道가 {...} 성공하기 위해서 '{...}'는 뜻이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은 부정어다. 見을 한정한다. ◈ 見은 용언으로, 아마도 '{...}'라는 말인 듯하다. 《三國志》 「魏志 鍾繇華歆王朗傳」에 明帝時大司農弘農董遇等/亦歷注經傳/頗傳於世, '{...}'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한 裴松之의 주석에 讀書百徧/而義自見, '{...}'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 見은 '{...}'는 말로 사용되었다. ◈ 其는 사람들 자신을 가리킨다. ◈ 成功은 아마 한 단어의 체언으로, '{...}'를 뜻하는 듯하다. 道를 이른다. 成功을 세속적인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용언인 見을 해석할 방법이 불분명해진다. 또, 道라고 해석해야 뒤의 句인 不知其所歸, '{...}'라는 말과 대구가 잘 이루어진다. 따라서 道라고 해석해야 한다. 成은 '{...}'이다. 功은 '{...}'이다. ◈◈ 郭象은 夫物情無極/知足者鮮//故得此不止/復逐於彼//皆疲役終身/未厭其志/死而後已//故其成功者無時可見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物浮競/知足者稀/故得此不休/復逐於彼//所以終身疲役/沒命貪殘/持影繫風/功成何日,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여기서 成功은 {...}을 뜻하지 않나 싶다. [본문으로]
- 苶然疲役而不知其所歸/可不哀邪, ◈ 苶然은 아마 '{...}'을 이르는 듯하다. 成玄英은 疲頓貌,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乃結反/徐李乃協反//崔音捻/云/忘貌///簡文云/疲病困之狀, '{...}'라고 했다. 盧文弨는 苶/今注本乃作薾//說文引詩彼薾維何/音義與此異, '{...}'라고 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文解字》에서는 薾를 華盛, '{...}'라고 하였다. 인용문은 《詩》 「小雅 鹿鳴之什」의 「采薇」다. 다만 지금은 글자가 바뀌어서, 彼薾惟何가 아니라 彼爾維何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郭慶藩은 苶/司馬作薾//文選謝靈運過始寧墅詩注引司馬云/薾/極貌也///釋文闕, '{...}'라고 하였다. 《文選》의 注는 李善의 注를 이른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李善은 薾의 발음을 奴結切, '奴와 結의 반절'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薾는 '{...}'처럼 읽어야 한다. 《說文解字》에는 从艸爾聲, '{...}'라고 하였으므로, 《說文解字》를 따른다면 '{...}'라고 읽어야 한다. 아마 이 글자는 의미에 따라 소리가 달라지는 것 같다. 郭慶藩은 《司馬彪本》에는 苶이 薾로 되어 있다고 했으므로, 薾이 원래 글자인데, 속자로 苶처럼 쓰다가 나중 판본들에는 모두 苶로 바뀌지 않았나 생각된다. 따라서 薾로 볼 경우, 《說文解字》의 '{...}'를 따르지 않고, 陸德明이 苶의 발음으로 제시하였듯 乃結反, 즉 '{...}'이나 '{...}'처럼 읽어야 할 것이다. ◈ 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役은 체언으로, '{...}'이다. 疲役은 아마 疲於役으로 보고,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고생한다는 뜻이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知의 不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其는 사람을 자신을 가리킨다. ◈ 所歸는 '{...}'이다. 道를 이른다. 所는 '{...}'이다. 歸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可는 '{...}'는 말이다. 不哀를 받는다. ◈ 不哀의 不은 부정어다. 哀를 한정한다. ◈ 哀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앞의 悲와 같다. ◈ 邪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라고 읽는다. ◈◈ 郭象은 凡物各以所好役其形骸/至於疲困苶然//不知所以好此之歸趣云何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而所好情篤/勞役心靈/形魂既弊/苶然困苦//直以信心/好此貪競/責其意謂/亦不知所歸//愚癡之甚/深可哀歎,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所有皆幻妄/故無成功/疲於所役/而不知如何歸宿,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앞 句의 其成功과 이 句의 其所歸는 {...}을 의미해야 한다. [본문으로]
- 人謂之不死/奚益, ◈ 人은 체언으로, 보통 '{...}'이다. ◈ 謂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謂之의 之는 {...}을 이른다. ◈ 不은 부정어다. 死를 한정한다. ◈ 死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奚는 의문사로, '{...}'이다. 여기서는 '{...}'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成玄英은 何, '{...}'라고 하였다. ◈ 益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지만, 문맥상 '{...}'처럼 해석해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道를 따를 줄 모르는 사람들을 보고 죽지 않았다고 하지만, 莊子가 보기에 이 사람들은 죽은 것과 '{...}' 때문이다. 莊子는 '{...}'라는 말을 奚益, '{...}'라고 표현하고 있다. ◈◈ 郭象은 言其實與死同,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耽滯如斯/困而不已/有損行業/無益神氣/可謂雖生之日猶死之年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形化/其心與之然/可不謂大哀乎, ◈ 其形의 其는 {...}을 가리킨다. 其心의 其도 마찬가지다. ◈ 形은 체언으로, '{...}'다. ◈ 化는 용언으로, 문맥을 고려할 때, 단순히 '{...}'는 말이 아니라, '{...}'로 보아야 할 듯하다. 道를 {...}는 말이다. 《內篇》에서 化는 道가 내린 변화를 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亡이나 毁처럼 부정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 與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之를 받는다. ◈ 與之의 之는 形, 즉 '{...}'를 가리킨다. ◈ 然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化, 즉 '{...}'라는 의미를 받는다. 成玄英은 然/猶如此也, '{...}'라고 하였다. ◈ 可는 '{...}'는 말이다. ◈ 不은 부정어다. 謂를 한정한다. ◈ 謂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大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아마 '{...}'라고 읽을 것이다. ◈ 哀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郭象은 言其心形並馳/困而不反/比於凡人所哀/則此眞哀之大也//然凡人未嘗以此爲哀/則凡所哀者/不足哀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念念遷移/新新流謝/其化而爲老/心識隨而昏昧/形神俱變/故謂與之然//世之悲哀/莫此甚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縱生何用//及形化而心亦與之化/靈氣蕩然矣,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人之生也/固若是芒乎//其我獨芒/而人亦有不芒者乎, ◈ 人은 체언으로, 보통 '{...}'이다. ◈ 之는 {...}다. ◈ 生은 체언으로, '{...}'이다. ◈ 人之生也의 也는 '{...}'이다. 者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固는 부사어로, '{...}'이라는 말이다. ◈ 若은 '{...}'는 말이다. 是를 받는다. ◈ 是는 其形化/其心與之然, 즉 {...}을 가리킨다. ◈ 芒은 아마 荒의 가차자일 것이다.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莊子는 앞에서 {...} 이야기를 이를 것이다. 《爾雅》 「釋天」에 在巳曰大荒落, '{...}'라는 말이 있는데, 《史記》 「歷書」에는 祝犁大芒落이라고 되어 있다. 즉, 《爾雅》에 나온 大荒落의 荒이 《史記》에는 芒으로 되어 있다. 이 두 글자가 통용되었기기 때문일 것이다. 《史記》에 대해 裴駰은 芒/一作荒, '{...}'라고 하였고, 張守節은 姚察云/言萬物皆熾盛而大出/霍然落之/故云荒落也, '{...}'라고 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闇昧,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莫剛反/又音亡//芒/芒昧也//簡文云/芒/同也, '{...}'라고 했다. ◈ 芒乎의 乎는 의문사다. 芒者乎의 乎도 그렇다. ◈ 其我獨芒은 보통 莊子가 '{...}'라고 하는 말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莊子가 芒하다면, {...}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말은 其我獨爲芒, '{...}'처럼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다. 나는 이렇게 해석하였다. ◈ 其는 아마 부사어로, '{...}'처럼 해석되는 듯하다. 或과 같다. 其가 殆, 즉 '{...}'처럼 해석될 때가 있는데, 그 의미가 或과 유사하다. 其가 '{...}'라고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所由以生乎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我는 1인칭 대명사다. 莊子 본인을 가리킨다. ◈ 獨은 부사어로, '{...}'다. ◈ 而人의 而는 순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 亦은 부사어로, '{...}'이다. ◈ 有는 용언으로, 아마 爲처럼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有와 爲는 통용되었다. 《孟子》 「滕文公 上」에 人之有道也/飽食暖衣/逸居而無教/則近於禽獸,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有는 '{...}'는 말로, 爲와 같다. 《國語》 「周語」에는 胡有孑然其效戎翟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有는 '{...}'라는 말로, 爲와 같다. 또, 《國語》 「晉語」에 克國得妃/其有吉孰大焉, '{...}'라는 말이 있는데, 《春秋左氏傳》 「昭公」 5년에는 其爲吉孰大焉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두 句는 有와 爲가 다를 뿐, 나머지는 같다. 내용도 같을 것이다. 이렇게 사용된 까닭은 有와 爲가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王引之는 爲有/一聲之轉//故爲可訓爲有/有亦可訓爲爲, '{...}'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有」에 수록되어 있다. ◈ 不芒의 不은 부정어다. 芒을 한정한다. ◈ 者는 '{...}'이다. 不芒을 받는다. 즉, 不芒者는 '{...}'이라는 말이 된다. 보통 사람들이 {...}는 말 같다. ◈ 者乎의 乎는 {...}다. ◈◈ 郭象은 凡此上事/皆不知其所以然而然/故曰芒也//今未知者皆不知所以知而自知矣/生者皆不知所以生而自生矣//萬物雖異/至於生不由知/則未有不同者也/故天下莫不芒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言凡人在生/芒昧如是/舉世皆惑/豈有一人不昧者//而莊子體道眞人/智用明達/俯同塵俗/故云而我獨芒//郭注稍乖/今不依用,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 자신 외에도 {...}를 깨달은 사람이 있겠냐는 말로 보인다. [본문으로]
- 夫隨其成心而師之/誰獨且無師乎, ◈ 夫는 '{...}'처럼 역접으로 해석된다. ◈ 隨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其는 {...}을 가리킨다. '자신의'처럼 해석된다. ◈ 成心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莊子는 이 말을 한 단어로 사용하고 있다. 成心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이라고 긍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이라고 하여 부정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齊物論」의 내용을 고려할 때 成心을 {...}으로 해석할 여지는 없다. 따라서 '{...}'으로 해석해야 한다. 특히 본문처럼 成心을 師한다, 즉, '{...}'는 말은 「齊物論」에서 그 견해를 가지고 '{...}'는 의미로 사용된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師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法과 같다. 無師乎의 師도 그렇다. ◈ 師之의 之는 成心을 가리킨다. ◈ 誰는 '{...}'다. ◈ 獨은 부사어로, 아마 '{...}'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라고 번역하였다. ◈ 且는 아마 {...}인 듯하다. 즉, 獨且는 곧 獨과 같다. 뒤에 또 獨且라는 말이 나오고, 또 果且라는 말이 나오는데, 且는 모두 {...}다. ◈ 無는 부정어다. 師를 한정한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郭象은 夫心之足以制一身之用者/謂之成心//人自師其成心/則人各自有師矣//人各自有師/故付之而自當,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域情滯著/執一家之偏見者/謂之成心//夫隨順封執之心/師之以爲準的/世皆如此/故誰獨無師乎,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成心은 그 타당성과는 {...} 될 것이라는 말이다. [본문으로]
-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愚者與有焉, ◈ 奚는 '{...}'다. ◈ 必은 '{...}'이다. ◈ 知代而心自取者는 知代與心而自取之者처럼 해석해야 한다. 본문의 而는 與처럼 '{...}'로 해석된다. 즉, 知의 목적어는 代와 心 두 가지이다. 取의 목적어 역시 代와 心일 것이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知의 목적어는 代와 心 두 가지다. ◈ 代는 아마 체언으로, 앞에 나왔던 {...}을 이르는 듯하다. 知의 목적어다. 즉, 知代는 이 {...}는 뜻이다. ◈ 而는 '{...}'처럼 해석된다. 與와 같다. 《論語》 「雍也」에 不有祝鮀之佞/而有宋朝之美/難乎免於今之世矣, '{...}'라는 말이 있고, 《墨子》 「尙賢 上」에 聞善而不善/皆以告其上, '{...}'라는 말이 있으며, 《韓非子》 「說林 上」에는 以管仲之聖/而隰朋之智, '{...}'라는 말이 있는데, 모두 而는 '{...}'라고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 自는 부사어로, '{...}'다. ◈ 取는 용언으로, '{...}'라고 볼 수도 있고, '{...}'라고 볼 수도 있겠다. '{...}'라고 보면 知의 의미와 중복되므로, 나는 '{...}'라고 번역하였다. ◈ 自取者의 者는 '{...}'이다. 知代而心自取를 받는다. 知代而心自取者는 곧 '{...}'을 뜻한다. 뒤의 句에 있는 愚者는 대조를 이룬다. ◈ 有之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有焉의 有도 그렇다. ◈ 有之의 之는 {...}을 가리킨다. ◈ 愚者는 '{...}'이다. 愚者는 知代而心自取者와 대조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愚者의 범주에 속할 것이다. 愚는 관형어로, '{...}'이다. 者는 '{...}'이다. 愚를 받는다. ◈ 與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陸德明은 音豫,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夫以成代不成/非知也/心自得耳//故愚者亦師其成心/未肯用其所謂短而舍其所謂長者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愚惑之類/堅執是非/何必知他理長/代己之短/唯欲斥他爲短/自取爲長//如此之人/處處皆有/愚癡之輩/先豫其中,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說文/代/更也///今日以爲是/明月以爲非/而一成乎心/是非迭出而不窮/故曰知代//心以爲是/則取所謂是者而是之/心以爲非/則取所謂非者而非之/故曰心自取, '{...}'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 王先謙은 心之所志/隨而成之//以心爲師/人人皆有/奚必知相代之理/而心能自得師者有之//即愚者莫不有焉,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未成乎心而有是非/是今日適越而昔至也, ◈ 未는 부정어다. 成을 한정한다. ◈ 成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乎는 '{...}'다. 於와 같다. ◈ 心은 체언으로, '{...}'이다. 따라서 未成乎心은 '{...}', 즉 '{...}'라는 말이 된다. ◈ 而有是非의 而는 역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非는 체언으로, '{...}'이다. 王先謙은 此是非與下是非無涉, '{...}'라고 하였는데, 내 생각에는 {...}하다. 萬物이 道에게서 받은 {...}와 동일하다. ◈ 是今日의 是는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未成乎心而有是非를 가리킨다. ◈ 今日은 체언으로, '{...}'이다. ◈ 適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越은 나라 이름이다. 당시 중국의 동남쪽 끝에 있었다. 《史記》 「越王句踐世家」에 그 연혁이 전한다. ◈ 而昔至의 而는 역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 昔은 '{...}'다. 陸德明은 崔云/昔/夕也///向云/昔者/昨日之謂也, '{...}'라고 했다. ◈ 至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今日適越/昨日何由至哉//未成乎心/是非何由生哉//明夫是非者/群品之所不能無/故至人兩順之,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吳越路遙/必須積旬方達/今朝發途/昨日何由至哉//欲明是非彼我/生自妄心//言心必也未生/是非從何而有//故先分別而後是非/先造途而後至越,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是非者/人我相接而成者也//而必其心先有一是非之準/而後以爲是而是之/以爲非而非之//人之心萬應焉而無窮/則是非亦與爲無窮//是非因人心而生/物論之所以不齊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未成凝一之心/妄起意見/以爲若者是道/若者非道/猶未行而自夸已至, '{...}'라고 하였고, 또 天下篇今日適越而昔來/惠施與辯者之言也/此引爲喩, '{...}'라고 하였다. 「天下」는 《雜篇》에 속한다. ◈◈ 孃破案 : 越나라 일화는 《雜篇》 「天下」에 나오는 歷物之意 중 한 가지다. 歷物之意는 혜자가 {...}이 있고서야 是非가 있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본문으로]
- 是以無有爲有//無有爲有/雖有神禹/且不能知/吾獨且奈何哉, ◈ 是는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앞의 句에 있었던 未成乎心而有是非를 가리킨다. ◈ 是以의 以는 '{...}'이다. 無有를 받는다. ◈ 無有는 명사구로, '{...}'이라는 말이다. 無는 부정어다. 有를 한정한다.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爲有의 有는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 無有爲有는 명사구로, 앞의 以無有爲有처럼 '{...}'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 雖는 부사어로, '{...}'이다. ◈ 雖有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神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 禹는 夏나라의 시조다. 내 체감상, {...} 묘사는 대체로 긍정적인 듯하다. 成玄英은 夏禹/字文命/鯀子/啟父也//諡法/泉源流通曰禹//又云/受禪成功曰禹, '{...}'라고 하였다. ◈ 且는 부사어로, '{...}'다. ◈ 不能은 '{...}'라는 말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吾는 1인칭 대명사로, 莊子 본인을 이른다. ◈ 獨은 부사어로, 아마 '{...}'이라는 말일 것이다. 나는 '{...}'이라고 번역하였다. ◈ 獨且의 且는 아마 {...}인 듯하다. 즉, 獨且는 곧 獨과 같다. 앞에 또 獨且라는 말이 있었고, 또 뒤에 果且라는 말이 나오는데, 且는 모두 {...}다. ◈ 奈何는 '{...}'라는 말이다. 成心이 {...}는 말이 된다. 《莊子集釋》에는 奈何가 柰何로 되어 있다. 의미는 같다. 나는 《莊子集解》를 따랐다. ◈◈ 郭象은 理無是非/而惑者以爲有/此以無有爲有也//惑心已成/雖聖人不能解/故付之自若而不強知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理無是非而惑者爲有/此用無有爲有也//迷執日久/惑心已成/雖有大禹神人/亦不能令其解悟//莊生深懷慈救/獨柰之何/故付之自若/不強知之者也, '{...}'라고 하였다. 莊生은 莊子를 이르는 말이다. ◈◈ 王先謙은 無而爲有/雖禹之智/不能解悟//自夸自欺/吾末如之何矣//此段反復喚醒世人, '{...}'라고 하였다. 吾末如之何矣는 吾未如之何矣의 오기일 것이다. [본문으로]
- 夫言非吹也/言者有言, ◈ 夫는 '{...}'처럼 {...}이다. ◈ 夫言의 言은 체언으로, '{...}'이다. 言者의 言도 그렇다. ◈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吹也를 받는다. ◈ 吹는 관형어로, 바람을 '{...}'이라는 말이다. 陸德明은 如字/又叱瑞反//崔云/吹/猶籟也, '{...}'라고 하였다. 籟는 '{...}'다. 「齊物論」 첫 부분에서 子綦와 子游가 이야기를 나누었던 화제 또한 天籟, 地籟, 人籟의 籟였다. 王先謙은 應上吹, '{...}'라고 하였다. 앞의 내용에서 子綦가 {...}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를 이른다. ◈ 非吹也의 也는 아마 '{...}'이라는 말일 것이다. 者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言者의 者는 '{...}'이다. ◈ 有는 용언으로, '{...}'라고 보아도 좋고, '{...}'라고 보아도 좋겠다. ◈ 有言의 言은 체언인데, '{...}'이 아니라 '{...}'다. ◈◈ 郭象은 各有所說/故異於吹,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名言之與風吹/皆是聲法/而言者必有詮辯/故曰有言,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앞의 일화에서 子綦가 夫吹萬不同이라고 한 적이 있었는데, 그 吹와 이 吹는 같다고 볼 수 없겠다. 子綦의 吹는 '{...}'이었고, 이 부분의 吹는 '{...}'를 뜻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其所言者特未定也, ◈ 其는 부사어로, '{...}'이다. 若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遞相爲君臣乎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所言者는 말이 '{...}'다. 所는 '{...}'이다. 言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者는 '{...}'이다. ◈ 特은 부사어로, 아마 '{...}'이라는 말인 듯하다. ◈ 未는 부정어다. 定을 한정한다. ◈ 定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我以爲是而彼以爲非/彼之所是/我又非之/故未定也//未定也者/由彼我之情偏,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雖有此言/異於風吹/而咸言我是/僉曰彼非//既彼我情偏/故獨未定者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果有言邪, ◈ 果는 부사어로, '{...}'이다. 成玄英은 決定, '{...}'라고 하였다.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言은 체언으로, '{...}'라고 해석된다. ◈ 邪는 {...}다. '{...}'라고 읽는다. ◈◈ 郭象은 以爲有言邪//然未足以有所定,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未嘗有言邪, ◈ 其는 부사어로,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抑과 같다. 《戰國策》 「韓策」에 子以秦爲將救韓乎/其不乎, '{...}'라는 말이 있고, 《史記》 「趙世家」에 秦趙與國/以彊征兵於韓/秦誠愛趙乎/其實憎齊乎, '{...}'라는 말이 있으며, 《晏子春秋》 「內篇 雜下」에 請飲而後辭乎/其辭而後飲乎,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는 모두 抑처럼 '{...}'으로 해석된다. 이 사례들은 모두 金元中의 《한문 해석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 未嘗은 '{...}'라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嘗은 '{...}'라는 말이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言은 체언으로, '{...}'이다. ◈ 邪는 {...}다. '{...}'라고 읽는다. ◈◈ 郭象은 以爲無言邪//則據己已有言,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此以爲是/彼以爲非/此以爲非/而彼以爲是//既而是非不定/言何所詮//故不足稱定有言也//然彼此偏見/各執是非/據己所言/故不可以爲無言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우리가 하는 말에는 대응되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莊子는 {...}는지 되물으려 하는 것 같다. [본문으로]
- 其以爲異於鷇音/亦有辯乎/其無辯乎, ◈ 其以爲의 其는 부사어로, 아마 '{...}'라는 말 같다. ◈ 以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異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於는 '{...}'다. ◈ 鷇音은 명사구로, '{...}'다. 鷇는 본래 '{...}'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관형어로, '{...}'라고 해석된다. 音은 체언으로, '{...}'다. 成玄英은 鳥子欲出卵中而鳴/謂之鷇音也/言亦帶殼曰鷇,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苦豆反/李音彀//司馬云/鳥子欲出者也, '{...}'라고 했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有辯의 辯은 辨과 통용된다. 체언으로, '{...}'을 뜻한다. 無辯의 辯도 그렇다. 成玄英은 別, '{...}'라고 하였다. 《莊子集解》에는 이 글자들이 辨으로 되어 있다. ◈ 亦有辯乎의 乎는 의문사다. 其無辯乎의 乎도 그렇다. ◈ 其無辯乎의 其는 부사어로, '{...}'처럼 해석된다. 抑과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未嘗有言邪의 其 부분에 이미 설명해 두었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夫言與鷇音/其致一也/有辯無辯/誠未可定也//天下之情不必同而所言不能異/故是非紛紜/莫知所定,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彼此偏執/不定是非/亦何異鷇鳥之音/有聲無辯//故將言說異於鷇音者/恐未足以爲別者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人言非風吹比/人甫有言/未定足據也//果據以爲言邪//抑以爲無此言邪//抑以爲與初生鳥音果有別乎/無別乎//其言之輕重尙不定,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뒤에서 道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 논증을 펼친다. [본문으로]
- 道惡乎隱而有眞僞, ◈ 道는 이치로써의 '{...}'다. 이 句에서 비로소 처음으로 '{...}'라는 말이《內篇》에 등장한다. ◈ 惡乎는 '{...}'라는 말이다. 惡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乎는 '{...}'라는 말이다. 於와 같다. 成玄英은 惡乎/謂於何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烏//下皆同, '{...}'라고 하였다. ◈ 隱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說文解字》 「𨸏部」에는 隱/蔽也, '{...}'라고 되어 있다. 《禮記》 「檀弓 上」에 事親有隱而無犯,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隱/謂不稱揚其過失也, '{...}'라고 하였다. 드러내지 않으니 곧 '{...}'는 뜻이다. ◈ 而는 '{...}'라는 말이다. 乃와 같다. 《大戴禮記》 「曾子本孝」에 如此/而成於孝子也, '{...}'라는 말이 있는데, 而는 '{...}'으로 해석된다. 《禮記》 「檀弓 下」에는 而曰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而/猶乃也, '{...}'라고 하였고, 孔穎達 역시 而/乃也, '{...}'라고 하였다. 또, 《禮記》 「祭義」에 已徹而退/無敬齊之色/而忘本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도 而는 '{...}'이라고 해석된다. 이 사례들에서 而는 모두 乃라고 해석된다. 또, 《書》 「虞書 堯典」에 試可乃已,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史記》 「五帝本紀」에 試不可用而已, '{...}'라고 되어 있다. 《禮記》 「曲禮 上」에는 卒哭乃諱, '{...}'라는 말이 있는데, 《禮記》 「檀弓 下」와 「雜記 下」에는 卒哭而諱라고 되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28년에 數之以其不用僖負羈/而乘軒者三百人也, '{...}'라는 말이 있는데, 《史記》 「管蔡世家」에는 余尋曹共公之不用僖負羈/乃乘軒者三百人, '{...}'라고 되어 있다. 王引之는 《史記》 「曹世家」라고 인용해 두었는데, 아마 「管蔡世家」를 착각한 모양이다. 다만, 「晉世家」에 數之以其不用釐負羈言/而用美女乘軒者三百人也, '{...}'라는 말은 있다. 또, 《史記》 「淮陰侯列傳」에 相君之背/貴乃不可言, '{...}'라는 말이 있는데, 《漢書》 「蒯伍江息夫傳」에는 相君之背/貴而不可言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而와 乃가 통용되었기 때문에 혼용된 것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眞僞는 체언으로, '{...}'다. 陸德明은 一本作眞詭//崔本作眞然,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虛通至道/非眞非僞/於何逃匿而眞僞生焉,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본래 세상에는 眞僞가 {...} 되었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言惡乎隱而有是非, ◈ 言은 체언으로, '{...}'이다. 다만 {...} 온전한 말을 의미한다. '{...}'이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 惡乎는 '{...}'라는 말이다. 惡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乎는 '{...}'라는 말이다. 於와 같다. ◈ 隱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王先謙은 蔽, '{...}'라고 하였다. ◈ 而는 '{...}'라는 말이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句인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是非는 체언으로, '{...}'다. ◈◈ 郭象은 道焉不在//言何隱蔽而有眞僞/是非之名紛然而起,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至教至言/非非非是/於何隱蔽/有是有非者哉,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道何以蔽而至於有眞有僞//言何以蔽而至於有是有非,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본래 세상에는 是非가 {...} 말과 의미가 같다. [본문으로]
- 道惡乎往而不存, ◈ 道는 이치로써의 '{...}'다. ◈ 惡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 乎는 '{...}'라는 말이다. 於와 같다. ◈ 往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而는 '{...}'라는 말이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不는 부정어다. 存을 한정한다. ◈ 存은 용언으로, 아마 '{...}'는 말인 듯하다. 成玄英은 在, '{...}'라고 하였다. ◈◈ 郭象은 皆存,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陶鑄生靈/周行不殆/道無不遍/于何不在乎//所以在僞在眞而非眞非僞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은 惡 때문에 의문문으로 {...} 타당할 듯 보인다. [본문으로]
- 言惡乎存而不可, ◈ 言은 체언으로, 진정한 '{...}'이다. {...}을 이른다. ◈ 惡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 乎는 '{...}'라는 말이다. 於와 같다. ◈ 存은 용언으로, 아마 '{...}'는 말인 듯하다. ◈ 而는 '{...}'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不은 부정어다. 可를 한정한다. ◈ 可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皆可,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玄道眞言/隨物生殺/何往不可而言隱邪//故可是可非/而非非非是者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觸處皆道/本不須言//一言一道/亦不須辯,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道惡乎往而不存처럼 순수한 {...}을 설명하고 있다. [본문으로]
- 道隱於小成, ◈ 道는 이치로써의 '{...}'다. ◈ 隱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於는 '{...}'다. ◈ 小成은 '{...}'를 이른다. 儒墨의 {...}하는 표현이다. 小는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다. 成은 체언으로, '{...}'다. 成玄英은 小成者/謂仁義五德/小道而有所成得者/謂之小成也,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小成/謂各執所成以爲道/不知道之大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世薄時澆/唯行仁義/不能行於大道/故言道隱於小成/而道不可隱也//故老君云/大道廢/有仁義, '{...}'라고 하였다. 老君은 老子를 이른다. 인용문은 《道德經》 18장이다. 이 장은 《通行本》과 郭店의 《竹簡本》 문구가 다른 것으로 유명하다. 인용된 문구는 《通行本》이다. 《竹簡本》에는 故大道廢/安有仁義, '{...}'가 되므로, 의미가 완전히 반대된다. 참고할 만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 宣穎은 偏見之人/乃致道隱,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言隱於榮華, ◈ 言은 체언으로, {...}이다. {...}을 이른다. ◈ 隱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於는 '{...}'다. ◈ 榮華는 체언으로, '{...}'을 이른다. {...}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成玄英은 榮華者/謂浮辯之辭/華美之言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夫小成榮華/自隱於道/而道不可隱//則眞僞是非者/行於榮華而止於實當/見於小成而滅於大全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只爲滯於華辯/所以蔽隱至言//所以老君經云/信言不美/美言不信, '{...}'라고 하였다. 老君은 老子요, 老君의 《經》은 《道德經》이다. 인용된 말은 《道德經》 81장이다. [본문으로]
- 故有儒墨之是非, ◈ 故는 '{...}'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儒墨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를 이른다. ◈ 之는 {...}다. ◈ 是非는 체언으로, '{...}'을 이른다. ◈◈ 成玄英은 昔有鄭人名緩/學於裘氏之地/三年藝成而化爲儒//儒者祖述堯舜/憲章文武/行仁義之道/辯尊卑之位/故謂之儒也//緩弟名翟/緩化其弟/遂成於墨//墨者/禹道也//尙賢崇禮/儉以兼愛/摩頂放踵以救蒼生/此謂之墨也//而緩翟二人/親則兄弟/各執一教/更相是非//緩恨其弟/感激而死//然彼我是非/其來久矣//爭競之甚/起自二賢/故指此二賢爲亂群之帥//是知道喪言隱/方督是非,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儒墨事/見列禦寇篇, '{...}'라고 하였는데, 실제로 緩 형제 이야기는 《雜篇》 「列禦寇」에 나온다. 「列禦寇」 원문을 보자면, 鄭人緩也呻吟裘氏之地//祗三年而緩爲儒/潤河九里/澤及三族/使其弟墨//儒墨相與辯/其父助翟//十年而緩自殺//其父夢之/曰///使而子爲墨者/予也//闔胡嘗視其良/既爲秋柏之實矣///夫造物者之報人也/不報其人而報其人之天//彼故使彼//夫人以己爲有以異於人/以賤其親/齊人之井/飲者相捽也//故曰/今之世皆緩也///自是/有德者以不知也/而況有道者乎//古者謂之遁天之刑, '{...}'라고 되어 있다. 「列禦寇」 본문에서 {...}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 孃破案 : 儒家와 墨家는 자신들이 서로 {...}다고 비판하고 있다. 《荀子》의 「富國」에는 墨子大有天下/小有一國/將蹙然衣粗食惡/憂戚而非樂//若是則瘠/瘠則不足欲/不足欲則賞不行//墨子大有天下/小有一國/將少人徒/省官職/上功勞苦/與百姓均事業/齊功勞//若是則不威/不威則罰不行//賞不行/則賢者不可得而進也/罰不行/則不肖者不可得而退也//賢者不可得而進也/不肖者不可得而退也/則能不能不可得而官也//若是/則萬物失宜/事變失應/上失天時/下失地利/中失人和/天下敖然/若燒若焦/墨子雖爲之衣褐帶索/嚽菽飲水/惡能足之乎//既以伐其本/竭其原/而焦天下矣//故先王聖人爲之不然//知夫爲人主上者/不美不飾之不足以一民也/不富不厚之不足以管下也/不威不強之不足以禁暴勝悍也/故必將撞大鐘/擊鳴鼓/吹笙竽/彈琴瑟/以塞其耳//必將錭琢刻鏤/黼黻文章/以塞其目//必將芻豢稻粱/五味芬芳/以塞其口//然後眾人徒/備官職/漸慶賞/嚴刑罰/以戒其心, '{...}'라고 되어 있다. 물론 荀子는 儒家 안에서도 제도와 형식에 좀 더 무게를 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莊子의 비판과는 결이 많이 다르니, 비교해 보는 것도 좋겠다. [본문으로]
-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以是其所非而非其所是, ◈ 以는 '{...}'라는 말이다. 앞의 句에 있는 儒墨之是非를 받는다. ◈ 是其의 是는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 是其의 其는 아마 {...}인 듯하다. 非其의 其도 그렇다. 아니면, 其를 부사어로 보고, '{...}'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문맥에 정합된다. 그러나 其가 이런 식으로 해석된 사례를 찾지 못하였다. ◈ 所非는 '{...}'이다. 所는 '{...}'이다.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非其의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所是는 '{...}'이다. 所는 '{...}'이다. 是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儒墨更相是非/而天下皆儒墨也//故百家並起/各私所見/而未始出其方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天下莫不自以爲是/以彼爲非/彼亦與汝爲非/自以爲是//故各用己是是彼非/各用己非非彼是,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則莫若以明, ◈ 欲은 '{...}'는 말이다. 是其所非와 非其所是를 받는다. 欲의 주체는 儒墨인 듯하다. ◈ 是其의 是는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 是其의 其는 아마 {...}인 듯하다. 非其의 其도 그렇다. 아니면, 其를 부사어로 보고, '{...}'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래도 문맥에 정합된다. 그러나 其가 이런 식으로 해석된 사례를 찾지 못하였다. ◈ 所非는 '{...}'이다. 所는 '{...}'이다.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而는 '{...}'처럼 해석된다. 與와 같다. 是其所非와 非其所是를 병렬적으로 이어 준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奚必知代而心自取者有之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非其의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所是는 '{...}'이다. 所는 '{...}'이다. 是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則은 역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而와 같다. 則은 而와 통용되었다. 《春秋左氏傳》 「文公」 2년에 勇則害上/不登於明堂,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則은 '{...}'라고 해석된다. 而와 같다. 또, 《春秋左氏傳》 「昭公」 3년에는 寡人願事君/朝夕不倦/將奉質幣/以無失時/則國家多難/是以不獲,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則은 '{...}'처럼 해석된다. 이 역시 而와 같다. 또, 《荀子》 「榮辱」에 夫貴爲天子/富有天下/是人情之所同欲也//然則從人之欲/則埶不能容/物不能贍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然則은 역접으로 해석된다. 즉, 然而와 같다. 이 경우에서도 則과 而는 같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則」에 수록되어 있다. ◈ 莫若은 '{...}'는 뜻이다. 즉, 이 다음에 올 말이 {...}는 말이다. ◈ 以明은 道以明 혹은 以道明으로 해석해야 한다. '{...}'라는 뜻이다. 以明 자체로는 말이 되지 않는다. 以는 '{...}'라는 말이다. 明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즉, 무언가를 '{...}' 하는데, '{...}'이 빠져 있다. 문맥상 이 말은 {...} 등장한 부분이다. ◈◈ 郭象은 夫有是有非者/儒墨之所是也//無是無非者/儒墨之所非也//今欲是儒墨之所非而非儒墨之所是者/乃欲明無是無非也//欲明無是無非/則莫若還以儒墨反覆相明//反覆相明/則所是者非是而所非者非非矣//非非則無非/非是則無是,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世皆以他爲非/用己爲是//今欲翻非作是/翻是作非者/無過還用彼我/反覆相明//反覆相明/則所非者非非則無非/所是者非是則無是//無是則無非/故知是非皆虛妄耳,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郭象云/有是有非者儒墨之所是也/無是無非者儒墨之所非也//今欲是儒墨之所非而非儒墨之所是/莫若還以儒墨反覆相明/則所是者非是而所非者非非矣//今觀墨子之書及孟子之闢楊墨/儒墨互相是非/各據所見以求勝/墨者是之/儒者非焉//是非所由成/彼是之所由分也//彼是有對待之形/而是非兩立/則所持之是非非是非也/彼是之見存也//莫若以明者/還以彼是之所明/互取以相證也//郭注誤,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莫若以明者/言莫若即以本然之明照之,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이 부분에서부터 儒家, 墨家, 名家를 차례대로 비판한다. {...} 이 아래에서부터는 名家를 비판한다. [본문으로]
- 物無非彼/物無非是, ◈ 物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無非는 '{...}'라는 말이다. 無는 용언으로, '{...}'는 말이고, 非는 '{...}'라는 말이다. 즉, 無非은 이중 부정어로, '{...}'라는 뜻이다. ◈ 彼는 체언으로, '{...}'이다. '{...}'처럼, {...}인 개념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是는 체언으로, '{...}'이다. '{...}'처럼, {...}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郭象은 物皆自是/故無非是//物皆相彼/故無非彼//無非彼/則天下無是矣//無非是/則天下無彼矣//無彼無是/所以玄同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注曰/物皆自是/故無非是/物皆相彼/故無非彼///無非彼也/則天下無是矣//無非是也/則天下無彼矣//無彼無是/所以玄同//此注理盡/無勞別釋,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有對立/皆有彼此,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세상 모든 것들은 모두 {...} 名家의 견해임에 주의해야 한다. [본문으로]
- 自彼則不見/自知則知之, ◈ 自彼의 自는 부사어로, '{...}'다. 自知의 自도 그렇다. ◈ 彼는 체언으로, '{...}'이다. ◈ 則은 '{...}'이라는 말 같다. ◈ 見은 용언으로, 아마 '{...}'는 말인 듯하다. '{...}'으로 읽는다. ◈ 自知의 知는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아마 자신이 彼가 아니라 是일 수 있다는 점을 '{...}'를 이르는 듯하다. ◈ 知之의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知之의 之는 物無非彼/物無非是의 이치를 가리키는 듯하다. ◈◈ 成玄英은 自爲彼所彼/此則不自見/自知己爲是/便則知之//物之有偏也/例皆如是//若審能見他見自/故無是無非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觀人則昧/返觀即明,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문장은 아마도 {...} 그 이치를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 ◈ 故는 '{...}'다. ◈ 曰은 '{...}'는 말이다. {...}할 때 사용된다. ◈ 彼出의 彼는 체언으로, '{...}'이다. 因彼의 彼도 그렇다. ◈ 出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於는 '{...}'라는 말이다. ◈ 於是의 是는 체언으로, '{...}'이다. 是亦의 是도 그렇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因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여기서는 '{...}'라고 해석하면 좋겠다. ◈◈ 郭象은 夫物之偏也/皆不見彼之所見/而獨自知其所知//自知其所知/則自以爲是//自以爲是/則以彼爲非矣//故曰彼出於是/是亦因彼/彼是相因而生者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彼對於此/是待於非/文家之大體也//今言彼出於是者/言約理微/舉彼角勢也//欲示舉彼明此/舉是明非也//而彼此是非/相因而有/推求分析/即體皆空也, '{...}'라고 하였다. 文家는 아마 名家를 이르는 듯하다. ◈◈ 孃破案 : '이것'과 '저것', 즉 彼是는 {...} 상대주의적이다. [본문으로]
- 彼是方生之說也, ◈ 彼是는 아마 체언으로, {...}으로써의 '{...}'를 이를 것이다. 이 문장의 {...} 전자를 따랐다. ◈ 方生은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方은 아마 '{...}'는 말일 것이다. 生은 '{...}'는 말이다. 成玄英은 方을 方將, '{...}'이라고 보았다. ◈ 之는 {...}로, '{...}'처럼 해석된다. ◈ 說은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 孃破案 : 이 설을 方生之說이라고 한다. 方生之說은 {...} 惠子의 이론이다. 《雜篇》 「天下」에도 나오는데, 「天下」에는 方生之說이라는 표현은 안 나오지만, 日方中方睨와 物方生方死라는 말이 歷物之意 중 하나로 등장한다. {...}과 궤가 같다. [본문으로]
- 雖然/方生方死/方死方生//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因是因非/因非因是, ◈ 雖然은 역접으로, '{...}'이라는 말이다. 아마 '{...}'라는 말 같다. ◈ 方生方死/方死方生은 '{...}'는 말 같다. 生과 死는 '삶과 죽음'이다. ◈ 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는 '{...}'라는 말이다. 可와 不可는 아마 {...} 겹친다. ◈ 因是因非/因非因是는 '{...}'라는 말이다. 是와 非는 '{...}'이다. ◈ 문장 전체를 총괄하는 서술어가 없어서, 내용을 고려해 문장의 말미를 '{...}'처럼 의역하였다. ◈◈ 郭象은 夫死生之變/猶春秋冬夏四時行耳//故死生之狀雖異/其於各安所遇/一也//今生者方自謂生爲生/而死者方自謂生爲死/則無生矣//生者方自謂死爲死/而死者方自謂死爲生/則無死矣//無生無死/無可無不可/故儒墨之辨/吾所不能同也//至於各冥其分/吾所不能異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言彼此是非/無異生死之說也//夫生死交謝/猶寒暑之遞遷//而生者以生爲生/而死者將生爲死/亦如是者以是爲是/而非者以是爲非//故知因是而非/因非而是//因非而是/則無是矣//因是而非/則無非矣//是以無是無非/非生無死/無可無不可/何彼此之論乎,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方生之說을 설명하는 각 구문에 대해 다시 설명을 달았다. 方生方死/方死方生에 대해서는 然其說隨生隨滅/隨滅隨生/浮游無定//郭以此言死生之變/非是, '{...}'라고 하였고, 方可方不可/方不可方可에 대해서는 言可/即有以爲不可者//言不可/即有以爲可者//可不可/即是非也, '{...}'라고 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因是因非/因非因是에 대해서는 有因而是者/即有因而非者//有因而非者/即有因而是者, '{...}'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종합하여, 장자가 方生之說을 비판하는 논지를 既有彼此/則是非之生無窮, '{...}'라고 정리했다. ◈◈ 孃破案 : 이처럼 王先謙은 {...} 드러난다. 莊子는 가장 높은 경지를 有以爲未始有物者, '{...}'라고 하고, 그 다음 경지를 其次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也, '{...}'라고 하며, 다시 그 다음 경지를 其次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 '{...}'라고 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낮은 수준을 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 '{...}'라고 한 데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본문으로]
- 是以聖人不由/而照之於天/亦因是也, ◈ 是以는 '{...}'라는 말이 된다. ◈ 聖人은 {...}을 이른다. ◈ 不由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로, 由를 한정한다. 由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宣穎은 不由是非之途, '{...}'라고 하였다. ◈ 而는 순접으로, '{...}'처럼 해석된다. ◈ 照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앞에 以明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明과 이 부분의 照는 같다. 王先謙은 明, '{...}'라고 하였다. ◈ 之於는 '{...}'라는 말이다. ◈ 天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道와 같다. 《內篇》 안에서 天이라는 말은 {...}와 동격으로 사용된다. 成玄英은 自然, '{...}'이라고 했다. ◈ 亦은 부사어로, '{...}'이다. ◈ 因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由와 같다. 蘇輿는 猶言職是故也, '亦因是也{...}'라고 하였다. ◈ 是는 아마 지시대명사로, 天, 즉 '{...}'를 가리킬 것이다. 혹은, 是를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王先謙은 此, 즉 {...}로 보았다. ◈◈ 郭象은 夫懷豁者/因天下之是非而自無是非也//故不由是非之塗而是非無患不當者/直明其天然而無所奪故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聖人達悟/不由是得非/直置虛凝/照以自然之智//只因此是非而得無非無是/終不奪有而別證無,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但明之於自然之天/無所用其是非, '{...}'라고 하였고, 또 因此是非無窮/故不由之,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是亦彼也, ◈ 是는 체언으로, '{...}'이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彼는 체언으로, '{...}'이다. ◈◈ 郭象은 我亦爲彼所彼,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彼亦是也, ◈ 彼는 체언으로, '{...}'이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是는 체언으로, '{...}'이다. 王先謙은 是/此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彼亦自以爲是,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我自以爲是/亦爲彼之所非//我以彼爲非/而彼亦以自爲是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是亦彼也/彼亦是也는, 方生之說에 비추어 본다면 {...} 넘어설 수 있다 하겠다. [본문으로]
- 彼亦一是非/此亦一是非, ◈ 彼는 체언으로, '{...}'이다. ◈ 亦은 부사어로, '{...}'이다. ◈ 一은 관형어로, '{...}'라는 말이다. '{...}'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만, 뒤에 나오는 一無窮을 고려할 때 '{...}'라는 해석이 더 타당할 듯하다. ◈ 是非는 체언으로, '{...}'이다. 여기서 是非는 '{...}'이 아니라, '{...}'을 뜻한다. 즉, 一是非는 '{...}'라는 말이 된다. ◈ 此는 체언으로, '{...}'이다. 莊子는 {...} 피하려고 했던 것 같다. ◈◈ 郭象은 此亦自是而非彼/彼亦自是而非此/此與彼各有一是一非於體中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此既自是/彼亦自是//此既非彼/彼亦非此//故各有一是/各有一非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앞에서 옳거나 그르다는 개념을 {...} 할 것이다. [본문으로]
- 果且有彼是乎哉//果且無彼是乎哉, ◈ 果는 부사어로, '{...}'이다. ◈ 果且의 且는 {...}인 듯하다. 앞에 獨且라는 사례가 있었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彼是는 체언으로, '{...}'이다. {...}을 이른다. ◈ 乎哉는 {...}로 사용되고 있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今欲謂彼爲彼/而彼復自是//欲謂是爲是/而是復爲彼所彼//故彼是有無/未果定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彼此是非/相待而立/反覆推討/舉體浮虛//自以爲是/此則不無//爲彼所彼/此則不有//有無彼此/未可決定,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分則有彼此/合則無彼此,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지금까지 莊子 자신의 논증을 {...} 말이다. [본문으로]
- 彼是莫得其偶/謂之道樞, ◈ 彼是는 체언으로, '{...}'이다. {...}을 표현하는 말이다. ◈ 莫은 부정어다. 得을 한정한다. ◈ 得은 용언으로, '{...}'인데, 여기서는 '{...}'라고 해석하면 의미에 잘 맞게 된다. ◈ 其는 彼와 是를 가리킨다. ◈ 偶는 체언으로, '{...}'이다. 方生之說에 근거하면, {...} 없다. 이처럼 {...} 존재한다. 偶는 바로 이러한 '{...}'을 이른다. 郭象은 對, '{...}'라고 하였다. 成玄英도 對, '{...}'라고 하였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謂之의 之는 彼是莫得其偶, 즉 {...}를 가리킨다. ◈ 道樞는 명사구로, '{...}'라는 말이다. 道는 이치로써의 '{...}'인데, 여기서는 관형어로 樞를 한정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樞는 체언으로, '{...}'다. 지도리란, {...} 설명하였을 것이다. 樞를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淮南子》 「原道訓」에 經營四隅/還反於樞, '{...}'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隅/猶方也//樞/本也, '{...}'라고 하였다. 혹은, 樞要라는 말처럼,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道樞는 '{...}'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이 있으면, '{...}'도 있어야 한다. 道 자체가 萬物의 근본인데, 여기서 또 {...}이 나뉜다고 하면, {...} 대전제에 모순되고 만다. 게다가 莊子는 {...} 어울릴 것이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要,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尺朱反//樞/要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彼是相對/而聖人兩順之//故無心者與物冥/而未嘗有對於天下也//樞/要也//此居其樞要而會其玄極/以應夫無方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體夫彼此俱空/是非兩幻/凝神獨見而無對於天下者/可謂會其玄極/得道樞要也//前則假問有無/待奪不定//此則重明彼此/當體自空//前淺後深/所以爲次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지도리는 둥글다. 一처럼 {...} 쓰였던 것 같다. [본문으로]
- 樞始得其環中/以應無窮, ◈ 樞는 체언으로, '{...}'다. ◈ 始는 부사어로, 아마 '{...}'라는 의미일 듯하다. 始는 '{...}'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아마 이 의미가 본문의 始의 의미에 가까울 듯하다. 《禮記》 「月令」에 是月也/天子始裘, '{...}'라는 말이 있고, 또 《淮南子》 「時則訓」에 於是天子始裘, '{...}'라는 말이 있으며, 또 《呂氏春秋》 「孟冬紀 十月紀」에 是月也/天子始裘,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始는 모두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呂氏春秋》에 대해 高誘는 始/猶先也, '{...}'라고 하였다. ◈ 得은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인 듯하다. 《禮記》 「大學」에 慮而后能得,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得/謂得事之宜也, '{...}'라고 하였다. 이는 곧 '{...}'라는 뜻이다. 또, 《荀子》 「議兵」에 三軍既定/百官得序/群物皆正, '{...}'라는 말이 있는데, 楊倞은 得序/各當其任, '{...}'라고 하였다. 이 역시 '{...}'라는 뜻이다. ◈ 其는 아마 樞 {...}을 가리키는 말인 듯하다. ◈ 環中은 체언으로, '{...}'를 뜻한다. 環은 '{...}'을 뜻하고, 中은 '{...}'를 뜻한다. 이 말은 {...}이다. 아래에 王先謙이 인용해 두었듯, 《雜篇》 「則陽」에 環中이라는 말이 道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있다. 郭慶藩은 唐釋/湛然/止觀輔行傳宏決引莊子古注云/以圓環內空體無際/故曰環中, '{...}'라고 했다. 王先謙은 則陽篇亦云/冉相氏得其環中以隨成, '{...}'라고 했다. 「則陽」은 《雜篇》에 속한다. ◈ 以는 '{...}'처럼 해석된다. 앞의 句인 樞始得其環中을 받는다. ◈ 應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즉, 다른 것들과 '{...}'는 뜻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 無窮은 명사구로, '{...}'라는 말일 것이다. 窮은 아마 체언으로, '{...}'일 것이고, 無는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 郭象은 夫是非反覆/相尋無窮/故謂之環//環中/空矣//今以是非爲環而得其中者/無是無非也//無是無非/故能應夫是非//是非無窮/故應亦無窮,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絕待獨化/道之本始/爲學之要/故謂之樞//環者/假有二竅//中者/眞空一道//環中空矣/以明無是無非//是非無窮/故應亦無窮也,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是非兩化而道存焉/故曰道樞//握道之樞以游乎環中/中/空也//是非反復/相尋無窮/若循環然//游乎空中/不爲是非所役/而後可以應無窮,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是亦一無窮/非亦一無窮也//故曰/莫若以明, ◈ 是는 체언으로, '{...}'이다. 是非의 是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一은 관형어로 '{...}'라는 말이다. ◈ 無窮은 명사구로, '{...}'라는 말이다. 앞의 句에 나온 無窮과 같다. ◈ 非는 체언으로, '{...}'이다. 是非의 非다. ◈ 故는 '{...}'라는 말이다. ◈ 曰은 '{...}'는 말이다. 다른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 莫若은 '{...}'라는 표현이다. ◈ 以明은 상기하였듯 道以明 또는 以道明이라고 보고, '{...}'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郭象은 天下莫不自是而莫不相非/故一是一非/兩行無窮//唯涉空得中者/曠然無懷/乘之以游也, '{...}'라고 했다. ◈◈ 成玄英은 夫物莫不自是/故是亦一無窮//莫不相非/故非亦一無窮//唯彼我兩忘/是非雙遣/而得環中之道者/故能大順蒼生/乘之遊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惟本明之照/可以應無窮//此言有彼此而是非生/非以明不能見道,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方生之說 역시 {...} 원칙으로 구체화된다. [본문으로]
- 以指喻指之非指/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 ◈ 以는 모두 '{...}'라는 말이다. 以指, 以非指, 以馬, 以非馬 전부에서 그렇다. 以는 以指에서는 指, 以非指에서는 非指, 以馬에서는 馬, 以非馬에서는 非馬를 받는다. ◈ 指는 모두 체언으로, '{...}'을 뜻한다. 以指, 喻指, 非指, 以非指 등 전부에서 그렇다. 成玄英은 手指, '{...}'이라고 했다. ◈ 喻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여기서는 '{...}'라고 해석하면 타당하겠다. 成玄英은 比, '{...}'라고 하였다. 喻의 목적어는 以指喻指之非指에서는 指之非指이고, 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에서는 指之非指이며, 以馬喻馬之非馬에서는 馬之非馬이고, 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에서는 馬之非馬이다. ◈ 指之非指의 之는 아마 {...}인 듯하다. 馬之非馬의 之도 그렇다. ◈ 종합하면, 以指喻指之非指는 '{...}'이 된다. ◈ 不若은 '{...}'라는 말이다. ◈ 종합하면, 不若以非指喻指之非指也는 '{...}'가 된다. ◈ 馬는 체언으로, 모두 히히힝 우는 '{...}'을 뜻한다. 以馬, 喻馬, 非馬, 以非馬 등 전부에서 그렇다. 成玄英은 戲籌, '{...}'이라고 했다. ◈ 종합하면, 以馬喻馬之非馬/不若以非馬喻馬之非馬也는 '{...}'라는 말이 된다. ◈◈ 成玄英은 言人是非各執/彼我異情/故用己指比他指/即用他指爲非指//復將他指比汝指/汝指於他指復爲非指矣//指義既爾/馬亦如之//所以諸法之中獨奉指者/欲明近取諸身/切要無過於指/遠託諸物/勝負莫先於馬/故舉二事以況是非,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白馬非馬論은 白馬를 보고 말이 아니라고 하는 논증이다. 《公孫龍子》의 「白馬論」에 등장하고, 또한 《韓非子》 「外儲說 左上」에도 등장한다. 「外儲說 左上」에는 兒說/宋人/善辯者也//持白馬非馬也服齊稷下之辯者/乘白馬而過關/則顧白馬之賦//故籍之虛辭則能勝一國/考實按形不能謾於一人, '{...}'라고 되어 있다. 兒說의 說은 '{...}'이라고 읽는다. 倪說, 貌辯, 貌辨, 齊貌辯, 齊貌辨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그럼 白馬非馬論은 본래 누가 주장한 설이었을까. 兒說일까, 公孫龍子일까. 兒說이 언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呂氏春秋》 「審分覽 君守」에 魯鄙人遺宋元王閉/元王號令於國/有巧者皆來解閉//人莫之能解//兒說之弟子請往解之, '{...}'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宋나라에는 元王이 없고, 다만 元公이 있을 뿐이며, 元公은 기원전 530년 즈음에 재위했던 사람이다. 한편 《戰國策》 「齊策」에는 靖郭君善齊貌辨, '{...}'라는 말이 있고, 또 齊貌辨見宣王, '{...}'라는 말이 있는데, 이를 보면 兒說은 齊나라 宣王, 靖郭君과 동시대 사람이다. {...} 한편 公孫龍子는 전국시대 가장 말기 사람으로, 기원전 320년 즈음에 태어나 기원전 250년 즈음에 죽었다. 이를 비교해 보면, {...} 마찬가지다. [본문으로]
- 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 ◈ 天地는 체언으로, '{...}'을 이른다. ◈ 一은 관형어로, '{...}'라는 말이다. ◈ 指는 체언으로, '{...}'이다. ◈ 萬物은 체언으로, '{...}'이다. ◈ 馬는 체언으로, '{...}'이다. ◈ 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는 '{...}'라는 말이다. 나는 '{...}'라는 용언을 임의로 넣어서 의역하였다. ◈◈ 郭象은 夫自是而非彼/彼我之常情也//故以我指喻彼指/則彼指於我指獨爲非指矣//此以指喻指之非指也//若復以彼指還喻我指/則我指於彼指復爲非指矣//此以非指喻指之非指也//將明無是無非/莫若反覆相喻//反覆相喻/則彼之與我/既同於自是/又均於相非//均於相非/則天下無是//同於自是/則天下無非//何以明其然邪//是若果是/則天下不得復有非之者也//非若果非/則天下亦不得復有是之者也//今是非無主/紛然淆亂/明此區區者各信其偏見而同於一致耳//仰觀俯察/莫不皆然//是以至人知天地一指也/萬物一馬也/故浩然大寧/而天地萬物各當其分/同於自得/而無是無非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天下雖大/一指可以蔽之//萬物雖多/一馬可以理盡//何以知其然邪//今以彼我是非反覆相喻/則所是者非是/所非者非非//故知二儀萬物/無是無非者也, '{...}'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崔云/指/百體之一體//馬/萬物之一物, '{...}'라고 했다. ◈◈ 王先謙은 爲下文物謂之而然立一影子//近取諸身/則指是//遠取諸物/則馬是//今曰指非指/馬非馬/人必不信/以指與馬喩之/不能明也//以非指非馬者喩之/則指之非指/馬之非馬/可以悟矣//故天地雖大/特一指耳//萬物雖紛/特一馬耳,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가 方生之說을 비판해서 道를 드러냈음에도 다시 兒說의 학설을 끌어 들여 비판한 것은, 道로써 만물이 하나로 통한다는 원칙을 제시하기 전에 兒說의 학설과 대조해서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白馬非馬論은 {...}라고 냉소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본문으로]
- 可乎可, ◈ 可乎의 可는 용언으로, 아마 '{...}'가 아니라 '{...}'라는 말 같다. ◈ 乎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 乎可의 可는 용언으로, '{...}'라는 말인 듯하다. ◈◈ 郭象은 可於己者/即謂之可,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不可乎不可, ◈ 不可乎의 不可는 용언으로, '{...}'가 아니라 '{...}'라는 말 같다. ◈ 乎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 乎不可의 不可는 용언으로, '{...}'라는 말인 것 같다. ◈◈ 郭象은 不可於己者/即謂之不可,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理無是非/而物有違順/故順其意者則謂之可/乖其情者則謂之不可//違順既空/故知可不可皆妄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道行之而成, ◈ 이 句는 如人行道而道成,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 道는 체언으로, 이치로써의 '{...}'가 아니라, {...}을 뜻한다. 宣穎은 路, '{...}'이라고 했다. ◈ 行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行의 주체는 보통 사람들이다. ◈ 之는 道, 즉 '{...}'을 가리킨다. ◈ 而는 '{...}'처럼 해석된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句인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成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無不成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大道曠蕩/亭毒含靈/周行萬物/無不成就//故在可成於可/而不當於可//在不可成不可/亦不當於不可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行之而成/孟子所云用之而成路也//爲下句取譬/與理道無涉, '{...}'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인용한 어구는 《孟子》의 「盡心 下」에 나온다. 「盡心 下」에서는 孟子가 高子에게 山徑之蹊間介然用之而成路/爲間不用則茅塞之矣, '{...}'라고 하였다. 趙岐는 이에 대해 山徑/山之嶺有微蹊介然/人遂用之不止/則蹊成爲路/爲間/有間也/謂廢而不用/則茅草生而塞之/不復爲路,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物謂之而然, ◈ 이 句 역시 앞의 句처럼 人謂物而物然, '{...}'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物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주체는 {...}이다. ◈ 而는 '{...}'처럼 해석된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句인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然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름을 붙여 준 대로 '{...}'는 말일 것이다. ◈◈ 郭象은 無不然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物情顚倒/不達違從/虛計是非/妄爲然不,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凡物稱之而名立/非先固有此名也//故指馬可曰非指馬/非指馬者亦可曰指馬,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 ◈ 惡乎然의 惡는 의문사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惡乎不然의 惡도 그렇다. ◈ 惡乎然의 乎는 惡 뒤에 붙는 조사일 것이다. 惡乎不然의 乎도 그렇다. {...} 惡乎라고 썼으니까 乎를 붙여 놓았겠지만, 惡의 의미가 달라짐에 따라 乎가 해석되지 않는 조사로 남을 수도 있는 것이다. ◈ 惡乎然의 然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를 이르는 듯하다. 즉, '{...}'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 然於然 중, 앞의 然은 용언으로, 사람들이 '{...}'는 말이고, 뒤의 然은 용언으로, '{...}'는 말로 보인다. ◈ 然於然의 於는 '{...}'라는 의미로 보인다. 不然於不然의 於도 마찬가지다. ◈ 惡乎不然의 不然 역시 然처럼 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을 뜻할 것이다. {...}는 의미다. ◈ 不然於不然 중, 앞의 不然은 용언으로, 사람들이 '{...}'는 말이고, 뒤의 不然은 용언으로, '{...}'는 말로 보인다. ◈◈ 成玄英은 心境兩空/物我雙幻/於何而有然法/遂執爲然//於何不然爲不然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何以謂之然//有然者/即從而皆然之//何以謂之不然//有不然者/即從而皆不然之/隨人爲是非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사람들이 그 사물을 {...} 있을 것이다. [본문으로]
- 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 ◈ 物은 체언으로, '{...}'이다. ◈ 固는 부사어로, '{...}'다. ◈ 有所然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有所可의 有도 마찬가지다. ◈ 所然은 '{...}'이다. 여기서는 {...}라는 말이다. ◈ 所可는 '{...}'이다. 여기서는 {...}라는 말이다. ◈◈ 郭象은 各然其所然/各可其所可,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物情執滯/觸境皆迷/必固謂有然/必固謂有可/豈知可則不可/然則不然邪,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앞에서는 사람들의 의사나 {...} 상세하게 드러난다. [본문으로]
- 無物不然/無物不可, ◈ 無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無物不然의 無는 명사구인 物不然을 받고, 無物不可의 無는 명사구인 物不可를 받는다. ◈ 物은 체언으로, '{...}'이다. ◈ 不은 부정어다. 不然의 不은 然을 한정하고, 不可의 不은 可를 한정한다. ◈ 然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사람들이 {...}를 뜻한다. ◈ 物不然은 명사구로, 道에 근거해 볼 때 '{...}'라는 말이다. ◈ 可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를 뜻한다. ◈ 物不可는 명사구로, 道에 근거해 볼 때 '{...}'라는 말이다. ◈◈ 成玄英은 群品云云/各私所見/皆然其所然/可其所可, '{...}'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崔本此下更有可於可/而不可於不可/不可於不可/而可於可也, '{...}'라고 하였다. 可於可/而不可於不可//不可於不可/而可於可也는 '{...}'라는 뜻이다. ◈◈ 王先謙은 論物之初/固有然有可/如指爲指/馬爲馬是也//論物之後起/則不正之名多矣/若變易名稱/無不然/無不可/如指非指/馬非馬/何不可聽人謂之, '{...}'라고 하였고, 또 惡乎然以下/又見寓言篇//此是非可否並舉/以寓言篇證之/不然於不然下/似應更有///惡乎可/可於可/惡乎不可/不可於不可///四句/而今本奪之, '{...}'라고 했다. 「寓言」은 《雜篇》에 속한다. 「寓言」에서는 有自也而可/有自也而不可//有自也而然/有自也而不然//惡乎然/然於然//惡乎不然/不然於不然//惡乎可/可於可//惡乎不可/不可於不可//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無物不然/無物不可,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故爲是舉莛與楹/厲與西施/恢恑憰怪/道通爲一, ◈ 故는 '{...}'다. ◈ 爲是의 爲는 '{...}'라는 말이다. 是를 받는다. 爲是는 '{...}'처럼 해석할 수 있을 듯이다. 陸德明은 于僞反//下爲是皆同, '{...}'라고 하였다. 爲가 于와 僞의 반절이면, '{...}'라는 뜻이다. 즉, 爲是는 '{...}'라는 말이 된다. ◈ 爲是의 是는 物固有所然/物固有所可//無物不然/無物不可를 가리킨다. {...}을 뜻한다. ◈ 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莛은 체언으로, '{...}'다. 成玄英은 屋梁,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徐音庭/李音挺//司馬云/屋梁也, '{...}'라고 하였다. 한편 俞樾은 司馬以莛爲屋梁/楹爲屋柱/故郭云莛橫而楹縱//案說文/莛/莖也///屋梁之說/初非本義//漢書東方朔傳以莛撞鍾/文選答客難篇莛作筳//李注引說苑曰/建天下之鳴鐘/撞之以筳/豈能發其音聲哉//筳與莛通//是古書言莛者/謂其小也//莛楹以大小言/厲西施以好醜言//舊說非是, '{...}'라고 하였다. 莖은 '{...}', 筳은 '{...}'를 뜻한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苑》 인용문은 「善說」에서 인용한 글이다. 내 생각에는 俞樾의 설이 타당한 듯하다. 그러나 가로나 세로로 해석하든, 크고 작은 것으로 해석하든, 莊子의 의도가 {...}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 莛與楹의 與는 '{...}'다. 厲與西施의 與도 그렇다. ◈ 楹은 체언으로, 건물의 '{...}'이다. 《說文解字》 「木部」에 柱/楹也, '{...}'라는 말이 있고, 또 楹/柱也, '{...}'라는 말이 있다. 柱가 바로 '{...}'이다. 《春秋》 「莊公」 23년에 秋/丹桓宮楹,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楹/柱也, '{...}'라고 하였고, 范宁는 楹/柱, '{...}'라고 하였으며, 何休는 楹/柱也, '{...}'라고 하였다. 또, 《春秋公羊傳》에 대해 陸德明은 楹/音盈/柱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舍柱,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盈//司馬云/屋柱也, '{...}'라고 했다. ◈ 厲는 체언으로, '{...}'다. 《史記》 「范睢蔡澤列傳」에 漆身爲厲/被髪爲狂/不足以爲臣恥, '{...}'라는 말이 있는데, 司馬貞은 音賴/癩病也//言漆塗身/生瘡如病癩, '{...}'라고 하였다. '{...}'이 아니더라도, 厲가 '{...}'으로 사용된 사례는 있다. 《漢書》 「嚴朱吾丘主父徐嚴終王賈傳」에 民不夭厲, '{...}'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厲/病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病醜人,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如字/惡也//李音賴//司馬云/病癩, '{...}'라고 했다. ◈ 西施는 사람 이름이다. 越王 句踐이 吳王 夫差에게 보낸 프락치였다. 아주 예뻤다고 한다. 成玄英은 吳王美姬也,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司馬云/夏姬也///案句踐所獻吳王美女也, '{...}'라고 하였다. 중국인들은 越나라가 夏나라의 후예라고 생각했다. 司馬彪가 西施를 夏나라 여자라고 한 이유가 아마 그것일 것이다. ◈ 恢, 恑, 憰, 怪는 각각 '{...}'는 말이다. 모두 {...}는 뜻이다. 즉, 恢恑憰怪는 '{...}'는 뜻이 된다. 恢恑憰怪는 莛과 楹, 厲와 西施가 {...}는 뜻이다. 成玄英은 恢에 대해 寬大之名, '{...}'이라고 했고, 恑에 대해서는 奇變之稱, '{...}'이라고 하였으며, 憰에 대해서는 矯詐之心, '{...}'이라고 하였고, 怪에 대해서는 妖異之物,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恢에 대해 徐苦回反/大也//郭苦虺反//簡文本作弔, '{...}'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案弔音的//下恑字與詭同//弔詭見下文,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恑에 대해서는 九委反/徐九彼反//李云/戾也, '{...}'라고 하였고, 憰과 怪에 대해서는 音決//李云/憰/乖也//怪/異也, '{...}'라고 했다. ◈ 道通爲一은 以道通爲一,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道는 체언으로, 이치로서의 '{...}'를 이른다. ◈ 通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뜻일 것이다. ◈ 一은 체언으로, '{...}'이다. ◈◈ 郭象은 夫莛橫而楹縱/厲醜而西施好//所謂齊者/豈必齊形狀/同規矩哉//故舉縱橫好醜/恢恑憰怪/各然其所然/各可其所可/則理雖萬殊而性同得/故曰道通爲一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爲是義故/略舉八事以破之, '이 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덟 가지를 들어서 관념을 깬 것이다'라고 하고, 또 夫縱橫美惡/物見所以萬殊//恢憰奇異/世情用爲顚倒//故有是非可不可/迷執其分//今以玄道觀之/本來無二/是以妍醜之狀萬殊/自得之情惟一/故曰道通爲一也, '{...}'라고 하였다. ◈◈ 郭嵩燾는 可不可/然不然/達者委而不用/而即寓用於不用之中/故通爲一,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自知道者觀之/皆可通而爲一/不必異視,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莛, 楹, 厲, 西施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는 말이다. 俞樾은 莛楹以大小言/厲西施以美醜言, '{...}'라고 하였는데, 莊子는 이처럼 {...}을 것이다. [본문으로]
- 其分也/成也, ◈ 其分也의 其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遞相爲君臣乎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分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아마 {...}라는 말 같다. 陸德明은 如字, '{...}'라고 하였다. ◈ 其分也의 也는 則처럼 '{...}'처럼 해석된다. ◈ 成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아마도 {...}는 말일 것이다. ◈◈ 郭象은 夫物或此以爲散而彼以爲成,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物或於此爲散/於彼爲成/欲明聚散無恆/不可定執//此則於不二之理更舉論端者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分一物以成數物,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其成也/毀也, ◈ 其成也의 其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遞相爲君臣乎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成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그러나 {...}는 의미일 것이다. ◈ 其成也의 也는 則처럼 '{...}'처럼 해석된다. ◈ 毀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我之所謂成而彼或謂之毀,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或於此爲成/於彼爲毀//物之涉用/有此不同/則散毛成氊/伐木爲舍等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雜篇》의 「庚桑楚」에는 道通/其分也/成也//其成/也毁也라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이 말이 「庚桑楚」에서는 道通, 즉 도가 통하면 이렇게 된다는 취지로 쓰이고, 「齊物論」에는 만물이 道로써 하나로 통한다는 취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 않았나 의뭉스럽다. 단순한 착간 문제는 아닌 것 같다. [본문으로]
- 凡物無成與毀/復通爲一, ◈ 凡은 아마 관형어로, '{...}'라는 말 같다. 따라서 凡物은 '{...}'과 같게 된다. ◈ 物은 체언으로, '{...}'이다. ◈ 無는 부정어다. 成과 毀를 한정한다. ◈ 成은 용언으로, 사람들의 인식에 따라 '{...}'라는 뜻이다. ◈ 與은 '{...}'이다. 앞뒤의 말을 병렬적으로 이어 준다. ◈ 毀는 용언으로, {...}라는 뜻이다. ◈ 復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라고 읽는다. 陸德明은 扶又反, '{...}'라고 하였다. ◈ 通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일 것이다. ◈ 一은 체언으로, '{...}이다. 通爲一은 '{...}'라는 말이지만, 나는 '{...}'라고 의역하였다. ◈◈ 郭象은 夫成毀者/生於自見而不見彼也//故無成與毀/猶無是與非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成毀是非/生於偏滯者也//既成毀不定/是非無主/故無成毀/通而一之,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如此成即毀/毀即成/故無論成毀/復可通而爲一/不必異視,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唯達者知通爲一/爲是不用而寓諸庸, ◈ 唯는 '{...}'다. ◈ 達은 관형어로, '{...}'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이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 者는 '{...}'이다. 達을 받는다. ◈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명사구인 通爲一이 목적어다. ◈ 通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爲一의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一은 체언으로, '{...}'이다. 그래서 通爲一은 '{...}'이라는 명사구가 된다. ◈ 爲是의 爲는 '{...}'처럼 해석된다. 是를 받는다. 따라서 爲是는 '{...}' 같은 말이 된다. ◈ 爲是의 是는 通爲一을 가리키는 말 같다. ◈ 不用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다. 用을 한정한다. 用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는 뜻일 것이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寓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成玄英은 寄, '{...}'라고 하였다. ◈ 諸는 之於의 줄임말이다. '{...}'라고 해석된다. 이 때는 '{...}'라고 읽는다. ◈ 庸은 체언으로, '{...}'이라는 뜻이다. 만물이 타고난 그대로의 '{...}'이 바로 庸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大宗師」에 大情, 物之情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成玄英은 用,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唯當達道之夫/凝神玄鑒/故能去彼二偏/通而爲一//爲是義故/成功不處/用而忘用/寄用群材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唯達道者能一視之/爲是不用己見而寓諸尋常之理,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원래 그 사물이 {...}에 그저 맡겨 둔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 ◈ 庸은 체언으로, {...}을 뜻한다. ◈ 庸也者의 也者는 者와 같이 '{...}'이라는 말이다. 也는 者와 같다. 따라서 也者는 者者, 즉 者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用也者, 通也者의 也者도 모두 그렇다. ◈ 用은 체언으로, '{...}'다. 그런데 앞의 不用而寓諸庸에 나오는 用과는 다르다. 이 부분의 用은 본래적 '{...}'라고 보아야 한다. ◈ 通은 체언으로, 만물이 '{...}' 정도로 보면 타당하겠다. ◈ 得은 체언으로, {...}을 이르는 듯하다. ◈◈ 郭象은 夫達者無滯於一方/故忽然自忘/而寄當於自用//自用者/莫不條暢而自得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有夫至功而推功於物/馳馭億兆而寄用群材者/其惟聖人乎//是以應感無心/靈通不滯/可謂冥眞體道/得玄珠於赤水者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無用之用//無用而有用者/以能觀其通//觀其通/則自得,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부분의 用은 無用之用과는 {...} 거리가 있다. [본문으로]
- 適得而幾矣, ◈ 適은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인 듯하다. 경지에 '{...}'는 말일 것이다. 아니면, 適을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경지에 오르려고 '{...}'라는 의미가 된다. 《春秋左氏傳》 「昭公」 15년에 好惡不愆/民知所適,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杜預는 適을 歸, '{...}'라고 풀이하였지만, 사실은 從, '{...}'라고 해야 더 타당할 듯하다. ◈ 得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를 이를 것이다. ◈ 而는 '{...}'이라고 해석된다. 則과 같다.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非父則母/非兄而姒也, '{...}'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幾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近과 같다. 아마 {...}는 말일 것이다. 郭象은 盡, '{...}'라고 하였다. 成玄英도 盡, '{...}'라고 하였다. 陸德明도 音機/盡也//下同//徐具衣反, '{...}'라고 하였다. ◈◈ 郭象은 至理盡於自得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得者/內不資於我/外不資於物/無思無爲/絕學絕待/適爾而得/蓋無所由/與理相應/故能盡妙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適然自得/則幾於道矣,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因是已, ◈ 因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王先謙은 因/任也, '{...}'라고 하였다. ◈ 是는 아마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已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로, '{...}'는 말이다. ◈◈ 郭象은 達者因而不作,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達道之士/無作無心/故能因是非而無是非/循彼我而無彼我//我因循而已/豈措情哉,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任天之謂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已而不知其然/謂之道, ◈ 已而는 아마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已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而는 然과 통용된다. 따라서 而, 즉 然은 不用而寓諸庸을 이를 것이다. 그러면 已而는 '{...}'과 같이 해석된다. 그러면 而는 어떻게 然과 통용된다고 할 수 있을까. 《書》 「虞書 益稷」에 啟呱呱而泣, '{...}'라는 말이 있고, 《詩》 「國風 召南」에 舒而脫脫兮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이를 脫脫然舒也, '{...}'라고 풀이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7년에는 鋌而走/險急何能擇,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鋌/疾走貌, '{...}'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에서 而는 모두 然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已而者/仍前生後之辭也, '{...}'라고 하였다. 宣穎은 已者/既通爲一/不知其然/未嘗有心也, '{...}'라고 하였다. 한편, 安東林은 {...}이 낫지 않을까 생각된다. 安炳周와 田好根은 已를 {...}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已가 '{...}'이라고 해석되려면, 因是已의 경우처럼 已가 문장 말미에 사용되어야 한다. 이 설도 아마 틀렸을 것이다. ◈ 不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其는 아마 {...}를 가리키는 듯하다. ◈ 然은 체언으로, '{...}'이다. 아마 不用而寓諸庸을 의미할 것이다. 즉, 不知其然이란, {...} 해야 한다는 뜻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之는 {...}을 가리킨다. ◈ 道는 체언으로, 이치로써의 '{...}'를 이른다. 宣穎은 謂之道/所謂適得而幾也, '{...}'라고 하였다. ◈◈ 郭象은 夫達者之因是/豈知因爲善而因之哉//不知所以因而自因耳/故謂之道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至人無心/有感斯應/譬彼明鏡/方茲虛谷/因循萬物/影響蒼生/不知所以然/不知所以應/豈有情於臧否而係於利害者乎//以法因人/可謂自然之道也, '{...}'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向郭絕句//崔讀謂之道勞/云/因自然是道之功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此言非齊是非不能得道/以下又反言以明,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 ◈ 勞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神明은 체언으로, '{...}'이라는 말일 것이다. 神도 '{...}'이고, 明도 아마 '{...}'일 것이다. 《國語》 「周語」에 使至於爭明, '{...}'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明을 精氣, 즉 '{...}'이라고 보았다. ◈ 爲는 아마도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 一은 체언으로, 아마 {...}을 이르는 듯하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不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는 말이다. ◈ 其는 物을 가리키는 듯하다. ◈ 同은 체언으로, '{...}'이다. ◈ 也는 아마 '{...}'라는 말 같다. 者와 같다.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을 받는다. 이 句는 {...} 설명하였다. ◈ 상기하였듯 이 句는 節이 아니라 句이지만, 나는 편의상 임의로 '{...}'라는 서술어를 만들어서 節처럼 번역하였다. ◈◈ 成玄英은 夫玄道妙一/常湛凝然/非由心智謀度而後不二//而愚者勞役神明邂逅言辯而求一者/與彼不一無以異矣/不足賴也//不知至理/理自混同/豈俟措心/方稱不二耶,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謂之朝三,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之는 {...}를 가리킨다. ◈ 朝三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朝三은 莊子가 {...} 좋겠다. ◈◈ 成玄英은 此起譬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若勞神明以求一/而不知其本同也/是囿於目前之一隅/與朝三之說何異乎,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朝三은 만물의 본질은 {...} 이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 何謂朝三//狙公賦芧/曰/朝三而暮四/」眾狙皆怒///曰/然則朝四而暮三///眾狙皆悅//名實未虧而喜怒爲用/亦因是也, ◈ 이 이야기는 《列子》 「黃帝」에도 나온다. 따라서 이 부분에 대해 《列子》와 《莊子》를 비교해 보면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黃帝」의 내용은 成玄英과 王先謙이 인용해 두었으므로, 나는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며 설명하였다. ◈ 何는 의문사로, '{...}'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狙公은 사람 이름이다. '{...}'이라는 말일 것이다. 狙는 '{...}'다. 狙公은 그 사람이 {...} 붙은 별칭이었을 것이다. 《列子》에는 宋有狙公者, '{...}'라고 하였고, 殷敬順은 狙/七余切//狙公/養狙公也//好/呼報切,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狙/獼猴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七徐反/又緇慮反//司馬云/狙公/典狙官也///崔云/養猿狙者也///李云/老狙也///廣雅云/狙/獼猴, '{...}'라고 하였다. ◈ 賦는 본래 '{...}'을 뜻하지만, 여기서는 용언으로, 나눠 '{...}'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漢書》 「眭兩夏侯京翼李傳」에 賦醫藥, '{...}'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賦謂分給之, '{...}'라고 하였다. 《列子》에는 賦가 아니라 與라고 표현되어 있다. 與 역시 '{...}'라는 말이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付與, '{...}'라고 하였다. ◈ 芧는 체언으로, '{...}'를 이른다. 《列子》에도 芧라고 되어 있다. 張湛은 芧/栗也, '{...}'라고 하였다. 殷敬順은 芧音予/橡子也, '{...}'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橡子也/似栗而小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序/徐食汝反/李音予//司馬云/橡子也, '{...}'라고 하였다. ◈ 朝三은 朝賦三, '{...}'처럼 해석해야 한다. 朝는 부사어로, '{...}'이라는 말이다. 三은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 朝三而暮四의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朝四而暮三의 而도 그렇다. ◈ 暮四는 暮賦四, '{...}'처럼 해석해야 한다. 暮는 부사어로, '{...}'이라는 말이다. 四는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列子》에는 朝三而暮四/足乎, '{...}'라고 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陸德明은 朝三暮四에 대해 司馬云/朝三升/暮四升也, '{...}'라고 했다. ◈ 眾은 관형어로, '{...}'이다. ◈ 狙는 체언으로, '{...}'다. ◈ 皆는 부사어로, '{...}'다. ◈ 怒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然則은 '{...}'이라는 말이다. ◈ 悅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名實은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名은 '{...}'이고, 實은 '{...}'를 뜻한다. 그러나 名과 實이 각각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내 견해는 孃破案에 밝혀 두었다. ◈ 未는 부정어다. 虧를 한정한다. ◈ 虧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名實未虧而喜怒爲用의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喜怒는 체언으로, '{...}'이다. {...}를 각각 이른다. ◈ 爲는 아마도 용언으로, '{...}'는 말인 것 같다. ◈ 用은 체언으로, '{...}'이다. 따라서 爲用은 아마 '{...}'는 따위의 표현일 것이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因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는 아마 {...}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 郭象은 夫達者之於一/豈勞神哉//若勞神明於爲一/不足賴也/與彼不一者無以異矣//亦同眾狙之惑/因所好而自是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此解譬也, '이 말은 비유다'라고 하고는, 列子曰///宋有養狙老翁/善解其意/戲狙曰/吾與汝芧/朝三而暮四/足乎//眾狙皆起而怒//又曰/我與汝朝四而暮三/足乎//眾狙皆伏而喜焉///朝三暮四/朝四暮三/其於七數/並皆是一//名既不虧/實亦無損/而一喜一怒/爲用愚迷//此亦同其所好/自以爲是//亦猶勞役心慮/辯飾言詞/混同萬物以爲其一因以爲一者/亦何異眾狙之惑耶, '{...}'라고 하였다. 인용구는 《列子》 「黃帝」에 나온다. ◈◈ 郭嵩燾는 謂之朝三/明以朝三爲義也//蓋賦芧在朝/故以得四而喜/得三而怒/皆所見惟目前之一隅也/是以謂之因也//疏謂混同萬物以爲其一因以爲一者/無異眾狙之惑/解因是也/一語/大謬, '{...}'라고 하였다. 《疏》는 成玄英의 주석을 뜻한다. ◈◈ 王先謙은 列子黃帝篇///宋有狙公者/愛狙/養之成群/能解狙之意/狙亦得公之心//損其家口/充狙之欲//俄而匱焉/將限其食/恐衆狙之不馴於己也/先誑之曰//與若芧/朝三而暮四/足乎//衆狙皆起而怒//俄而曰//朝四而暮三/足乎//衆狙皆伏而喜//物之以能鄙相籠/皆猶此也//聖人以智籠群愚/亦猶狙公之以智籠衆狙也//名實不虧/使其喜怒哉///張湛注/好養猿猴者/因謂之狙公//芧音序/栗也///案/漆園引之/言名實兩無虧損/而喜怒爲其所用/順其天性而已/亦因任之義也, '{...}'라고 하였다. ◈◈ 《列子》의 이 이야기 마지막에는 盧重元이 含識之物雖同有其神/而圓首方足/人最爲靈智耳//智之尤者爲聖爲賢/才之大者爲君王//聖人隨才而任/各得其宜//無小無大/各當其分//既無棄人/亦無棄物//籠之以智/豈獨眾狙也, '{...}'라고 한 말이 붙어 있다. 張湛은 이 이야기를 정리하는 주석을 남기지 않았다. 그런데 張湛도 그렇고, 盧重元도 그렇고, 《列子》의 이 이야기를 풀이할 때는 {...}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 방향이 《莊子》와 같다고 할 수는 없지만, 참고차 인용해 둔다. ◈◈ 孃破案 : 名과 實이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보통은 名實을 {...} 未虧에 초점을 두고 名實의 의미를 추론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 是以는 '{...}'라는 말이다. 즉, '{...}'처럼 해석된다. ◈ 聖人은 {...}을 이른다. ◈ 和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之以는 '{...}'는 조사로 봐야 한다. A 之以 B는 '{...}'처럼 해석된다. 《孟子》 「梁惠王 上」에 樹之以桑, '{...}'라는 말이 나오는데, 용법이 같다. ◈ 是非는 체언으로. '{...}'이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休는 용언으로, 아마 '{...}'는 말 같다. ◈ 乎는 '{...}'이다. 於와 같다. ◈ 天鈞은 '{...}'이다. 天은 관형어로,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鈞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天鈞이 {...}임에 비해, 和之以是非의 是非는 '{...}'이기 때문에 天鈞과 대조를 이룬다. 天은 《莊子》 안에서 일반적으로 {...}로 사용되고 있다. 成玄英은 天均者/自然均平之理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本又作均//崔云/鈞/陶鈞也, '{...}'라고 했다. 王先謙은 案寓言篇亦云///始卒若環/莫得其倫/是謂天均//天均者/天倪也///此作鈞/用通借字, '{...}'라고 하였다. ◈◈ 郭象은 莫之偏任/故付之自均而止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達道聖人/虛懷不執/故能和是於無是/同非於無非/所以息智乎均平之鄉/休心乎自然之境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是之謂兩行, ◈ 是는 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을 가리킨다. ◈ 之는 {...}이다. 원래 순서로 적어 보면 謂是兩行이 된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兩行은 명사구로, 아마 '{...}'이라는 말인 듯하다. 兩은 체언으로, '{...}'을 이르고, 行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그러면 兩行이란 무슨 말일까. 같은 문장 안의 {...}라고 풀이했는데, 대체로 타당한 듯하다. ◈◈ 郭象은 任天下之是非,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不離是非而得無是非/故謂之兩行,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古之人/其知有所至矣, ◈ 古는 체언으로, '{...}'이다. ◈ 之는 {...}다. ◈ 人은 체언으로, '{...}'이다. ◈ 其는 古之人을 가리킨다. ◈ 知는 체언으로, '{...}'이다. ◈ 有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 같다. ◈ 所는 '{...}'다. 나는 '{...}'처럼 해석하였다. ◈ 至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成玄英은 造極之名, '{...}'이라고 했다. ◈◈ 成玄英은 淳古聖人/運智虛妙/雖復和光混俗/而智則無知/動不乖寂/常眞妙本//所至之義/列在下文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惡乎至, ◈ 惡는 의문사로, 여기서는 '{...}'라고 보아야 하겠다. '{...}'라고 읽는다. ◈ 乎는 '{...}'다. 於와 같다. ◈ 至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成玄英은 假設疑問/於何而造極耶, '{...}'라고 했다. [본문으로]
- 有以爲未始有物者/至矣/盡矣/不可以加矣, ◈ 有以爲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 표현은 以爲未始有物者 전체를 받는다. 즉, {...}는 표현이다. ◈ 以爲는 '{...}'는 말이다. 未始有物을 받는다. ◈ 未始는 '{...}'라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有物의 有를 한정한다. 始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未始를 未曾, '{...}'라고 하였다. ◈ 有物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이 有는 有物의 物에 대한 {...}을 표현하기 위한 말이다. ◈ 物은 체언으로, '{...}'이다. ◈ 者는 '{...}'라는 말이다. 以爲未始有物을 받는다. ◈ 至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盡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不可는 '{...}'라는 말이다. ◈ 以는 爲처럼, 용언으로 '{...}'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以는 '{...}'는 말로, 爲와 같다. 《詩》 「大雅 蕩之什」의 「瞻卬」에 天何以刺,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以는 '{...}'라고 해석된다. 《論語》 「先進」에 如或知爾/則何以哉,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도 以는 爲처럼 '{...}'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 加는 체언으로, '{...}'이다. 여기서는 말을 '{...}'이라는 표현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즉, 不可以加는 不可爲加로, '{...}'라는 뜻이다. ◈◈ 郭象은 此忘天地/遺萬物/外不察乎宇宙/內不覺其一身/故能曠然無累/與物俱往/而無所不應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世所有法/悉皆非有/唯物與我/內外咸空/四句皆非/蕩然虛靜/理盡於此/不復可加//答於前問/意以明至極者也, '{...}'라고 하였다. 四句는 아마 有, 無, 亦有亦無, 非有非無를 이르는 듯하다. ◈◈ 孃破案 : 사물 사이의 {...}는 경지이다. [본문으로]
- 其次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也, ◈ 其次은 아마 '{...}'이라는 말 같다. 其는 앞의 以爲未始有物者를 가리킨다. 次는 체언으로, '{...}'이다. ◈ 以爲는 '{...}'는 말이다. ◈ 有物의 有는 용언으로, '{...}'는 표현이다. ◈ 物은 체언으로, '{...}'이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未始는 '{...}'라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有物의 有를 한정한다. 始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有封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封은 체언으로, '{...}'다. 《春秋左氏傳》 「襄公」 30년에 田有封洫,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封을 疆, '{...}'라고 하였다. 즉, 본문에서는 만물의 '{...}'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王先謙은 界域, '{...}'라고 하였다. ◈ 封也의 也는 '{...}'라고 해석된다. 者와 같다. 以爲有物矣/而未始有封을 받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雖未都忘/猶能忘其彼此,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初學大賢/鄰乎聖境/雖復見空有之異/而未曾封執,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以上又見庚桑楚篇, '{...}'라고 하고, 또 其次見爲有物/尙無彼此, '{...}'라고 하였다. 「庚桑楚」는 《雜篇》에 속한다. 「庚桑楚」에는 古之人부터 其次以爲有物矣까지의 글이 그대로 나오는데, 다만 不이 弗로 되어 있을 뿐이다. [본문으로]
- 其次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也, ◈ 其次은 아마 '{...}'이라는 말 같다. 其는 앞의 {...}를 가리킨다. 次는 체언으로, '{...}'이다. ◈ 以爲는 '{...}'는 말이다. ◈ 有封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封은 체언으로, 상기하였듯 萬物에 대한 '{...}'을 뜻한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未始는 '{...}'라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有物의 有를 한정한다. 始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 有是非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非는 체언으로, '{...}' 정도로 보면 좋겠다. ◈ 是非也의 也는 '{...}'라고 해석된다. 者와 같다. 以爲有封焉/而未始有是非를 받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雖未能忘彼此/猶能忘彼此之是非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通欲難除/滯物之情已有//別惑易遣/是非之見猶忘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雖見有彼此/尙無是非,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是非之彰也/道之所以虧也, ◈ 是非는 체언으로, '{...}'다. ◈ 是非之彰의 之는 {...}다. 道之의 之도 {...}인 듯하다. ◈ 彰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 也는 아마 '{...}'이라는 말일 것이다. 者와 같다. 是非之彰을 받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道는 체언으로, 이치로써의 '{...}'다. ◈ 所以은 아마 '{...}'이라는 말 같다. 虧를 받는다. ◈ 虧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郭象은 無是非乃全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有非有是/流俗之鄙情//無是無非/達人之通鑒//故知彼我彰而至道隱/是非息而妙理全矣,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見是非/則道之渾然者傷矣, '{...}'라고 하였다. 渾然은 '{...}'이다. ◈◈ 孃破案 : 莊子는 가장 높은 경지에서 가장 낮은 수준에 이르기까지 {...} 만다. [본문으로]
- 道之所以虧/愛之所之成, ◈ 道는 체언으로, 이치로써의 '{...}'다. ◈ 道之의 之는 아마 {...}인 것 같다. ◈ 所以은 '{...}'이라는 말 같다. 虧를 받는다. ◈ 虧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愛는 체언으로, '{...}'이다. 여기서는 '{...}'를 뜻한다. '{...}'을 이른다.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앞의 成心과 같다. 다만 成心이 {...}했다면, 愛는 {...}를 이른다. 이 점은 뒷내용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 愛之의 之는 {...}인 듯하다. ◈ 所는 所以처럼 '{...}'이라는 말 같다. 成을 받는다. ◈ 所之成의 之는 아마 {...} 같다. ◈ 成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여기서는 '{...}'라고 해석해야 할 듯하다. ◈◈ 郭象은 道虧則情有所偏而愛有所成/未能忘愛釋私/玄同彼我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虛玄之道/既以虧損/愛染之情/於是乎成著矣,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私愛以是非而成,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是非가 드러나는 {...}는 뜻이다. [본문으로]
- 果且有成與虧乎哉//果且無成與虧乎哉, ◈ 果는 부사어로, '{...}'이다. 成玄英은 果를 決定, '{...}'라고 하였다. ◈ 果且의 且는 {...} 조사일 것이다. 앞에 獨且라는 말이 있었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그런데 有는 {...}라고 보았다. ◈ 成은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愛, 즉 '{...}'와 같다. ◈ 有成與虧의 與는 아마 '{...}'와 같은 말인 듯하다. 以와 같다. 즉, 有成與虧는 '{...}'라는 말이 된다. 無成與虧의 與도 그렇다. 與와 以는 통용되었다. 《易》 「繫辭 上」에 是故可與酬酢/可與祐神矣,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可與는 可以처럼 해석된다. 또, 《禮記》 「檀弓 上」에 殷人殯於兩楹之間/則與賓主夾之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與賓主는 以賓主라고 해석된다. 또, 《史記》 「袁盎鼂錯列傳」에 妾主豈可與同坐哉,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可與는 可以처럼 해석된다. 또, 이 말은 《漢書》 「爰盎晁錯傳」에는 妾主豈可以同坐哉이라고, 아예 可與가 可以로 바뀌어서 기록되어 있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與」에 수록되어 있다. ◈ 虧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라는 말이다. ◈ 乎哉는 의문사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이 無成했다는 말일까. 나는 앞의 愛, 즉 '{...}'라고 보았다. ◈◈ 郭象은 有之與無/斯不能知/乃至,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道無增減/物有虧成//是以物愛既成/謂道爲損/而道實無虧也//故假設論端以明其義//有無既不決定/虧成理非實錄,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成與虧/故昭氏之鼓琴也//無成與虧/故昭氏之不鼓琴也,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成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有成與虧의 與는 '{...}'라는 말이다. 以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果且有成與虧乎哉의 與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虧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는 뜻이다. ◈ 故는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일 듯하다. 그러나 故가 '{...}'라는 의미임은 내가 온전히 문맥으로 추측한 바일 뿐, 다른 근거가 있지는 않다. 만약 故가 용언이라면, 有成與虧와 無成與虧가 명사구로써 주어 역할을 하고, 昭氏之鼓琴과 昭氏之不鼓琴이 다시 명사구로써, 목적어 역할을 할 것이다. 宣穎은 故를 古, '{...}'이라고 하였다. ◈ 昭氏는 사람 이름으로, 昭文을 이른다. 琴을 잘 타던 사람이다. {...} 《呂氏春秋》 「審分覽 君守」에 鄭大師文終日鼓瑟而興, '{...}'라는 말이 있는데, 이 {...} 생각된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姓昭/名文/古之善鼓琴者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司馬云/古善琴者, '{...}'라고 했다. ◈ 昭氏之鼓琴의 之는 아마 {...}인 듯하다. 昭氏之不鼓琴의 之도 그렇다. ◈ 鼓琴은 명사구로, '{...}'이라는 말이다. 琴은 체언으로, '{...}'다. 악기의 이름이다. 鼓는 용언으로, 악기를 '{...}'는 말이다. 《詩》 「小雅 鹿鳴之什」의 「鹿鳴」에 鼓瑟鼓琴, '{...}'는 말이 있다. 여기서 鼓는 '{...}'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不鼓琴은 명사구로, '{...}'이라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로, 鼓를 한정한다. 鼓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琴은 체언으로, '{...}'다. 악기의 이름이다. ◈◈ 郭象은 夫聲不可勝舉也//故吹管操絃/雖有繁手/遺聲多矣//而執籥鳴弦者/欲以彰聲也/彰聲而聲遺/不彰聲而聲全//故欲成而虧之者/昭文之鼓琴也//不成而無虧者/昭文之不鼓琴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昭氏鼓琴/雖云巧妙/而鼓商則喪角/揮宮則失徵/未若置而不鼓/則五音自全//亦猶有成有虧/存情所以乖道//無成無虧/忘智所以合眞者也, '{...}'라고 했다. [본문으로]
- 昭文之鼓琴也/師曠之枝策也/惠子之據梧也/三子之知幾乎, ◈ 昭文之鼓琴의 之는 {...}다. 師曠之枝策, 惠子之據梧의 之도 모두 그렇다. ◈ 鼓는 용언으로, 악기를 '{...}'라는 말이다. ◈ 琴은 체언으로, '{...}'다. 악기의 이름이다. ◈ 昭文之鼓琴也의 也는 아마 {...} 같다. 師曠之枝策也, 惠子之據梧也의 也도 그렇다. ◈ 師曠은 사람 이름이다. 북을 잘 치던 사람으로, 晉나라 平公의 樂師였다. 《春秋左氏傳》 「襄公」 14년에 師曠侍於晉侯, '{...}'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杜預는 師曠/晉樂大師子野, '{...}'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에서 師曠에 대한 기록은 {...}까지 활동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師曠/字子野/晉平公樂師/甚知音律, '{...}'라고 하였다. ◈ 枝策은 아마 '{...}'라는 말이 아닐까 하다. 策은 체언으로, 북을 연주하는 '{...}'일 것이다. 枝는 본래 나무의 '{...}'라는 말인데, 이래서는 말이 되지 않는다. 아마 {...} 합치되는 구석이 있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支를 柱, '{...}'이라고 하였고, 策은 打鼓杖也/亦言擊節杖也,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司馬云/枝/柱也//策/杖也///崔云/舉杖以擊節,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枝策者/拄其策而不擊, '{...}'라고 하였다. ◈ 惠子는 方生之說을 주장했던 名家의 학자이자 魏나라의 재상이었다. ◈ 據梧는 '{...}'라는 말인 듯하다. 據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여기서는 어딘가에 '{...}'라는 말로 사용된 듯하다. 梧는 체언으로, 아마 '{...}'인 듯하다. 주체가 惠子이므로, '{...}'처럼 해석해야 할 것 같다. 成玄英은 梧/琴也//今謂不爾,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吾//司馬云/梧/琴也///崔云/琴瑟也, '{...}'라고 하였다. 成玄英은 昭文已能鼓琴/何容二人共同一伎//況檢典籍/無惠子善琴之文//而言據梧者/只是以梧几而據之談說/猶隱几者也, '{...}'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今從成說//德充符篇莊謂惠子云/今子外乎子之神/勞乎子之精/倚樹而吟/據槁梧而瞑, '{...}'라고 하였다. ◈ 三은 관형어로, '{...}'다. ◈ 子는 경칭으로, '{...}'이라고 해석된다. ◈ 三子之知의 之는 {...}다. ◈ 知는 체언으로, 본래 '{...}'인데, 여기서는 '{...}'라고 해석해야 하겠다. 陸德明은 音智, '{...}'라고 하였다. ◈ 幾는 아마 {...}의 가차자일 듯하다.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幾를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아마 {...} 사례들은 《荀子》에 자주 등장한다. 《荀子》 「仲尼」에 彼非本政教也/非致隆高也/非綦文理也/非服人之心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綦는 '{...}'는 말이다. 또, 《荀子》 「仲尼」에 故聖王之誅也綦省矣,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綦는 '{...}'라는 말이다. 《荀子》 「王制」에는 全道德/致隆高/綦文理/一天下, '道{...}'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綦는 '{...}'는 말이다. 《荀子》 「王霸」에는 及其綦也/索爲匹夫不可得也, '{...}'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綦는 '{...}'는 말이다. 본문에 대해, 郭象은 盡, '{...}'라고 하였다. 成玄英도 盡, '{...}'라고 하였다. ◈ 乎는 감탄사다. ◈◈ 郭象은 夫三子者/皆欲辯非己所明以明之/故知盡慮窮/形勞神倦/或枝策假寐/或據梧而瞑, '{...}'라고 했다. ◈◈ 成玄英은 昭文善能鼓琴/師曠妙知音律/惠施好談名理//而三子之性/稟自天然/各以己能明示於世//世既不悟/己又疲怠/遂使柱策假寐/或復凭几而瞑//三子之能/咸盡於此,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據梧而瞑/善辯者有不辯之時/枝策者有不擊之時//上昭文鼓琴/亦兼承不鼓意,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皆其盛者也/故載之末年, ◈ 皆는 체언으로, '{...}'처럼 해석된다. '{...}'라는 말이다. {...}를 이른다. ◈ 其는 아마 {...}인 듯하다. 之와 같다. 《詩》 「小雅 白華之什」의 「魚麗」에 物其多矣, '{...}'라는 말이 있고, 物其旨矣, '{...}'라는 말이 있으며, 物其有矣, '{...}'라는 말이 있다. 其는 모두 之처럼 {...}로 사용되었다. 또, 《春秋公羊傳》 「成公」 15년에 爲人後者爲之子也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을 되물을 때는 爲人後者爲其子라고 해 두었다. 之와 其가 통용되기 때문에 바꿔 쓴 것이다. 즉, 其와 之는 통용된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盛은 아마 관형어로, '{...}'이라는 말인 듯하다. 나는 재주가 '{...}'이라고 의역하였다. ◈ 者는 '{...}'이다. 盛을 받는다. 따라서 盛者는 재주가 '{...}'이라는 말이 된다. ◈ 皆其盛者也의 也는 {...}일 것이다. ◈ 故는 '{...}'다. ◈ 載는 용언으로, 책에 '{...}'라는 말이다. ◈ 之는 於나 之於처럼, '{...}'로 해석된다. ◈ 末年은 '{...}'를 뜻한다. 따라서 載之末年은 '{...}'라는 뜻이 된다. 陸德明은 崔云/書之於今也, '{...}'라고 했다. ◈◈ 郭象은 賴其盛/故能久/不爾早困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惠施之徒/皆少年盛壯/故能運載形智//至於衰末之年/是非少盛/久當困苦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言昭善鼓琴/曠知音律/惠談名理/三子之智/其庶幾乎//皆其最盛美者也/故記載之/傳於後世,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唯其好之也/以異於彼, ◈ 唯는 부사어로, '{...}'이라는 말 같다. ◈ 其는 {...}를 가리킨다. ◈ 好는 체언으로, 아마 '{...}'라는 말이다. ◈ 好之의 之는 아마 {...}일 것이다. {...}려고 넣은 말인 듯하다. ◈ 其好之也의 也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者와 같다. 其好之 혹은 其好를 받는다. 其好之也, 즉 其好之者는 '{...}'이라는 말이 된다. 也가 者와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以는 아마 '{...}'라는 말 같다. 爲와 같을 것이다. 爲 역시 '{...}'처럼 해석된다. 異於彼를 받는다. 즉, 以異於彼는 '{...}'라는 말이 된다. 以가 '{...}'라는 의미에서 爲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나 '{...}'와 같은 의미로 爲처럼 사용된 사례가 더 있는지는 모르겠다. 발음이 비슷해서 서로 轉用되었을 수 있겠다. 以가 '{...}'라는 의미에서 爲처럼 사용된 사례는 앞에 나온 不可以加矣의 以 부분에 설명해 두었다. ◈ 異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於는 '{...}'이다. ◈ 彼는 아마 {...}을 가리키는 말 같다. 彼를 {...} 安炳周나 田好根처럼 해석하면 말이야 되더라도, 그런 주제에 접근해 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차 기재해 둔다. ◈◈ 郭象은 言此三子/唯獨好其所明/自以殊於眾人,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三子各以己之所好/耽而翫之/方欲矜其所能/獨異於物, '{...}'라고 했다. [본문으로]
- 其好之也/欲以明之, ◈ 其好之也는 爲其好之也, '{...}'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 其는 {...}를 가리킨다. ◈ 好는 체언으로, 아마 '{...}'라는 말이다. ◈ 好之의 之는 아마 {...}일 것이다. {...}려고 넣은 말인 듯하다. ◈ 其好之也의 也는 아마 '{...}'이라는 말 같다. 者와 같다. 其好之 혹은 其好를 받는다. 其好之也, 즉 其好之者는 '{...}'이라는 말이 된다. 也가 者와 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의 其厭也如緘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欲은 '{...}'라는 말이다. ◈ 欲以의 以는 爲처럼 '{...}'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명사구인 明之를 받는다. 以가 爲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不可以加矣의 以 부분에 설명해 두었다. ◈ 明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아마 계속 '{...}'는 뜻 같다. ◈ 明之의 之는 其好之也, 즉 세 사람의 취미를 가리킨다. ◈◈ 郭象은 明示眾人/欲使同乎我之所好, '{...}'라고 했다. ◈◈ 成玄英은 所以疲倦形神好之不已者/欲將己之道術明示眾人也, '{...}'라고 하였다. ◈◈ 宣穎은 惟自以爲異於人/且欲以曉於人, '{...}'락고 하였다. ◈◈ 王先謙은 唯其好之四語/專承善辯者言, '{...}'라고 하였다. 《莊子集釋》에는 其好之也/欲以明之까지를 한 구문으로 보고, 彼를 뒤에 붙여 뒷 문장이 彼非所明而明之로 시작한다고 보았으며, 《莊子集解》에서는 其好之也/欲以明之彼까지를 한 구문으로 보고, 뒷 문장이 非所明而明之로 시작한다고 보았다. ◈◈ 孃破案 : 앞의 愛와, 뒤에 나올 成의 의미를 고려할 때, 세 사람의 재주가 {...}이라고 했던 것이다. [본문으로]
- 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 ◈ 彼는 아마 {...}를 가리키는 말 같다. 成玄英은 眾人, '{...}'이라고 하였다. ◈ 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所明은 '{...}'이다. 따라서 非所明은 '{...}'라는 말이다. 所는 '{...}'이다. 明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所明을 道術, '{...}'이라고 하였다. ◈ 而는 역접인 것 같다. '{...}'이라고 해석된다. ◈ 明之의 明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明之의 之는 彼처럼 {...}을 가리킨다. ◈ 故는 '{...}'다. ◈ 以는 '{...}'다. 아마 堅白之昧를 받는 듯하다. ◈ 堅白은 堅白論을 이른다. {...} 등장한다. 《荀子》의 「修身」에서도 夫/堅白/同異/有厚無厚之察/非不察也//然而君子不辯/止之也, '{...}'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夫/驥一日而千里/駑馬十駕則亦及之矣//將以窮無窮/逐無極與//其折骨絶筋/終身不可以相及也, '{...}'라고 하였다. 쉽게 말해, '{...}'는 뜻이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白/即公孫龍守白馬論也//姓公孫/名龍/趙人//當六國時/弟子孔穿之徒/堅執此論/橫行天下/服眾人之口/不服眾人之心,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司馬云/謂堅石白馬之辯也//又云/公孫龍有淬劍之法/謂之堅白//崔同//又云/或曰/設矛伐之說爲堅/辯白馬之名爲白, '{...}'라고 하였다. 盧文弨는 伐即盾也/亦作𢧕/又作瞂/音皆同, '{...}'라고 하였다. ◈ 堅白之昧의 之는 {...}일 것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고, '{...}'처럼 해석할 수도 있을 듯하다. 之를 {...}로 해석하였다. ◈ 昧는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堅白之昧의 {...} 한다. ◈ 終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세 사람의 자신들의 학문과 재주를 이렇게 '{...}'라는 말인 듯하다. ◈◈ 郭象은 是猶對牛鼓簧耳//彼竟不明/故己之道術終於昧然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言物稟性不同/所好各異/故知三子道異/非眾人所明//非明而強示之/彼此終成暗昧//亦何異乎堅執守白之論眩惑世閒/雖弘辯如流/終有言而無理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非人所必明/而強欲共明之/如堅石白馬之辯/欲衆共明/而終於昧/故曰以堅白之昧終//堅白/又見德充符天下天地秋水四篇, '{...}'라고 하였다. 堅石은 아마 堅白을 뜻할 것이다. 堅白論 자체가 '{...}'에 대한 논의이므로, 아마 오기가 아닐 것이다. {...} 「德充符」에서는 莊子가 惠子를 힐난하면서 天選子之形/子以堅白鳴, '{...}'라고 하였다. 「駢拇」에서는 楊朱와 墨翟을 힐난하면서, 駢於辯者/纍瓦結繩竄句/遊心於堅白同異之間/而敝跬譽無用之言非乎//而楊墨是已, '{...}'라고 하였다. 「胠篋」에서는 知詐漸毒頡滑堅白解垢同異之變多/則俗惑於辯矣, '{...}'라고 하였다. 「天地」에는 孔子와 老聃이 대화를 나누는데, 孔子가 辯者有言曰///離堅白若縣宇, '{...}'라고 묻는 말이 나온다. 이것이 堅白論이다. 「秋水」에서는 公孫龍이 魏牟에게 龍少學先生之道/長而明仁義之行/合同異/雜堅白/然不然/可不可/困百家之知/窮眾口之辯/吾自以爲至達已, '{...}'라고 자랑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끝으로 「天下」에서는 相里勤之弟子五侯之徒/南方之墨者苦獲、已齒、鄧陵子之屬/俱誦《墨經》/而倍譎不同/相謂別墨/以堅白、同異之辯相訾/以觭偶不仵之辭相應/以巨子爲聖人, '{...}'라는 말이 있다. 생각해 볼 만한 점이 있다. 본래 堅白論은 {...} 모르겠다. ◈◈ 孃破案 : 堅白論을 예로 들기는 하였지만, 이 이야기는 {...} 대해 하는 이야기다. [본문으로]
- 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無成,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其는 {...}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간주하였다. ◈ 子는 체언으로, '{...}'이다. 즉, 其子는 {...}이다. ◈ 又는 부사어로 '{...}'다. ◈ 以는 '{...}'처럼 보인다. 文之綸을 받는다. ◈ 文之綸의 文은 체언으로, 아마 세 사람이 이룬 '{...}'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 文之綸의 之는 {...}다. ◈ 綸은 체언으로, '{...}'를 뜻한다. 이 점은 俞樾의 주석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文之綸은 세 사람이 이룬 {...}을 뜻하게 된다. 成玄英은 緒, '{...}'이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音倫//崔云/琴瑟絃也, '{...}'라고 했다. 한편 俞樾은 釋文綸音倫/崔云琴瑟絃也//然以文之絃終/其義未安//郭注曰/昭文之子又乃終文之緒/則是訓綸爲緒//今以文義求之//上文曰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之昧與之綸/必相對爲文//周易繫辭傳/故能彌綸天地之道/京房注曰/綸/知也///淮南子說山篇/以小明大/以近論遠/高誘注曰/論/知也///古字綸與論通//淮南與明對言/則綸亦明也//以文之綸終/謂以文之所知者終/即是以文之明終//蓋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昭文之子又以文之明終/則仍是非所明而明矣/故下曰終身無成也//郭注尙未達其恉, '{...}'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淮南子》 「說山」은 《淮南子》 「說山訓」을 뜻한다. 《淮南》은 《淮南子》다. 王先謙은 終文之緖/猶禮中庸云纘太王王季文王之緖也, '{...}'라고 하였다. 《禮》는 《禮記》다. 「中庸」에서 緖는 '{...}'을 이른다. ◈ 文之綸終의 終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자식의 代로 이어지거나 전수되지 못하고 '{...}'라는 의미인 듯하다. ◈ 終身은 부사어구로, '{...}'이다. 終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고, 身은 체언으로, '{...}'이다. ◈ 無는 부정어다. 成을 한정한다. ◈ 成은 용언으로, 道를 '{...}'는 말 같다. 앞에서 成은 愛를 받았다. 그러나 여기서도 愛를 받는다고 해석하면 말이 이어지지 않는다. 王先謙은 所謂無成者/不過成其一技/而去道遠/仍是無成, '{...}'라고 하였다. ◈◈ 郭象은 昭文之子又乃終文之緒/亦卒不成,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言昭文之子亦乃荷其父業/終其綸緒/卒其年命/竟無所成//況在它人/如何放哉,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彼非所明而明之/故以堅白之昧終/而其子又以文之綸終/終身無成은 昭文, 師曠, 惠子 세 사람이 {...} 정합되지 않게 된다. [본문으로]
- 若是而可謂成乎//雖我亦成也, ◈ 若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는 {...}를 가리킨다. ◈ 而는 아마 '{...}'라는 말 같다. 以와 같다. 是를 받는다. 《墨子》 「尙賢 下」에 使天下之爲善者可而勸也/爲暴者可而沮也, '{...}'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上可而利天/中可而利鬼/下可而利人, '{...}'라는 말이 있다. 《呂氏春秋》 「孟春紀 去私」에는 南陽無令/其誰可而爲之,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可而는 모두 可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는 뜻이다. 而가 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또, 《荀子》 「成相」에는 進諫不聽/剄而獨鹿/棄之江, '{...}'라는 말이 있는데, 剄而獨鹿의 而는 以, 즉 '{...}'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고, 또 《荀子》 「成相」의 剄而獨鹿에 대한 王念孫의 주석에도 들어 있다. ◈ 可는 '{...}'는 말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謂成乎의 成은 용언으로, 道를 '{...}'는 말이다. 亦成也의 成도 그렇다. ◈ 乎는 의문사다. ◈ 雖는 '{...}'이다. ◈ 我는 1인칭 대명사다. 아마 莊子 자신을 가리키는 말 같다. 成玄英은 眾人, '{...}'이라고 하였다. ◈ 亦은 부사어로, '{...}'다. ◈ 句 뒷쪽 부분인 雖我亦成也에 대해 郭慶藩은 闕誤引江南古藏本作雖我無成亦可謂成矣, '{...}'라고 하였다. 《闕誤》는 陳景元의 《莊子闕誤》다. 雖我無成亦可謂成矣라면, '{...}'라는 뜻이 된다. 본뜻은 같지만, 좀 더 상세하고, 분명하다. ◈◈ 郭象은 此三子雖求明於彼/彼竟不明/所以終身無成//若三子而可謂成/則雖我之不成亦可謂成也, '{...}'라고 했다. ◈◈ 成玄英은 若三子異於眾人/遂自以爲成/而眾人異於三子/亦可謂之成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若是而不可謂成乎//物與我無成也, ◈ 若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는 {...}를 가리킨다. ◈ 而는 아마 '{...}'라는 말 같다. 以와 같다. 是를 받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若是而可謂成乎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不은 부정어다. ◈ 可는 '{...}'는 말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謂成乎의 成은 용언으로, 道를 '{...}'는 말이다. 我無成의 成도 그렇다. ◈ 乎는 의문사다. ◈ 物은 체언으로, 아마 '{...}'이라는 말 같다. ◈ 與는 '{...}'다. ◈ 我는 1인칭 대명사다. 아마 莊子 자신을 가리키는 말 같다. ◈ 無는 부정어다. 成을 한정한다. ◈◈ 郭象은 物皆自明而不明彼/若彼不明/即謂不成/則萬物皆相與無成矣//故聖人不顯此以耀彼/不捨己而逐物/從而任之/各冥其所能/故曲成而不遺也//今三子欲以己之所好明示於彼/不亦妄乎,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若三子之與眾物相與而不謂之成乎//故知眾人之與三子/彼此共無成矣, '{...}'라고 했다. ◈◈ 王先謙은 若是而不可謂成乎//則天下之無成者多矣//當知以我逐物/皆是無成也,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세 사람이 {...} 좋을 듯하다. [본문으로]
- 是故滑疑之耀/聖人之所圖也//爲是不用而寓諸庸/此之謂以明, ◈ 是故는 '{...}'라는 말이다. 是는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故는 체언으로, '{...}'이다. ◈ 滑疑之耀는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나는 '{...}'이라고 해석했다. 아마도 滑疑之耀는 {...}이다. 본문에 대해, 陸德明은 古沒反//司馬云/亂也, '{...}'라고 했다. 王先謙은 雖亂道/而足以眩耀世人/故曰滑疑之耀//聖人必謀去之/爲其有害大道也//爲是不用己智/而寓諸尋常之理/此之謂以本然之明照之, '{...}'라고 하였다. ◈ 聖人은 道를 깨우친 사람이다. ◈ 聖人之所圖의 之는 {...}다. ◈ 所圖는 '{...}'라는 말이다. 所는 '{...}'다. 圖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다만, 滑疑之耀를 {...}처럼 해석해야 한다. ◈ 爲是의 爲는 '{...}'라는 말이다. 따라서 爲是는 '{...}'라는 말이 된다. ◈ 爲是의 是는 {...}다는 말을 가리킨다. ◈ 不用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다. 用을 한정한다. 用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 而는 순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寓는 용언으로, '{...}'는 뜻이다. 成玄英은 寄, '{...}'라고 하였다. ◈ 諸는 之於의 줄임말이다. '{...}'라고 해석된다. 이 때는 '{...}'라고 읽는다. ◈ 庸은 체언으로, '{...}'이라는 뜻이다. 만물이 타고난 그대로의 '{...}'이 바로 庸이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大宗師」에 大情, 物之情이라고 하는 말이 나온다. 成玄英은 用, '{...}'라고 하였다. ◈ 此는 不用而寓諸庸을 가리킨다. ◈ 此之謂의 之는 {...}이다. {...}되지 않았다면 謂此以明이 될 것이다. ◈ 謂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以明을 받는다. ◈ 以明은 道以明 또는 以道明이라고 보고 해석해야 한다. {...}는 말이다. 以明은 명사구로 해석되므로, '{...}'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 郭象은 夫聖人無我者也//故滑疑之耀/則圖而域之//恢恑憰怪/則通而一之//使群異各安其所安/眾人不失其所是/則己不用於物/而萬物之用用矣//物皆自用/則孰是孰非哉//故雖放蕩之變/屈奇之異/曲而從之/寄之自用/則用雖萬殊/歷然自明,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聖人者/與天地合其德/與日月齊其明//故能晦跡同凡/韜光接物/終不眩耀群品/亂惑蒼生/亦不矜己以率人/而各域限於分內/忘懷大順於萬物/爲是寄用於群才//而此運心/斯可謂聖明眞知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以上言求道則不容有物/得物之一端以爲道/不可謂成, '{...}'라고 했다. [본문으로]
- 今且有言於此/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類與不類/相與爲類/則與彼無以異矣, ◈ 今은 {...}처럼 보면 좋겠다. ◈ 今且의 且는 {...}인 듯하다. 앞에 獨且, 果且라는 표현이 있었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言은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 於는 '{...}'다. 此를 받는다. ◈ 此는 '{...}'이다. 따라서 有言於此는 '{...}'처럼 {...}하는 표현이 된다. ◈ 不知의 不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不類의 不도 그렇다. 類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其與是類의 其는 言을 가리킨다. 其與是不類의 其도 그렇다. ◈ 其與是類의 與는 '{...}'다. 其與是不類, 類與不類, 與彼의 與가 모두 그렇다. ◈ 其與是類의 是는 문맥을 고려할 때, {...}을 포괄해 지칭하는 말인 듯하다. 其與是不類의 是도 그렇다. 宣穎은 是를 我, '{...}'이라고 하였다. ◈ 是類의 類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是不類, 類與不類의 類도 모두 그렇다. 다만 相與爲類의 類는 {...}으로 해석해야 한다. 成玄英은 類者/輩徒相似之類也, '{...}'라고 하였다. ◈ 其與是類乎의 乎는 {...}가 아니라 {...}로 보아야 할 것 같다. 言이 {...} 乎도 마찬가지다. ◈ 相與는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相과 與는 모두 '{...}'라는 뜻이다. ◈ 爲類의 爲는 용언으로, 아마 '{...}'라는 말일 것이다. ◈ 相與爲類의 類는 체언으로, '{...}'라는 말이다. ◈ 則은 '{...}'처럼 {...}으로 해석된다. 而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則莫若以明의 則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彼는 不知其與是類乎/其與是不類乎의 是처럼 {...}을 포괄해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 無以異는 '{...}'는 말이다.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以는 所以와 같다. '{...}'이라는 말이다. 異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郭象은 今以言無是非/則不知其與言有者類乎不類乎//欲謂之類/則我以無爲是/而彼以無爲非/斯不類矣//然此雖是非不同/亦固未免於有是非也/則與彼類矣//故曰類與不類又相與爲類/則與彼無以異也//然則將大不類/莫若無心/既遣是非/又遣其遣//遣之又遣之以至於無遣/然後無遣無不遣而是非自去矣, '{...}'라고 했다. ◈◈ 成玄英은 但群生愚迷/滯是滯非//今論乃欲反彼世情/破茲迷執/故假且說無是無非/則用爲眞道//是故復言相與爲類/此則遣於無是無非也//既而遣之又遣/方至重玄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如人皆執彼此之見/今且有言如此/不知其與我類乎//與我不類乎//若務求勝彼/而引不類者爲類/則與彼之不類有異乎, '{...}'라고 했다. [본문으로]
- 雖然/請嘗言之, ◈ 雖然은 역접으로, '{...}'과 같은 말이다. ◈ 請은 {...}하는 표현으로, {...}'는 뜻이다. ◈ 嘗은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試, '{...}'라고 하였다. ◈ 言은 용언으로, '{...}'는 뜻이다. 즉, 有言於此에 나온 言에 대해 '{...}'는 표현이다. ◈ 言之의 之는 有言於此의 言을 가리킨다. ◈◈ 郭象은 至理無言/言則與類/故試寄言之,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至理雖復無言/而非言無以詮理/故試寄言/彷象其義,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莊子는 說에 따른 논증 방식, 즉 儒墨이나 名家의 방식이 {...}는 점을 보일 수 있다. [본문으로]
- 有始也者,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始는 체언으로, '{...}'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也者는 者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다. 앞에 庸也者/用也//用也者/通也//通也者/得也라는 말이 있었는데, 여기서 也者는 모두 者처럼 '{...}'이라고 해석되었다. 그러나 본문의 경우에는 전후 내용을 살펴 보아도 也로 해석된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즉, 也者는 也也가 되고, 이는 곧 也와 같다. 《論語》 「陽貨」에 惡紫之奪朱也/惡鄭聲之亂雅樂也/惡利口之覆邦家者, '{...}'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者는 다른 句의 也와 대구를 이루고 있고, 또 그 쓰임 역시 也와 같이 조사다. 王引之는 《皇侃本》에는 者가 也라고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 점을 확인하지는 못했다. 《國語》 「鄭語」에는 公曰/周其弊乎///對曰/殆於必弊者, '{...}'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에서의 者 역시 也처럼 조사로 사용되었다. 金在烈은 《四部備要本》에 者也라고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四部備要本》을 펴낸 사람이 者가 也의 역할을 하는 줄 모르고 문장을 끝내려고 也를 더 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예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者諸」에 수록되어 있다. ◈◈ 郭象은 有始則有終, '{...}'라고 했다. ◈◈ 成玄英은 此假設疑問/以明至道無始無終/此遣於始終也,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未始有始也者, ◈ 제일 앞에 있는 有未始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未始有始를 받는다. ◈ 未始는 '{...}'는 말이다. 따라서 未始有始는 '{...}'가 된다. 成玄英은 未曾, '{...}'와 같다고 하였다. ◈ 未始有始의 有始는 명사구로, '{...}'을 뜻한다. 有는 용언으로, '{...}'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有始의 始는 체언으로, '{...}'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謂無終始而一死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此又假問/有未曾有始終不//此遣於無始終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事端未露,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未始有夫未始有始也者, ◈ 제일 앞에 있는 有未始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未始有夫未始有始를 받는다. ◈ 未始는 '{...}'는 말이다. 따라서 未始有夫未始有始는 '{...}'가 되는데, 이는 곧 '{...}'라는 말이다. 未始有始는 '{...}'라는 말이 된다. ◈ 未始有夫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夫未始有始를 받는다. ◈ 夫는 '{...}'처럼 {...}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이 반복되면 헷갈리니까 넣어 둔 것 같다. ◈ 夫未始有始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始를 받는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夫一之者/未若不一而自齊/斯又忘其一也, '{...}'라고 했다. ◈◈ 成玄英은 此又假問/有未曾有始也者//斯則遣於無始無終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並無事端/僅具事理,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有也者, ◈ 이 句부터 이어지는 설은 {...} 이어지므로, 나는 王先謙처럼 有無를 '{...}'처럼 해석하였다. ◈ 앞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有를 받는다. ◈ 뒤의 有는 체언으로, 앞에서 설명하였던 言, 즉 설이 '{...}'라는 뜻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有有則美惡是非具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萬象森羅/悉皆虛幻/故標此有/明即以有體空//此句遣有也, '{...}'라고 했다. [본문으로]
- 有無也者,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無를 받는다. ◈ 無는 체언으로, 앞에서 설명하였던 言, 즉 설이 '{...}'라는 뜻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有無而未知無無也/則是非好惡猶未離懷,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假問有此無不//今明非但有即不有/亦乃無即不無//此句遣於無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言之有無, '{...}'라고 하였다. [본문으로]
- 有未始有無也者, ◈ 제일 앞에 있는 有未始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未始有無를 받는다. ◈ 未始는 '{...}'는 말이다. 有無를 받는다. ◈ 未始有無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無를 받는다. ◈ 未始有無의 無는 체언으로, 설이 '{...}'라는 말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郭象은 知無無矣/而猶未能無知,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假問有未曾有無不//此句遣非,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言未曾出, '{...}'라고 했다. [본문으로]
- 有未始有夫未始有無也者, ◈ 제일 앞에 있는 有未始의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를 받는다. ◈ 未始는 '{...}'는 말이다. 未始有夫未始有無에서 {...}를 받는다. ◈ 未始有夫의 有 역시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夫未始有無를 받는다. ◈ 夫는 '{...}'처럼 지시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이 반복되면 헷갈리니까 넣어 둔 것 같다. ◈ 夫未始有無의 有 역시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無를 받는다. ◈ 無는 체언으로, 설이 '{...}'라는 말이다. ◈ 也者는 아마 也처럼 {...} 같다. 者는 也와 통용되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有始也者의 也者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成玄英은 假問有未曾未曾有無不//此句遣非非無也//而自淺之深/從麄入妙/始乎有有/終乎非無//是知離百非/超四句/明矣//前言始終/此則明時//今言有無/此則辯法//唯時與法/皆虛靜者也,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並出言之心亦未曾萌,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이 부분의 有와 無는, {...} 이어지지 않게 된다. [본문으로]
- 俄而有無矣/而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 俄而는 俄然과 같다. 부사어로, '{...}'라는 말이다. 而는 然처럼, 형용하는 말로 바꾸어 주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書》 「虞書 益稷」에 啟呱呱而泣, '{...}'라는 말이 있고, 《詩》 「國風 召南」에 舒而脫脫兮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이를 脫脫然舒也, '{...}'라고 풀이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 17년에는 鋌而走/險急何能擇, '{...}'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鋌/疾走貌, '{...}'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에서 而는 모두 然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본문에 대해, 陸德明은 徐音峨, '{...}'라고 했다. 峨는 '{...}'이라는 말이다. ◈ 俄而有無矣의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俄而有無矣의 無는 체언으로, 설이 '{...}'이다. ◈ 而未知의 而는 '{...}'라는 뜻 같다. 乃와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道惡乎隱而有眞僞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未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有無之果孰有孰無를 받는다. ◈ 有無之果의 有와 無는 체언으로, 아마 세상 사람들이 '{...}'을 이르는 것 같다. ◈ 有無之果의 之는 {...}인 듯하다. 원래 어순은 果有無孰有孰無가 될 것이다. ◈ 果은 부사어로, '과연', '진정'이다. ◈ 孰은 '{...}'이다. ◈ 孰有孰無의 有와 無는 아마 용언으로, '{...}'라는 말일 것이다. 즉, 孰有孰無는 '{...}'라는 뜻일 듯하다. ◈◈ 郭象은 此都忘其知也/爾乃俄然始了無耳//了無/則天地萬物/彼我是非/豁然確斯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前從有無之跡入非非有無之本/今從非非有無之體出有無之用//而言俄者/明即體即用/俄爾之間/蓋非賖遠也//夫玄道窈冥/眞宗微妙//故俄而用/則非有無而有無/用而體/則有無非有無也//是以有無不定/體用無恆/誰能決定無耶//誰能決定有耶//此又就有無之用明非有非無之體者也, '{...}'라고 했다. ◈◈ 王先謙은 忽而有有言者/有無言者/然有者或情已竭/無者或意未盡//是有者爲無/無者爲有/故曰未知有無之果孰有孰無也, '{...}'라고 했다. ◈◈ 孃破案 : 사람들은 有와 無, {...} 위배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今我則已有謂矣, ◈ 今은 부사어로, '{...}'이다. ◈ 我는 1인칭 대명사다. 莊子 본인을 이른다. ◈ 則은 之처럼 {...}로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之와 則은 통용되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東略之不知/西則否矣, '{...}'라는 말이 있고, 《國語》 「晉語」에 華則榮矣/實之不知, '{...}'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之과 則은 모두 '{...}'과 같이 사용되었으며, 같은 형식의 句에서 서로 대구를 이루고 있다. 則과 之가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之」에 수록되어 있다. ◈ 已는 부사어로, '{...}'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謂는 체언으로, '{...}'이라고 보아야 할 듯하다. 앞에서 나온 言과 같다. 즉, 我則已有謂는 '{...}'라는 뜻이 된다. ◈◈ 郭象은 謂無是非/即復有謂,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既顯有言矣, '{...}'라고 했다. [본문으로]
- 而未知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未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 知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吾所謂之其果有謂乎/其果無謂乎를 받는다. ◈ 吾는 1인칭 대명사다. 莊子 본인을 이른다. ◈ 所謂는 '{...}'을 뜻한다. 앞에서 나온 言을 이른다. 所는 '{...}'이다. 謂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成玄英은 謂/言也, '{...}'라고 했다. ◈ 吾所謂之의 之는 {...}다. 주어는 吾所謂다. 나는 '{...}'처럼 의역하였다. ◈ 其果有謂乎의 其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일 것이다. 將과 같다. 其果無謂乎의 其도 그렇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寐也魂交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果는 부사어로, '{...}'이다. ◈ 有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有謂의 謂를 받는다. ◈ 有謂의 謂는 체언으로, '{...}'를 이른다. 無謂의 謂도 그렇다. ◈ 乎는 {...}로 보는 편이 좋겠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無謂의 謂를 받는다. ◈◈ 郭象은 又不知謂之有無/爾乃蕩然無纖芥於胸中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莊生復無言也//理出有言之教/即前請嘗言之類是也//既寄此言以詮於理/未知斯言定有言耶/定無言耶//欲明理家非默非言/教亦非無非有//恐學者滯於文字/故致此辭,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未知吾所言之果爲有言乎/其果爲無言乎//合於道爲言/不合則有言與無言等, '{...}'라고 했다. ◈◈ 孃破案 : '설'의 시원을 소급해 {...}를 논하고 있다. [본문으로]
- 天下莫大於秋毫之末/而大山爲小//莫壽於殤子/而彭祖爲夭//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爲一, ◈ 이 句의 구조에 대해 먼저 설명하고 시작하겠다. 이 句는 {...}는 점을 설명하려 한다. 天下莫大於秋毫之末/而大山爲小와 莫壽於殤子/而彭祖爲夭는 그 사례인 것이다. 이 점을 감안해서 번역해야 하겠다. ◈ 天下는 체언으로, '{...}'이다. ◈ 天下莫大於秋毫之末의 莫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大於秋毫之末을 받는다. ◈ 大는 아마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大於秋豪之末의 於는 {...}로, '{...}'처럼 해석된다. 大於秋豪之末은 '{...}'라는 뜻이다. 壽於殤子의 於도 마찬가지다. ◈ 秋毫는 동물들에게 '{...}'을 이른다. 가을은 {...}하다고 한다. 秋는 관형어로, '{...}'라는 말이고, 毫는 체언으로, '{...}'이다. 이 글자는 《莊子集解》에는 秋毫라고 되어 있고, 《經典釋文》과 《莊子集釋》에는 秋豪라고 되어 있다. 成玄英은 秋時獸生豪毛/其末至微/故謂秋豪之末也, '{...}'라고 했다. 陸德明은 如字//依字應作毫//司馬云/兔毫在秋而成//王逸注楚辭云/銳毛也//案毛至秋而耎細/故以喻小也, '{...}'라고 하였다. 依字는 아마 依字書, 즉 '{...}'라는 말 같다. 豪는 '{...}'는 뜻이고, 毫는 아주 '{...}'을 뜻하므로, 문맥에 따라 豪가 아니라 毫가 타당하다는 말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豪는 毫의 가차자였을 것이다. 王逸의 注는 「七諫 沉江」에 들어 있다. ◈ 秋豪之末의 之는 {...}다. ◈ 末은 체언으로, '{...}'다. 秋豪 자체도 아주 가늘고 미세한데, 그 끄트머리에 대해서는 두 말할 것이 없겠다. ◈ 而大山爲小의 而는 '{...}'이라고 해석된다. 則과 같다. 而彭祖爲夭, 而萬物與我의 而도 그렇다.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非父則母/非兄而姒也, '{...}'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大山은 山東에 있는 泰山을 이른다. 大는 '{...}'라고 읽는다. 大, 太, 泰는 고대에 통용되었었다. 成玄英은 太/大也, '{...}'라고 하였다. 아마 《成玄英本》에는 大山이 太山으로 되어 있었던 듯하다. 陸德明은 音泰, '{...}'라고 했다. ◈ 爲小의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小는 체언으로, '{...}'는 말이다. ◈ 莫壽於殤子의 莫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壽於殤子를 받는다. ◈ 壽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殤子는 명사구로, '{...}'를 이른다. 구체적으로는 {...}을 殤이라고 한다. 《說文解字》 「歺部」에는 殤/不成人也//人年十九至十六死/爲長殤//十五至十二死/爲中殤//十一至八歲死/爲下殤//从歺/傷省聲, '{...}'라고 되어 있다. 또, 《禮記》 「檀弓 上」에 周人/以殷人之棺槨葬長殤/以夏后氏之堲周葬中殤下殤/以有虞氏之瓦棺葬無服之殤, '{...}'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이에 대해 十六至十九爲長殤/十二至十五爲中殤/八歲至十一爲下殤/七歲已下爲無服之殤/生未三月不爲殤, '{...}'라고 하였다. 즉, 殤子는 '{...}'를 이른다. 殤은 관형어로, '{...}'이라는 말이고, 子는 체언으로, '{...}'를 이른다. 본문에 대해, 成玄英은 人生在於襁褓而亡/謂之殤子, '{...}'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短命者也//或云/年十九以下爲殤, '{...}'라고 하였다. ◈ 彭祖는 사람 이름이다. 顓頊의 후손으로, 7~800년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이다. 이미 「逍遙遊」의 而彭祖乃今以久特聞 부분에서 설명하였었다. ◈ 爲夭의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夭는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釋名》에서는 少壯而死曰夭, '{...}'라고 하였다. 少壯은 '{...}'는 말이다. 夭를 '{...}'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禮記》 「曲禮 上」에서 三十曰壯, '{...}'라고 하였으므로 그렇게 사용하게 된 듯 보인다. ◈ 天地는 체언으로, '{...}'이다. ◈ 天地與我의 與는 '{...}'다. 萬物與我의 與도 그렇다. ◈ 我는 1인칭 대명사로, 莊子를 가리킨다. 아니면 '{...}'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나는 '{...}'라고 번역하였다. ◈ 並은 부사어로, '{...}'다. 《楚辭》 「九章 懷沙」에 古固有不並兮, '{...}'라는 말이 있는데, 王逸은 並을 俱, '{...}'라고 하였다. ◈ 生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萬物은 체언으로, '{...}'이다. ◈ 爲一의 爲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爲一의 一은 체언으로, '{...}'이다. ◈◈ 郭象은 夫以形相對/則大山大於秋豪也//若各據其性分/物冥其極/則形大未爲有餘/形小不爲不足//苟各足於其性/則秋豪不獨小其小而大山不獨大其大矣//若以性足爲大/則天下之足未有過於秋豪也//若性足者爲非大/則雖大山亦可稱小矣//故曰天下莫大於秋豪之末而大山爲小//大山爲小/則天下無大矣//秋豪爲大/則天下無小也//無小無大/無壽無夭/是以蟪蛄不羨大椿而欣然自得/斥鴳不貴天池而榮願以足//苟足於天然而安其性命/故雖天地未足爲壽而與我並生/萬物未足爲異而與我同得/則天地之生又何不並/萬物之得又何不一哉,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物之生也/形氣不同/有小有大/有夭有壽//若以性分言之/無不自足//是故以性足爲大/天下莫大於豪末//無餘爲小/天下莫小於大山//大山爲小/則天下無大//豪末爲大/則天下無小//小大既爾/夭壽亦然//是以兩儀雖大/各足之性乃均//萬物雖多/自得之義唯一//前明不終不始/非有非無//此明非小非大/無夭無壽耳, '{...}'라고 했다. ◈◈ 王先謙은 此漆園所謂齊彭殤也//但如前人所說/則誠虛誕妄作矣//其意蓋謂太山豪末皆區中之一物/既有相千萬於太山之大者/則太山不過與豪末等/故曰莫大於豪末而太山爲小//彭祖殤子/皆區中之一人/彭祖七八百年而亡/則彭祖不過與殤子等/故曰莫壽於殤子而彭祖爲夭//我能與天地無極/則天地與我並生/我不必與萬物相競/則萬物與我爲一也//漆園道術精妙/喚醒世迷/欲其直指最初/各葆眞性//俗子徒就文章求之/止益其妄耳,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王羲之는 「蘭亭序」에다가 固/知一死生爲虛誕/齊彭殤爲妄作, '{...}'라고 하였다. 王先謙이 인용한 말만 보면, 王羲之가 莊子를 작심하고 비판한 듯 보인다. 그러면 「蘭亭序」는 어떤 글일까. 東晉의 永和 9년, 즉 353년에 회계의 蘭亭에 당대의 명사 41명이 會稽의 山陰에 모여서 놀고, 시를 모아 {...} 할 수도 없다. 다만 「蘭亭序」에는 아마도 魏晉 시대 당시에 떠돌던 玄學적, 도피적 풍조가 어느 정도 섞여 있었을 것이다. 王先謙의 비판은 이 점을 고려해서 읽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 既已爲一矣/且得有言乎, ◈ 既已는 부사어로, '{...}'다. 既와 已는 모두 '{...}'라는 말이다. ◈ 爲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 一은 체언으로, '{...}'이다. ◈ 且는 부사어로, '{...}'다. ◈ 得은 可처럼 '{...}'라는 말이다. ◈ 有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言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乎는 {...}다. 따라서 得有言乎는 '{...}'라는 말이 된다. {...}는 말이다. ◈◈ 郭象은 萬物萬形/同於自得/其得一也//已自一矣/理無所言,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何所容其言,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萬物이 {...}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 既已謂之一矣/且得無言乎, ◈ 既已는 부사어로, '{...}'다. 既와 已는 모두 '{...}'라는 말이다. ◈ 謂之一의 謂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謂之一의 之는 아마 {...}을 가리키는 말 같다. ◈ 謂之一의 一은 체언으로, '{...}'이라는 말이다. 王先謙은 謂之一/即是言, '{...}'라고 하였다. ◈ 且는 부사어로, '{...}'다. ◈ 得은 可처럼 '{...}'라는 말이다. ◈ 無는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言은 체언으로, '{...}'을 이른다. ◈ 乎는 {...}다. 따라서 得無言乎는 '{...}'라는 말이 된다. 앞에서 有無에 대해 폈던 논지가 바로 이 문장에서 정리되고 있다. ◈◈ 郭象은 夫名謂生於不明者也//物或不能自明其一而以此逐彼/故謂一以正之//既謂之一/即是有言矣,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玄道冥寂/理絕形聲/誘引迷途/稱謂斯起//故一雖玄統/而猶是名教//既謂之一/豈曰無言乎, '{...}'라고 했다. ◈◈ 孃破案 : 萬物이 하나로 {...} 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 孃破又案 : 뒤에 이어지는 말에서 莊子는 {...} 논증을 맺는 말인 듯하다. [본문으로]
- 一與言爲二/二與一爲三//自此以往/巧曆不能得/而況其凡乎, ◈ 一은 체언으로, '{...}'인데, 여기서 '{...}'란, {...}는 설을 뜻한다. 뒤의 句의 故自無適有以至於三에서는 無로 표현되고 있다. ◈ 一與言의 與는 '{...}'다. 여기서는 '{...}'처럼 보면 좋을 듯하다. 二與一의 與도 그렇다. ◈ 言은 체언으로, '{...}'이다. ◈ 爲二의 爲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원래 {...}는 설이 있었는데, 여기다가 말을 {...}라는 뜻이다. 爲三의 爲 역시 '{...}'는 말이다. ◈ 自는 부사어로, '{...}'다. 此를 받는다. ◈ 此는 爲三을 가리킨다. ◈ 以은 '{...}'다. ◈ 往은 용언으로, 일정하게 '{...}'는 말이다. 自此以往은 {...}는 말일 것이다. ◈ 巧曆은 명사구로, '{...}'을 이르는 말 같다. 巧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曆은 체언으로, 보통 '{...}'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를 뜻한다. 즉, 巧曆은 '{...}'이라는 말이 된다. 《管子》 「海王」에는 此其大曆也, '{...}'라는 말이 있는데, 房玄齡은 曆/數, '{...}'라고 하였다. ◈ 不能은 '{...}'라는 말이다. ◈ 得은 용언으로, '{...}'처럼 해석하면 좋겠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況은 '{...}'다. ◈ 其는 아마 부사어로, '{...}'라는 말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其寐也魂交의 其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凡은 체언으로, '{...}'을 뜻한다. 巧曆과 대조되고 있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郭象은 夫以言言一/而一非言也/則一與言爲二矣//一既一矣/言又二之//有一有二/得不謂之三乎//夫以一言言一/猶乃成三/況尋其支流/凡物殊稱/雖有善數/莫之能紀也//故一之者與彼未殊/而忘一者無言而自一, '{...}'라고 했다. ◈◈ 成玄英은 夫妙一之理/理非所言/是知以言言一而一非言也//且一既一矣/言又言焉//有一有言/二名斯起//覆將後時之二名/對前時之妙一/有一有二/得不謂之三乎//從三以往/假有善巧算曆之人/亦不能紀得其數/而況凡夫之類乎, '{...}'라고 했다. [본문으로]
- 故自無適有以至於三/而況自有適有乎, ◈ 故는 '{...}'다. ◈ 自無의 自는 부사어로, '{...}'다. 無를 받는다. 自有의 自도 그렇다. 有를 받는다. 成玄英은 從, '{...}'라고 했다. ◈ 無는 체언으로, 설이 '{...}'라는 말 같다. {...}를 뜻하는 듯하다. 앞에 나온 一與言爲二의 一과 같다. 「人間世」에서는 虛가 또한 {...}를 표현하는 말로 나온다. ◈ 適은 용언으로, '{...}'는 말이다. 여기서는 '{...}'처럼 보아야 하겠다. 앞의 句에 自此以往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그 往과 같다. 成玄英은 往, '{...}'라고 했다. ◈ 無適有의 有는 체언으로, {...}를 뜻한다. ◈ 以는 '{...}'다. 自無適有를 받는다. ◈ 至는 용언으로, '{...}'는 말이다. ◈ 於는 '{...}'다. ◈ 三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앞에 나온 二與一爲三의 三과 같다. ◈ 而는 역접이다. '{...}'처럼 해석된다. ◈ 況은 '{...}'다. ◈ 有適有의 有들은 체언으로, '{...}'를 이른다. 百家爭鳴을 표현한 말 같다. ◈ 乎는 {...}다. ◈◈ 郭象은 夫一/無言也/而有言則至三//況尋其末數/其可窮乎,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至理無言/言則名起//故從無言以往有言/纔言則至乎三//況從有言往有言/枝流分派/其可窮乎//此明一切萬法/本無名字/從無生有/遂至於斯矣,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無適有는 {...}을 이른다. 모든 것이 {...} 지경이 될 것이다. 《道德經》 42장에서는 道生一/一生二/二生三/三生萬物, '{...}'라고 했다. 莊子의 논증 방식과 {...} 오히려 정반대이다. [본문으로]
- 無適焉/因是已, ◈ 無適焉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처럼 번역하였다. ◈ 無는 부정어다. 適을 한정한다. ◈ 適은 용언으로, 適得而幾矣에서 풀이하였듯, '{...}'처럼 해석된다. 適을 適有라고 한다면, '{...}'라는 말이 되고, 그러면 無適, 즉 無適有는 '{...}'라는 말이 된다. ◈ 焉은 {...}라는 말이다. ◈ 因은 용언으로, '{...}'라는 말이다. ◈ 是는 앞에 나온 一이나 無, 즉 {...}을 가리킨다. ◈ 已는 {...}라는 말이다. ◈◈ 郭象은 各止於其所能/乃最是也, '{...}'라고 하였다. ◈◈ 成玄英은 夫諸法空幻/何獨名言//是知無即非無/有即非有/有無名數/當體皆寂//既不從無以適有/豈復自有以適有耶//故無所措意於往來/因循物性而已矣, '{...}'라고 하였다. ◈◈ 王先謙은 若其無適/惟有因任而已//此舉物之大小人之壽夭並齊之/得因任之妙, '{...}'라고 하였다. ◈◈ 孃破案 : 상기하였듯, 百家를 {...} 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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