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1 - 학이 - 2 - 기위인야효제

2024. 3. 28. 04:08논어 이야기/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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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3월 28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15

 

<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2 - 기위인야효제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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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子曰:

「其為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

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

君子務本,本立而道生。

孝弟也者,其為仁之本與!」

 

 

 

유자가 말했다.(有子曰, ◈ 有子는 孔子의 제자인 有若이다. 《論語》 및 《史記》 「仲尼弟子列傳」, 《孔子家語》 「七十二弟子解」 등에 그 행적이 전한다. 《史記》에는 有若少孔子四十三歲, ‘有若은 孔子 보다 43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다. 《孔子家語》에는 有若/魯人/字子有//少孔子三十六歲/爲人強識/好古道, ‘有若은 魯나라 사람이다. 字는 子有다. 孔子 보다 36살 어렸다. 기억력이 좋았다. 옛 道를 좋아했다’라고 되어 있다. 《史記》에 대해 裴駰은 鄭玄曰魯人, ‘鄭玄은 “魯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司馬貞은 家語云/魯人/字子有/少孔子三十三歲///今此傳云/四十二歲///不知傳誤/又所見不同也, ‘《家語》에는 “魯나라 사람이다. 字는 子有다. 孔子 보다 33살 어렸다”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傳」에는 42살 어리다고 되어 있다. 「傳」이 틀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말이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張守節은 家語云/魯人/字有/少孔子三十三歲///不同, ‘《家語》에는 “魯나라 사람이다. 字는 子有다. 孔子 보다 33살 어렸다”라고 되어 있으니,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家語》는 《孔子家語》를 이른다. 「傳」은 「仲尼弟子列傳」을 이른다. 그런데 《孔子家語》에는 36살 어리다고 되어 있고. 「仲尼弟子列傳」에는 43살 어리다고 되어 있으니, 두 책의 말이 다르다는 점은 맞지만, 司馬貞과 張守節이 인용한 수치는 모두 틀렸으니, 의뭉스럽다. ▼ 何晏은 孔子弟子有若, ‘孔子의 제자인 有若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皇侃은 이 주석을 孔安國의 주석이라고 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는 阮元이 설명해 두었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皇本作/孔安國注//史記/仲尼弟子列傳/有若/少孔子三十三歲///論語邢疏及禮檀弓疏引作/四十三歲//裴駰史記集解引鄭玄云/魯人///此出鄭氏孔子弟子目錄/今佚不傳, ‘皇侃本에는 孔安國의 주석이라고 되어 있다.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有若은 孔子 보다 33살 어리다”라고 되어 있다. 《論語》에 대한 邢昺의 疏 및 《禮》 「檀弓」에 대한 疏에서는 33살이 아니라 43살 어리다고 이 글을 인용해 두었다. 裴駰의 《史記集解》에서는 鄭玄이 “魯나라 사람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두었다. 이 말의 출처는 鄭玄의 《孔子弟子目錄》이지만, 지금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仲尼弟子列傳」에는 有若/少孔子四十三歲, ‘有若은 孔子 보다 43살 어리다’라고 되어 있다. 《禮》 「檀弓」는 《禮記》 「檀弓 上」을 이른다. 疏는 孔穎達의 주석이다. 이 疏는 有子問於曾子云, ‘有子이 曾子에게 물었다’ 부분에 달려 있다. 《孔子弟子目錄》은 《論語孔子弟子目錄》을 이른다. ▼ 邢昺은 史記/弟子傳云/有若少孔子四十三歲///鄭玄曰/魯人, ‘《史記》 「弟子傳」에 “有若은 孔子 보다 43살 어렸다”라는 말이 있다. 鄭玄은 “魯나라 사람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弟子傳」은 「仲尼弟子列傳」을 이른다. ▼ 朱熹는 有子/孔子弟子/名若, ‘有子는 孔子의 弟子로, 이름은 若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阮氏元/論語解/弟子以有子之言似夫子/而欲師之/唯曾子不可彊/其餘皆服矣//故論語次章/即列有子之語在曾子之前///案/曾子不可強/非不服有子也//特以尊異孔子/不敢以事師之禮用之他人//觀曾子但言孔子德不可尙/而於有子無微辭/則非不服有子可知//當時弟子唯有子曾子稱子/此必孔子弟子於孔子沒後/尊事二子如師/故通稱子也//至閔子騫冉有各一稱子/此亦二子之門人所記/而孔子弟子之於二子仍稱字//故篇中於閔冉稱字稱子錯出也, ‘阮元은 《論語解》에서 “제자들이 有子의 말이 夫子와 비슷하였기에, 스승으로 모시려 하였는데, 오직 曾子만 그럴 수 없다고 하였고, 나머지는 모두 有子에게 복종하였다. 그래서 《論語》 두 번째 장에, 有子의 말이 曾子 앞에 있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曾子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이는 有子에게 복종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다만 孔子와 다른 사람을 높이는 일이니, 감히 스승을 모시는 禮를 다른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曾子는 다만 孔子의 德을 尙할 수 없다고 하였고, 有子에 대해 微辭하지는 않았으므로, 曾子가 有子에게 복종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당시 제자들은 오직 有子와 曾子만 子라고 불렀으니, 이처럼 孔子의 제자들은 孔子가 죽은 뒤에 두 子들을 분명 스승처럼 모셨을 것이다. 그래서 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閔子騫, 冉有 역시 각자 한 번씩 子라고 불렸다. 이 역시 閔子騫과 冉有의 문인들이 기록한 말일 것이다. 그러나 孔子의 제자들은 두 子들을 그대로 字로 불렀다. 그래서 글에 閔子騫, 冉有를 字로 부르기도 하고, 子로 부르기도 한 경우가 뒤섞여 등장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論語》 안에서 閔子騫이 閔子라고 지칭된 경우는 「先進」에 한 번 있다. 또, 冉有가 冉子라고 지칭된 경우는 「雍也」와 「子路」에 한 번씩 있다. 그 외의 경우에는 각각 閔子騫이라고 지칭되고, 또 冉有, 혹은 求라고 지칭된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말을 인용할 때 사용한다. 따옴표처럼 사용된다. ◈◈ 邢昺은 此章言孝弟之行也, ‘이 장에서는 孝弟한 행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何晏의 주석인 孔子弟子有若에 대해, 皇本作/孔安國曰/弟子有若也//案/孔子疑孔曰之譌//皇本凡孔曰皆稱孔安國曰, ‘孔子弟子有若이 《皇侃本》에는 孔安國曰/弟子有若也로 되어 있다. 생각해 보건대, 孔子는 孔曰이 잘못된 말이 아닐까 싶다. 《皇侃本》에는 孔曰이 모두 孔安國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도 이 주석은 孔曰/弟子有若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 蜀虎案 : 《史記》 「仲尼弟子列傳」에는 孔子既沒/弟子思慕/有若狀似孔子/弟子相與共立爲師/師之如夫子時也, ‘孔子가 이미 죽었으나, 제자들은 孔子를 그리워했다. 有若은 모습이 孔子와 비슷하여, 제자들이 상의해서 有若을 함께 옹립하고, 스승이라고 간주하였고, 有若을 夫子가 있을 때처럼 모셨다’라는 말이 있다. 이 이후에는 어떤 제자가 有若이 孔子 같지 않다고 조롱하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宋儒들은 孔子의 道가 孔子에서 曾子로, 曾子에서 子思로, 子思에서 孟子로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참고하면, 孔子가 죽은 이후, 孔子의 제자들을 이끌었던 사람은 바로 有若일 것이다. 曾子가 전면에 나선 때는 아마 有若이 물러난 이후일 것이다. 宋儒는 계보에 有若을 언급조차 하지 않는데, 이는 有若과 曾子가 모두 孔子의 제자였지만, 서로 계파가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曾子 이후로, 曾子의 계파가 주류가 되었다고 한다면, 아마 有若과 같이 다른 계파 사람들의 일화는 다소 절하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司馬遷은 모습이 孔子와 비슷했기 때문에 제자들이 有若을 모셨다고 하였지만, 아마 사실이 아닐 것이다.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낸 것도 아니고, 스승처럼 대우했다는데, 생김새가 비슷하다고 스승이라고 대우할 정도로 孔子의 제자들이 천치들이었다면, 당대에 孔子가 존경을 받았을 리 없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有若을 조롱했다는 일화 역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듯하다. 《論語》 「學而」에, 孔子의 말이 첫 번째로 등장하고, 바로 이 두 번째 장에 有子의 말이 등장하는 까닭도, 孔子 사후 有子가 집단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보여 주는 정황적 증거일 수 있겠다.)

 

“그 됨됨이가 효제하다면, 윗사람을 거스르려 하는 경우가 적을 것이다.”(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 ◈ 其는 아마 ‘그’처럼 지시하는 말일 것이다. 其는 ‘그’처럼 지시하는 말로 볼 수도 있고, 若처럼 ‘만약’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지시하는 말이라면 이 句는 ‘그 爲人이 孝弟하다면, 犯上을 好하는 경우는 鮮할 것이다’가 되고, ‘만약’이라면, ‘만약 爲人이 孝弟하다면, 犯上을 好하는 경우는 鮮할 것이다’가 된다. 내 생각에는 둘 다 가능하고, 또 둘 다 타당하다. 내 생각에는 ‘만약’이라고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지만, 其爲人也이 ‘만약 爲人이’가 아니라, ‘그 爲人이’처럼 사용된 예가 다소 있으니, 아마 그 당시에 사용된 표현이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禮記》 「經解」에 入其國/其敎可知也//其爲人也/溫柔敦厚/詩敎也, ‘其 나라에 들어가면, 其 가르침을 알 수 있다. 其 爲人이 溫柔敦厚한 것은 《詩》의 가르침이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述而」에 女奚不曰/其爲人也/發憤忘食/樂以忘憂/不知老之將至云爾, ‘너는 왜 其 爲人이 분발하면 먹을 일도 잊고, 즐거워서 근심도 잊으며, 늙어 간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고 하지 않았느냐’라는 말이 있으며, 《孟子》 「告子 下」에는 其爲人也好善, ‘其 爲人이 善을 好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들에서 其는 모두 ‘그’처럼 지시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단 하나도 ‘만약’이라고 풀이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其爲人也는 당시에 널리 사용되었던 표현이었을 것이고, 본문의 其爲人也孝弟에서 其가 ‘만약’이라고 풀이될 수 있는 까닭은 아마 우연일 것이다. 皇侃은 지시하는 말로 풀이했다. 劉寶楠은 發聲, 즉 ‘말을 시작하는 소리’라고 풀이하였는데, 이렇게 보면 其에는 실질적인 의미가 없게 된다. 끝으로, 其가 若처럼 사용되었다는 증거만 기재해 둔다. 《詩》 「小雅 小旻之什」의 「小旻」에 謀之其臧/則具是違//謀之不臧/則具是依, ‘謀가 其 臧하다면 모두 어기고, 謀가 臧하지 않다면 모두 의지한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文王世子」에 公族其有死罪/則磬于甸人, ‘公族이 其 죽을 죄를 졌다면, 甸人에게 磬한다’라는 말이 있다. 《春秋左氏傳》 「僖公」 9년에 其濟/君之靈也//不濟/則以死繼之, ‘其 濟한다면 君의 靈이다. 濟하지 못한다면 죽음으로 따르겠다’라는 말이 있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23년에 其然/將具敝車而行, ‘其 그렇게 한다면, 이제 敝車를 具해서 行하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其는 모두 ‘만약’이라는 말이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皇侃은 其/其孝悌者也, ‘其는 孝悌한 사람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尙書大傳注/其/發聲也, ‘《尙書大傳》의 주석에 “其는 말을 시작하는 소리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爲人은 명사구로, ‘사람됨’, ‘됨됨이’, ‘태도’를 이른다. 爲는 ‘되다’는 말이고, 人은 ‘사람’이다. 따라서 爲人은 ‘사람이 되는 바’, 즉 ‘됨됨이’, ‘태도’를 뜻한다. ▼ 劉寶楠은 爲人에 대해, 周官/典同注/爲/作也///禮運曰/人者/其天地之德/陰陽之交/鬼神之會/五行之秀氣也///又曰/人者/天地之心也/五行之端也/食味別聲被色而生者也, ‘《周官》 「典同」에 대한 주석에는 “爲는 作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禮運」에는 “사람은 天地의 德이요, 陰陽의 交요, 鬼神의 會요, 五行의 秀氣다”라는 말이 있고, 또 “사람은 天地의 之心이요, 五行의 端이니, 맛을 맛보고, 소리를 분별하며, 色을 입으면서 살아 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周官》 「典同」은 《周禮》 「春官宗伯」의 일부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以爲樂器, ‘樂器를 爲했다’에 붙어 있다. 「禮運」은 《禮記》의 편이다. ◈ 其爲人也의 也는 者와 같은 말이다. 곧, 其爲人也는 其爲人者가 된다. 者는 보통 ‘~라는 것’이나 ‘~하는 것’처럼 해석되지만, 이 글에서는 이 의미를 밝힐 것 없이 其爲人으로만 풀이하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이 也는 이 글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된다. 也가 없어도 其爲人을 명사구로 풀이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其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其爲人也는 당시에 사용구처럼 사용된 표현인 것 같다. 也가 있으면 네 글자가 되어 운율도 맞으므로, 아마 也를 붙여서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면 也를 어떻게 者로 풀이할 수 있을까.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孝弟는 용언으로, 모두 ‘공경하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는 ‘효제하다’라고 음역하였다. 孝는 부모를 ‘공경하다’는 말이고, 弟는 형제처럼 또래 사람들에서부터, 부모가 아닌 연장자 일체를 ‘공경하다’는 말이다. 孝에 대해서는 《說文解字》 「老部」에 孝/善事父母者//从老省/从子//子承老也, ‘孝는 父母를 잘 모신다는 뜻이다. 老가 생략된 글자와 子가 들어 있다. 자식이 노인을 돕고 있는 모양이다’라고 되어 있다. 弟는 悌와 같다. 悌에 대해서는 《說文解字》 「心部」에 悌/善兄弟也//从心弟聲//經典通用弟, ‘悌는 兄弟와 잘 지낸다는 뜻이다. 心이 들어 있고, 弟라고 발음한다. 經典들에는 弟로 통용해 사용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공경하지 않고 부모나 어른을 잘 모실 수 있을까. 없을 것이다. 따라서 孝弟는, 그 대상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공경한다’는 표현임에는 같다. 《說文解字》에서 弟와 悌가 통용되었다고 하였다. 劉寶楠은 悌를 弟의 속자라고 보았다. 이에 따라, 본문의 이 孝弟 역시 판본에 따라 孝悌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皇侃의 《論語集解義疏》에는 孝悌라고 되어 있고, 陸德明 역시 그런 사례가 있다고 언급해 두었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善事父母曰孝/善事兄曰悌也, ‘부모를 잘 모시는 모습을 孝라고 하고, 형을 잘 모시는 모습을 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弟/大計反//本或作悌/下同, ‘弟는 大와 計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悌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弟好/皆去聲, ‘弟와 好는 모두 去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고, 또 善事父母爲孝/善事兄長爲弟, ‘부모를 잘 섬기는 행위를 孝라고 하고, 兄長을 잘 모시는 일을 弟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孝弟者/爾雅/釋訓/善父母爲孝/善兄弟爲友///此文不言友言弟者/友是兄弟相愛好/此則專指爲人弟者/不兼兄言也//賈子/道術云/子愛利親謂之孝/反孝爲孽/弟敬愛兄謂之悌/反悌爲敖///悌即弟俗體//論語釋文云/弟本作悌///皇本/高麗本/亦作悌/並從俗作也, ‘孝弟에 대한 풀이다. 《爾雅》 「釋訓」에 “父母에게 잘하는 일을 孝라고 하고, 兄弟에게 잘하는 일을 友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 본문에는 友가 아니라 弟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友는 兄弟끼리 서로 아끼고 좋아한다는 말이니, 이 글에서는 동생만 지칭하고, 형은 의미하지 않는다 볼 수 있겠다. 《賈子》 「道術」에는 “자식이 부모를 아끼고 편리하게 하는 일, 이를 孝라고 한다. 孝의 반대를 孽이라 한다. 동생이 형을 공경하고 아끼는 일, 이를 悌라고 한다. 悌의 반대는 敖다”라고 하였다. 悌는 곧 弟의 속자체다. 《論語釋文》에는 “弟는 판본에 따라 悌로 되어 있기도 하다”라고 되어 있다. 《皇侃本》, 《高麗本》에도 悌로 되어 있으니, 모두 속자를 좇아 그렇게 쓴 것이다’라고 하였다. 《賈子》는 賈誼의 《新書》다. 《論語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 중 《論語》에 대한 부분을 이른다. 《經典釋文》에는 弟/大計反//本或作悌/下同, ‘弟는 大와 計의 반절로 읽는다. 판본에 따라 悌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되어 있다. ◈ 而好犯上者의 而는 ‘그러면’이다. 則과 같다. 즉, 其爲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는, ‘그 됨됨이가 孝弟하다면, 上을 犯하기를 好하는 경우가 적다’라는 말이 된다. 而를 역접으로 보고, ‘~한데도’, ‘그런데도’처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됨됨이가 孝弟한데도 上을 犯하기를 好하는 경우는 적다’라는 말이 된다. 나는 ‘그러면’으로 번역하였다. 그러면 而를 어떻게 則이라고 풀이할 수 있을까.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士妾에게 자식이 있으면 삼베로 만들고, 자식이 없으면 그만 둔다’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則先死者/非父則母/非兄而姒也, ‘그러면, 먼저 죽는 사람은, 아비가 아니면 어미이고, 형이 아니면 姒다’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楚나라와 함께하면 漢나라를 깨뜨리고, 漢나라와 함께하면 楚나라를 깨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그러면’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즐거우면 天下가 어우러지고, 빡치면 暴亂한 자들이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출사할 만하면 출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久할 만하면 久하고, 速할 만하면 速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好는 용언으로, ‘좋아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犯上을 받는다. 즉, 好犯上은 ‘犯上하기를 좋아하다’라는 말이 된다. 皇侃은 ‘마음이 바란다’라고 풀이하였는데, 나는 마음에 든다. ▼ 皇侃은 好/謂心欲也, ‘好는 마음이 바라는 바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好/呼報反/下及注同, ‘好는 呼와 報의 반절로 읽는다. 아래의 글 및 주석에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弟 부분에 인용해 둔 바와 같이, 好를 去聲으로 읽는다고 하였다. ▼ 劉寶楠은 皇疏云/好/謂心欲也, ‘皇侃은 “好는 마음이 바라는 바를 뜻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犯은 용언으로, ‘거스르다’, ‘거역하다’, ‘어기다’, ‘깝치다’는 말이다. 즉, 犯上은 ‘上을 거스르다’, ‘上을 어기다’, ‘上을 거역하다’는 말이 된다. 《禮記》 「檀弓 上」에 事親有隱而無犯, ‘부모를 모실 때에는 隱하는 경우는 있어도 犯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無犯/不犯顏而諫, ‘無犯은 안색을 犯하지 않고 간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犯은 ‘거스르다’는 말이다. 《墨子》 「經 上」에 罪/犯禁也, ‘罪는 禁을 犯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犯은 ‘어기다’는 뜻이다. 犯法이라는 말도 있는데, 이 犯 역시 ‘어기다’는 말이다. 한편, 皇侃은 ‘諫爭하다’라고 풀이하였고, 皇侃이 인용한 熊埋 역시 비슷하게 풀이하고 있다. 孝弟는 ‘공경스럽다’는 말이니, 이는 곧 잘 ‘복종한다’, ‘종순한다’는 말이다. 사람됨이 그렇다면, 간언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강경하게 간하려, 즉 諫爭하려 들지 않고, 윗사람의 기색을 살핀 뒤 이를 거스르려 하지 않을 수 있겠다. 나는 이를 취하지 않지만,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劉寶楠은 ‘이기다’, ‘침범하다’라고 풀이했는데, ‘이기다’는 말은 ‘깝치다’는 말과 같다. ▼ 皇侃은 犯/謂諫爭也, ‘犯은 간쟁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邢昺은 皇侃의 풀이가 何晏의 주석에 위배되기 때문에 틀렸다고 생각했다. 이 말은 上 부분에 인용해 두었다. ▼ 朱熹는 犯上/謂干犯在上之人, ‘犯上이란, 위에 있는 사람을 거스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犯/勝也///說文/犯/侵也, ‘《爾雅》 「釋詁」에는 “犯은 이기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說文》에서는 “犯은 침범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爾雅》 「釋詁」에는 犯/奢/果/毅/剋/捷/功/肩/堪/勝也, ‘犯, 奢, 果, 毅, 剋, 捷, 功, 肩, 堪은 이기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犯은 「犬部」에 기재되어 있다. ◈ 上은 체언으로, ‘윗사람’이다. 아마 작게는 부모나 연장자부터, 멀리는 군주나 天子까지, 모든 사람을 이를 것이다. ▼ 何晏은 上/謂凡在己上者, ‘上은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何晏의 주석에 대해, 凡者/總舉之辭, ‘凡에 대한 풀이다. 凡은 전부를 거론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上/謂君親也, ‘上은 군주나 부모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皇氏熊氏以爲上謂君親/犯謂犯顏諫爭//今案注云/上/謂凡在己上者///則皇氏熊氏違背注意/其義恐非也, ‘皇侃과 熊安生은 “上은 군주와 부모를 이르고, 犯은 안색을 범하면서 간쟁하는 일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살펴 보건대, 주석에서는 “上은 자기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皇侃과 熊安生의 풀이는 주석의 의미에 어긋나니, 그 해석이 아마 틀린 듯하다’라고 하였다. 나는 皇侃의 풀이가 타당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그런데, 皇侃이 인용한 사람은 蕭梁 사람 熊埋이지, 北周 사람 熊安生이 아니다. ▼ 朱熹는 犯에 대한 주석에서, 上을 在上之人,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풀이하였다. ▼ 劉寶楠은 上者/謂凡在己之上者//蔡邕/獨斷/上者/尊位所存也///亦謂位在己上, ‘上에 대한 풀이다. 上은 자기 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이른다. 蔡邕은 《獨斷》에서 “上은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자기 윗자리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獨斷》에는 存이 在로 되어 있다. ◈ 好犯上者의 者는 ‘~한 것’, ‘~한 경우’,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관형어절인 好犯上을 받는다. 즉, 好犯上者는 ‘윗사람을 거스르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된다. ◈ 鮮은 용언으로, ‘드물다’, ‘적다’는 말이다. 고대에는 이런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다. 《爾雅》 「釋詁」에 希/寡/鮮/罕也, ‘希, 寡,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大學」에 好而知其惡/惡而知其美者/天下鮮矣, ‘좋아하면서도 결점을 알고, 싫어하면서도 장점을 아는 경우는 세상에 鮮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鮮/罕也,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禮記》 「中庸」에는 民鮮能/久矣, ‘사람들이 鮮하게 할 수 있게 된 것이 오래 되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과 孔穎達은 모두 鮮/罕也,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예시가 또 있다. 《詩》 「國風 鄭風」의 「揚之水」에 終鮮兄弟, ‘끝내 형제가 鮮하게 되어’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鮮/寡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劉寶楠은 尟이 본래 글자이고, 鮮은 尟의 가차자일 것이라고 하였는데, 참고할 만하다. ▼ 何晏은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何晏의 주석에 대해 劉寶楠은 說文/少/不多也, ‘《說文》에서는 “少는 많지 않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少는 「小部」에 기재되어 있다. ▼ 皇侃도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鮮/仙善反/少也//鄭云/寡也///下同, ‘鮮은 仙과 善의 반절로 읽는다. 적다는 뜻이다. 鄭玄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釋詁云/鮮/罕也///故得爲少, ‘「釋詁」에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래서 少라고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詁」는 《爾雅》 「釋詁」를 이른다. 「釋詁」에는 希/寡/鮮/罕也, ‘希, 寡, 鮮은 드물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 朱熹는 鮮/上聲/下同, ‘鮮은 上聲으로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고, 또 鮮/少也,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鮮者/鄭注云/鮮/寡也///此本/爾雅/釋詁//說文/尟/是少也///尟是正字//鮮/魚名/出貉國/叚借字, ‘鮮에 대한 풀이다. 鄭玄은 주석에서 “鮮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爾雅》 「釋詁」에 근거한 말이다. 《說文》에는 “尟은 이처럼 적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尟가 正字다. 鮮은 본래 물고기의 이름으로, 貉國에서 나온다. 가차자로 사용되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尟은 「是部」에 기재되어 있다. ◈ 矣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 何晏은 言孝弟之人必恭順/好欲犯其上者少也, ‘孝弟한 사람은 분명 공경스러우니, 그런 사람들 중 자기 윗사람을 범하고자 하기를 좋아하는 경우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의 恭順에 대해, 恭順者/說文/恭/肅也///釋名/釋言語/順/循也/循其理也///注以犯上則非恭順/故人能孝弟/必恭順於上也//丘光庭兼明書/以犯上爲干犯君上之法令/亦此注義所括, ‘恭順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서는 “恭은 엄숙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釋名》 「釋言語」에는 “順은 좇다는 말로, 이치를 좇는다는 말이다”라고 되어 있다. 주석에서는 犯上하면 恭順하지 못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반대로, 사람이 孝弟할 수 있다면 분명 윗사람에게는 恭順할 것이다. 丘는 정무에도 밝고, 글도 잘 알았으니, 犯上하는 짓을 君上의 법령을 어지럽히는 짓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의미 역시 이 주석이 포괄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恭은 「心部」에 기재되어 있다. ◈◈ 皇侃은 言孝悌之人/必以無違/爲心以恭/從爲性/若有欲犯其君親之顏諫爭者/有此人/少也//然孝悌者/實都不欲必無其人/而云少者//欲明君親有過/若任而不諫/必陷於不義/不欲存孝子之心//使都不諫/故開其少分/令必諫也//故熊埋云/孝悌之人/志在和悅/先意承旨//君親有日月之過/不得無犯顏之諫/然雖屢納忠規/何嘗好之哉//今實都無好而復, ‘孝悌한 사람은 절대 거스르지 않고, 공경심을 품고 있으며, 자신의 性을 따르니, 자기 군주나 부모와, 그 안전에서 간쟁하려 하는 자는 이런 경우엔 적다는 뜻이다. 그러나 孝悌한 사람이라도 꼭 그런 경우가 없다고 할 수는 없으니, 그래서 “적다”라고 한 것이다. 군주나 부모에게 잘못이 있을 때, 이런 상황을 맞이하여 간언하지 않으면, 결국 불의한 상황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孝子의 마음을 存하려 하지 않고, 모조리 간언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에 일부를 開하여, 꼭 간언하라고 分令하게 된다. 이에 대해 熊埋는 “孝悌한 사람은 그 심지가 따뜻하니, 먼저 뜻을 받들려 한다. 군주나 부모에게 日月 같은 잘못이 있어서, 안전에 직접 간하지 않을 수가 없다면, 비록 여러 차례 간언을 올리더라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 모두 好하지 않고 復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皇侃은 또 以好見聞/則生陵犯之慚以犯//見塞則抑匡弼之心/必宜微有所許者/實在奬其志/分稱論敎體也//故曰/而好犯上者/鮮矣, ‘보고 듣기를 좋아하면, 陵犯하는 慚이 생겨서 犯하게 된다. 견문이 막히면, 보좌하고자 하는 마음을 抑하여서 꼭 미묘하게 허락하는 바가 있게 된다. 실로 그 심지를 장려하여, 論敎의 대체를 分稱하는 것이다. 그래서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적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弟子有若曰/其爲人也/孝於父母/順於兄長/而好陵犯凡在己上者/少矣///言孝弟之人/性必恭順/故好欲犯其上者少也, ‘제자 有若은 “사람됨이 부모에게는 孝하고, 兄長에게는 온순한데도, 자신 보다 위에 있는 사람을 陵犯하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적다”라고 하였다. 孝弟한 사람은, 그 성품이 분명 공손하고 순할 것이기에, 자기 윗사람을 범하길 좋아하는 경우가 적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此言人能孝弟/則其心和順/少好犯上/必不好作亂也, ‘이 말은, 사람이 孝弟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은 和順할 것이므로, 윗사람을 거스르기를 좋아하는 경우는 적을 것이요, 문제를 일으키기는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時世敎衰/民知德者鮮/故孝弟之人容有犯上/故云鮮也, ‘그 당시 교화가 쇠하여서, 백성들 중 똑똑하거나 덕망이 있는 자가 적었으므로, 上을 犯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孝弟한 사람은 이를 용인하였었다. 그래서 본문에서 “드물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본문의 其爲人也孝弟에 대해, 皇本/弟作悌/注及下竝同//案釋文出孝弟云/本或作悌/下同, ‘《皇侃本》에는 弟가 悌로 되어 있다. 주석 및 이후의 본문에서도 모두 그렇다. 살펴 보니, 《釋文》에서는 孝弟에 대해 “판본에 따라 悌로 되어 있기도 하다. 아래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 何晏의 주석 중 必恭順에 대해, 皇本/必下有有字, ‘《皇侃本》에는 必 다음에 有가 있다’라고 하였다. ▼ 何晏의 주석 중 謂凡在己上者에 대해, 皇本/下有也字//北監本/上字空闕, ‘《皇侃本》에는 끝에 也가 있다. 《北監本》에는 上이 빠져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상기하였듯, 孝弟라는 말은 ‘공경스럽다’라는 말이다. 恭敬은 곧 恭順이고, 恭順은 곧 從順이다. 쉽게 말해, 부모의 말을 잘 따르는 일이 孝다. 부모의 태도가 불합리하거나, 義롭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도 부모를 잘 따라야 한다. 舜의 부모와 동생은 온갖 방법으로 舜을 괴롭히다가, 끝내는 舜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舜은 부모를 잘 봉양하고, 동생과도 잘 지냈다. 孝弟라는 관념을 舜처럼 잘 보여 주는 사례는 또 없을 것이다. 「學而」 뒷쪽 이야기 중에, 부친이 죽은 뒤 三年無改於父之道/可謂孝矣, ‘3년 동안 부친의 道를 바꾸지 않으면 孝라고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부친의 道가 옳은지,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孝란, 부친의 道를 고치지 않고 따르는 일이다. 또 《禮記》 「檀弓 上」에 事親有隱而無犯, ‘부모를 모실 때에는 隱하는 바는 있어도 犯하는 바는 없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隱은 숨기거나 덮어 둔다는 말이고, 犯은 부모의 안색을 犯하다, 즉 거스르다는 말이다. 즉, 부모를 모실 때에는 필요에 따라 어떤 일을 숨길 수도 있어야 하지만, 부모의 안색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 이 것이 孝다. 그러면, 부모를 비롯해 윗사람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태도가 孝弟이고, 옳은 방식일까. 그렇지 않다. 부모에 대해선 그러할지라도, 군주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禮記》 「檀弓 上」에 事君有犯而無隱, ‘군주를 모실 때에는 犯하는 경우는 있어도, 隱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이라도 숨기지 말아야 하고, 또 군주의 안색을 거스르더라도 간언해야 할 일이 있다면 간언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論語》 「憲問」에 子路問事君//子曰/勿欺也/而犯之, ‘子路가 군주를 모시는 일에 대해 물었다. 孔子가 대답했다. “속여서는 안 되지만, 犯할 수는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犯 역시 안색을 거스르더라도 간언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皇侃과 熊埋가 犯을 諫爭이라고 풀이한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孝弟는 곧 從順하는 태도를 이른다. 그러나, 이는 부모나, 멀리 보아도 형제 간에 그러해야 한다는 말일 뿐이다. 군주에 대해서는 그래야 한다. 그래서 孔子는 신분상 三桓 보다 낮았음에도, 三桓에게 무조건 복종하지 않고, 義와 禮를 가지고 논쟁하였던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孝弟를, 부모나 형제에 대한 태도로 보지 않고, 군주 등을 넓게 포괄하는 표현이라고 간주한다면, 皇侃이나 熊埋의 설이 더욱 타당해질 것이다. 邢昺은 皇侃이 틀렸다고 하였지만, 나는 이 말이 나온 맥락을 알 수 없으므로, 단언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유자의 말 이어짐>

 

“[그런데] 윗사람을 거스르려 하지 않으면서 문란한 짓을 일으키려는 경우는 없다.”(不好犯上/而好作亂者/未之有也, ◈ 不好의 不은 부정어다. 好를 한정한다. ◈ 好는 용언으로, ‘좋아하다’, ‘바라다’는 말이다. 不好犯上의 犯上을 받는다. ◈ 犯은 용언으로, ‘거스르다’, ‘어기다’는 말이다. 犯上의 上을 받는다. ◈ 上은 체언으로, ‘윗사람’이다. ◈ 而好作亂者의 而는 ‘그러면서’, ‘그리고’, ‘~하면서’라고 해석된다. 즉, 不好犯上/而好作亂은 ‘犯上하기를 好하지 않으면서 作亂하기를 好한다’는 말이 된다. 이 而는 앞 句의 而처럼 則으로 해석되지 않는다. 앞의 句에는 其爲人也孝弟가 而 앞에 있어서 而를 則으로 해석하는 편이 자연스러웠지만, 이 경우는 而 앞의 不好犯上과 뒤의 好作亂가 형식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러면서’처럼 해석해야 자연스럽다. ◈ 作은 용언으로, 아마 ‘일으키다’, ‘만들다’라는 말일 것이다. 發作, 著作, 動作, 作爲의 作들이 모두 이러한 의미다. 어떤 행동을 ‘하다’, ‘일으키다’, ‘만들다’ 따위의 뜻이다. 作亂의 亂을 받는다. 즉, 作亂은 ‘亂을 일으키다’는 말이 된다. 作亂이라는 표현은 고대에 자주 사용되었던 것 같다. 《史記》 「周本紀」에 子朝之徒復作亂, ‘王子 朝의 패거리가 다시 作亂하였다’라는 말이 있고, 「秦本紀」에는 徐偃王作亂, ‘徐나라의 偃王이 作亂하였다’라는 말이 있으며, 《韓非子》 「外儲說 左下」에는 尼欲作亂, ‘尼가 作亂하려 한다’라는 말이 있고, 「難 二」에는 桀紂作亂, ‘桀과 紂가 作亂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이 외에도 사례는 아주 많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은 亂 앞에 作을 자주 붙여 사용하였다. ▼ 劉寶楠은 爾雅/釋言/作/爲也, ‘《爾雅》 「釋言」에 “作은 爲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言」에는 作/造/爲也, ‘作, 造는 爲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 亂은 체언으로, ‘난’, ‘문란한 짓’, ‘소란스러운 짓’, ‘어지럽히는 짓’, 질서를 ‘흐트리는 짓’을 이를 것이다. 우리는 군사적인 ‘반란’을 보통 亂이라고 하지만, 본문의 亂은 문맥상 ‘반란’이나 ‘반역’처럼 풀이할 수 없다. ▼ 朱熹는 作亂/則爲悖逆爭鬥之事矣, ‘作亂은 깽판을 치고, 싸움을 벌이는 짓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左/宣/十二年傳/人反物爲亂///十五年傳/民反德爲亂, ‘《左》 「宣」 12년에 대한 傳에 “사람이 物에 反하는 짓을 亂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고, 15년의 傳에는 “백성들이 德에 反하는 짓을 亂이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左》 「宣」은 《春秋左氏傳》 「宣公」이다. 「宣公」 12년에는 人反物爲亂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 好作亂者의 者는 ‘~한 경우’다. 관형어절인 好作亂을 받는다. 즉, 好作亂者는 ‘亂을 作하기를 好하는 경우’가 된다. ◈ 未之有는 ‘있지 않다’, 즉 ‘없다’는 말이다. 未는 부정어다. 有를 한정한다. 未之有의 之는 의미 없는 조사인 것 같다. 有는 용언으로, ‘있다’, ‘존재하다’는 말이다. 즉, 未之有는 未有와 같은데, 未有는 ‘있지 않다’, ‘존재하지 않다’는 말이므로, 곧 ‘없다’는 뜻이 된다. 未之有라는 표현은, 앞에 나온 其爲人也처럼, 당시 사람들이 자주 사용했던 표현이다. ◈ 也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 皇侃은 熊埋曰/孝悌之人當不義而諍之/尙無意犯上/必不職爲亂階也///侃案/熊解意是言既不好犯上必不作亂/故云未之有也//然觀熊之解/乃無閒然/如爲煩長//既不好犯上/理宜不亂/何煩設巧明//今案/師說云/夫孝者/不好心自是/恭順/而又有不孝者/亦有不好是/願君親之敗//故孝與不孝同//有不好而不孝者/不好必欲作亂/此孝者不好必無亂理/故云/未之有也, ‘熊埋는 “孝悌한 사람은 불의한 상황을 마주하면 간쟁한다. 오히려 윗사람에게 간쟁할 뜻이 없다면, 분명 자기 직무도 이행하지 않을 것이요, 언젠가 난을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熊埋는 이미 윗사람을 범하지 않는다면,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니, 그래서 “있던 적이 없다”라고 하였다는 식으로 풀이하였다. 그런데 熊埋의 풀이를 보면,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글이 번잡하게 길다. 이미 윗사람을 범하길 좋아하지 않는다면, 이치상 마땅히 문제도 일으키지 않을 것인데, 왜 굳이 번거롭게 설명하였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내 스승께서는 “孝한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바를 따르지 않고, 공손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不孝한 사람도 마찬가지로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르지 않고, 군주나 부모를 願하는 폐단을 일으킨다. 따라서 孝한 사람이나, 不孝한 사람이나 똑같다”라고 하셨다. 만약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따르지도 않고, 孝하지도 않은 사람이 있다고 하면, 문제를 일으키기를 분명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듯 孝한 사람은 절대 이치를 어지럽히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므로, 이에 본문에서 “있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熊埋의 의견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熊埋는 사람이 孝悌하다면 犯上을 무릅쓰고 일을 바로잡으려 들 것이요, 만약 그럴 생각이 없다면, 오히려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본문의 의미와는 상반된다. 皇侃은 熊埋가 본문의 내용과 정합되게 풀이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고 하니, 의뭉스럽다. ◈◈ 邢昺은 既不好犯上/而好欲作亂爲悖逆之行者/必無//故云未之有也, ‘이미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분란을 일으키는 짓이나 패륜적인 짓을 즐겨 하고자 하는 경우는 분명 없을 것이다. 그래서 未之有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氏는 孝弟/順德也//故不好犯上/豈復有逆理亂常之事, ‘孝弟는 德을 따르는 일이다. 따라서 윗사람을 거스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찌 이치를 거슬러서 일상적인 일들을 또 어그러뜨리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朱熹의 《論語集註》에 程子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는데, 程顥의 말인지, 程頤의 말인지 알 수가 없어서 程氏라고만 기재해 두었다. ◈◈ 劉寶楠은 作亂之人/由於好犯上/好犯上/由於不孝不弟//故古者敎弟子就外舍/學小藝焉/履小節焉//束發就大學/學大藝焉/履大節焉//皆令知有孝弟之道//而父之齒隨行/兄之齒雁行/朋友不相踰//又令知事長上處朋友之禮//故孝弟之人鮮有犯上//若不好犯上而好作亂/知爲必無之事//故曰/未之有也///曾子立孝云/是故未有君而忠臣可知者/孝子之謂也//未有長而順下可知者/弟弟之謂也//未有治而仕可知者/先修之謂也//故曰孝子善事君//弟弟善事長//君子一孝一弟可謂知終矣///是言孝弟之人必爲忠順下/而不好犯上/不好作亂可無疑矣//春秋之時/學校已廢/卿大夫多世官/不復知有孝弟之道/故事君事長/鮮克由禮//而亂臣賊子/遂至接踵以起也, ‘亂을 일으키는 놈들은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윗사람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놈들은 不孝하고 不弟한 데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옛 사람들은 자제들이 外舍에 나아가서 小藝를 배우고, 小節을 실천하라고 가르쳤으며, 머리를 묶을 나이가 되면 大學에 나아가서 大藝를 배우고, 大節을 실천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 모두 孝弟의 도리를 깨우치도록 한 일들이다. 그런데 부친의 나이는 앞서 가고, 형의 나이는 함께 가며, 朋友는 서로 踰하지 않으니, 이는 또 長上을 모시는 방법과 朋友와 지내는 禮를 깨우치도록 한 일들이다. 그러므로 孝弟한 사람은 犯上한 경우가 적은 것이다. 만약 犯上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作亂은 절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겠다. 그래서 본문에서 “있던 적이 없다”라고 한 것이다. 「曾子立孝」에 “그러므로, 君이 없어도 忠臣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면, 이를 孝子라 하고, 어른이 없어도 順下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면, 이를 弟弟라 하며, 治가 없는데도 출사하려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면, 이를 先修라고 한다. 그러므로 孝子가 군주를 잘 섬긴다고 하고, 弟弟가 어른을 잘 모신다고 하는 것이다. 君子는 孝하기도 하고, 弟하기도 하니, 終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孝弟한 사람이 반드시 忠을 행하고, 順下하며, 犯上을 좋아하지도 않고, 作亂을 좋아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春秋時代 때는 학교가 이미 문을 닫고, 卿과 大夫는 여러 차례 세습을 거치면서, 다시 孝弟의 道를 깨우치지 않았다. 그래서 군주와 어른을 모실 때, 禮法을 따라 모시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亂臣賊子들은 갖가지 사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마침내 일어나고 만 것이다’라고 하였다. 「曾子立孝」는 《大戴禮記》의 편이다. ◈◈ 蜀虎案 : 앞에서는 됨됨이가 孝弟하다면, 대부분 윗사람을 거스르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이 부분에서는, 윗사람을 거스르려 하지 않으면서 문란한 짓을 일으킬 사람은 없다고 하고 있다. 수학적으로 생각하자면, 孝弟한 사람과 好犯上한 사람은 교집합이 조금 있지만, 不好犯上한 사람은 好作亂한 사람과 교집합이 없다는 뜻이다. 不好犯上한 사람의 집합은 好犯上한 사람의 여집합이라는 점에 주의하자. 그러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그림1] 즉, 有子의 말만 가지고 본다면, 孝弟하다고 꼭 好作亂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孝弟하면서 好作亂한 사람도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孝弟란, 곧 從順한 태도다. 태도가 從順한데, 禮法을 어지럽히거나 질서를 흐트리는 짓을 하려 하겠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상식적 전제’에 근거하여, 孝弟한 사람과 好作亂한 사람의 교집합이 완전히 비어 있다고 간주할 수 있겠다. [그림2] [그림3] 따라서, 됨됨이가 孝弟하다면, 好犯上한 경우는 존재하더라도, 好作亂한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好犯上이라는 말은, ‘윗사람에게 대든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皇侃이나 熊埋처럼 ‘윗사람을 거스르기를 무릅쓰고 諫爭한다’처럼 풀이할 수도 있다. 맞춰 보자면, 아마 孝弟하면서도 好犯上한 경우, 즉 이 둘의 교집합은 이러한 부류일 것이다. 그러나 好作亂은 어떤 식으로 보아도 긍정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즉, 단순하게 생각해, 나쁜 정도를 생각하면, 好犯上이 낮고, 好作亂이 높다. 즉, 有子의 이 말은 孝弟하기로 열심히 수양하면, 적어도 好作亂하게 되지는 않는다는 뜻이니, 그러한 의미에서 孝弟는 ‘제 1의 전제’이고, 이를 고루하게 표현하면 本, 즉 ‘근본’이 된다. 이 뒤에서 有子는 君子務本/本立而道生이라고 하는데, 이 本이 바로 孝弟이며, 또 그 뒤에서 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라고 하는데, 이 때 孝弟를 本이라고 한 까닭 역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유자의 말 이어짐>

 

“[이처럼 효제는 문란한 짓을 벌이지 않을 근본적인 전제다. 그러므로] 군자는 근본에 힘쓴다. 근본이 바로 서면, 덕행이 배어 나오게 된다.”(君子務本/本立而道生, ◈ 君子는 체언으로, ‘군자’다. ◈ 務는 용언으로, ‘힘쓰다’, ‘노력하다’는 말이다. 務本의 本을 받는다. ▼ 皇侃은 務/猶向也/慕也, ‘務는 향하다, 그리워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務/專力也, ‘務는 한 가지에 힘을 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說文曰/務/趣也///高誘/呂氏春秋/孝行覽注/務/猶求也, ‘務本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 “務는 향하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呂氏春秋》 「孝行覽」에 대한 高誘의 주석에서는 “務는 求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務은 「力部」에 기재되어 있다. 「孝行覽」의 「孝行」을 이른다. 이 주석은 務其人也, ‘其人에 務한다’에 붙어 있다. ◈ 本은 체언으로, ‘근본’이다. 이 本은 바로 孝弟를 이른다. 앞의 句에서 설명하였듯, 孝弟하면, 好犯上하는 경우는 있어도, 好作亂하지는 않게 된다. 따라서 孝弟는 소위 ‘못된 짓’을 벌이지 않기 위해 수양해야 할 ‘근본적 덕목’이다. ▼ 何晏은 本/基也, ‘本은 기초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注訓基者/說文/基/牆始也///始亦本也, ‘주석에서는 本을 基라고 풀이했다. 《說文》에는 “基는 담장이 시작되는 부분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始 역시 本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基는 「土部」에 기재되어 있다. ▼ 皇侃은 本/謂孝悌也, ‘本은 孝悌를 이른다’라고 하였고, 또 務本에 대해 孝悌者既不作亂/故君子必向慕之也, ‘孝悌한 사람은 이미 문제를 일으키지 않으니, 이에 君子도 그런 사람을 반드시 그리워할 것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의 풀이가 특이하다. ▼ 朱熹는 本/猶根也, ‘本은 根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根은 ‘뿌리’다. ▼ 劉寶楠은 說文/本/木下曰本//從木/一在下///一在下/象其根, ‘《說文》에는 “本에 대해,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本이라 한다. 木이 들어 있고, 一이 木 아래에 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一이 아래에 있다는 말은, 뿌리의 모습을 본땄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本은 「木部」에 기재되어 있다. ◈ 本立의 本 역시 체언으로, ‘근본’이다. 이 本은 立의 주어다. ◈ 立은 용언으로, ‘정립되다’, ‘바로 서다’, ‘확립되다’는 말이다. 本이 孝弟를 뜻하므로, 立을 修처럼 ‘수양되다’, ‘닦이다’라고 의역할 수도 있겠다. ▼ 劉寶楠은 李賢/後漢/郎顗傳注/立/猶定也, ‘《後漢》 「郎顗傳」에 대해 李賢은 “立은 定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後漢》 「郎顗傳」은 《後漢書》 「郎顗襄楷列傳 下」를 이른다. 李賢은 唐나라의 章懷太子인 李賢을 이른다. 이 주석은 主名未立, ‘名에 主하였지만 立하지 못했다’에 달려 있다. ◈ 本立而道生의 而는 ‘그러면’이다. 則과 같다. 즉, 本立而道生은 ‘本이 立하면 道가 生한다’라는 뜻이 된다. 而가 則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앞에 나온 而好犯上者의 而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道는 체언으로, 아마 ‘仁義’, ‘德行’, ‘올바른 품행’이라는 말일 것이다. 본문의 내용이 그러하다. 孝弟하면 好作亂하지 않게 되니, 곧 ‘못된 짓’을 벌이지 않게 된다. 못된 짓을 벌이지 않으니, 그 품행은 바로잡힐 것이다. 그래서 ‘德行’인 것이다. 君子는 本, 즉 孝弟하기로 노력하니, 本이 立하면, 즉 孝弟한 태도를 분명하게 갖추면, 道가 生하는데, 바로 이 道가 ‘德行’이요, 生이 ‘하게 된다’는 말일 것이다. 즉, 道生은 ‘행동을 올바르게 하게 된다’는 뜻이다. 《禮記》 「樂記」에 君子樂得其道/小人樂得其欲, ‘君子가 樂하면 道를 得하고, 小人이 樂하면 欲을 得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道/謂仁義也//欲/謂邪淫也, ‘道는 仁義로운 행위를 이르고, 欲은 못된 짓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 뜻이다. 본문의 道는 형이상학적인 ‘이치’로서의 ‘道’로 풀이해서는 안 된다. 이 글은 짧으나마 줄거리가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 그에 따라 풀이해야 한다. 皇侃은 ‘행위에 대한 법도’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 가장 타당하다. 邢昺은 ‘도덕’이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타당하다. ▼ 주석을 참고하면, 皇侃은 道를 諸行之道, ‘행동거지들의 법도’라고 풀이하였다. ▼ 주석을 참고하면, 邢昺은 道를 道德, ‘도덕’이라고 풀이했다. ▼ 劉寶楠은 道者/人所由行之路/事物之理/皆人所由行/故亦曰道//漢書/董仲舒傳/道者/所由通於治之路也///是也, ‘道라는 것은 사람들이 의지해서 따르는 길이요, 사물의 이치이니, 모두 사람들이 근거하여 따르는 바이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道라고 한 것이다. 《漢書》 「董仲舒傳」에 “道는 다스릴 때 의지하는 길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이런 뜻이다’라고 하였다. ◈ 生은 용언으로, ‘생겨나다’는 말이다. 劉寶楠은 ‘나오다’라고 풀이했는데, 이 역시 타당하다. 나는 德行이 ‘배어 나오다’라고 번역하였다. ▼ 劉寶楠은 廣雅/釋詁/生/出也, ‘《廣雅》 「釋詁」에 “生은 나오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何晏은 基立而後可大成, ‘기초가 세워진 뒤에야 대성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이 주석에 대해 人以孝爲基/故諸衆德悉爲廣大也, ‘사람이 孝에 기초하면, 이에 그 사람의 온갖 德들이 모두 광대해진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이 주석에 대해, 大成者/大猶廣也//訓生爲成/此引申之義, ‘大成에 대한 풀이다. 大는 廣과 같다. 주석에서는 生을 成으로 풀이했는데, 의미를 확장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此亦有子語也, ‘이 역시 有子의 말이다’라고 하였고, 또 解所以向慕本義也//若其本成立/則諸行之道悉滋生也, ‘君子가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는 근본적 까닭에 대해 풀이하는 말이다. 만약 그 本이 제대로 서면, 행동거지들의 법도도 모두 이에 따라 생겨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是故君子務脩孝弟/以爲道之基本//基本既立/而後道德生焉, ‘이런 까닭에, 君子는 孝弟하기로 수양하고, 이를 道의 기초라고 생각한다. 기초가 이미 확립되었다면, 그런 뒤에 道德이 생겨난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言君子凡事專用力於根本/根本既立/則其道自生//若上文所謂孝弟/乃是爲仁之本/學者務此/則仁道自此而生也, ‘이 말은 君子가 모든 일에 대해서, 그 근본에 전력을 다한다는 말이요, 일의 근본이 이미 세워졌다면, 그에 대한 道가 저절로 생겨난다는 뜻이다. 위의 글에서 孝弟라고 한 것 같은 말들은 곧 仁을 행하는 근본이므로, 배우는 자가 이러한 바에 힘쓴다면, 仁의 道가 여기에서 생겨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大戴禮/保傅云/易曰/正其本/萬事理///說苑/建本篇/孔子曰/君子務本/本立而道生//夫本不正者末必倚/始不盛者終必衰//詩云/原隰既平/泉流既清//本立而道生///阮氏元/論仁篇/以本立而道生爲古逸詩//愚謂務本二句爲古成語/有子引之//說苑及後漢延篤傳皆作孔子語者/七十子所述皆祖聖論/又當時引述各經未檢原文/或有錯誤故也//中庸言/達道五/君臣父子夫婦昆弟朋友//而父子昆弟猶爲本根之所在//若人能孝弟/則於君臣夫婦朋友之倫/處之必得其宜/而可名之爲道/故本立而道生也, ‘《大戴禮》 「保傅」에는 “《易》에 ‘本을 바로잡으면 萬事가 다스려진다’라는 말이 있다”라는 말이 있고, 《說苑》 「建本」에는 “孔子가 말했다. ‘君子는 本에 務해야 한다. 本이 立하면, 道가 生한다.’ 이처럼, 本이 올바르지 않으면, 末은 반드시 이상해지고, 始가 왕성하지 않으면, 終은 반드시 쇠퇴하게 된다. 《詩》에 ‘언덕과 습지도 이미 평평해졌으니, 샘과 내도 이미 맑아졌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本이 立해야 道가 生하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阮元은 《論仁篇》에서 本立而道生을 고대의 逸詩라고 간주했다. 내 생각은 이렇다. 務本 두 句는 아마 옛 사람들이 쓰던 成語를 有子가 인용한 말일 것이다. 《說苑》과 《後漢》 「延篤傳」에는 모두 孔子의 말이라고 되어 있다. 七十子가 기술한 글들에는 모두 祖聖이 논하였다고 하였다. 아마 당시에, 經들에서 글을 인용하면서 원문을 검증하지 않아, 뒤섞이거나 잘못되었을 것이다. 「中庸」에는 達道 다섯 가지가 나오는데, 이는 君臣, 父子, 夫婦, 昆弟, 朋友 사이의 道다. 그런데 父子와 昆弟에 대한 道에는 근본을 행하는 이치가 있다. 만약 사람이 孝弟를 실천할 수 있다면, 분명 君臣, 夫婦, 朋友의 倫에 대해, 마땅한 도리를 지킬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를 道라고 부를 수 있겠고, 따라서 本이 立하면 道가 生한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戴禮》는 《大戴禮記》다. 《說苑》에 인용된 《詩》는 「小雅 都人士之什」의 「黍苗」다. 《論仁篇》이 어떤 글인지 모르겠다. 逸詩란, 지금의 《詩》에 포함되지 않은 詩를 이른다. 《後漢》 「延篤傳」은 《後漢書》 「吳延史盧趙列傳」을 이른다. 「吳延史盧趙列傳」에는 聖人知之/故曰, ‘聖人은 이를 알았기에, 그래서 말했다’라고 하며 인용되어 있다. 七十子는 아마 孔子의 제자들을 이르는 말 같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何晏의 주석 중 基立而後可大成에 대해, 皇本/成下有也字, ‘《皇侃本》에는 成 다음에 也가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何晏은 기초가 세워진 뒤에 大成할 수 있다고 했는데, 何晏의 말이 당연히 맞기는 하지만, 이 문구의 내용을 세밀하게 담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有子의 말은 孝弟하면, 好作亂하는 일이 없게 된다, 즉 ‘못된 짓’을 벌이지 않게 된다는 데에 초점이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道生 역시 ‘올바른 태도를 갖추다’처럼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유자의 말 이어짐>

 

“효제는 아마 인을 실천하는 일의 근본일 것이다.”(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 ◈ 孝弟也者의 也者는 者와 같다. ‘~라는 것’이라는 말이다. 곧, 孝弟也者는 ‘孝弟라는 것’, 아니면 그냥 ‘孝弟’라고만 해도 좋겠다. 也는 者와 같다. 따라서 也者는 者者이고, 이는 곧 者다. 也가 者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앞의 其爲人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其는 아마 부사어로, ‘아마도’일 것이다. 殆와 같다. 《禮記》 「檀弓 上」에 子張病/召申祥而語之曰/君子曰終/小人曰死/吾今日其庶几乎, ‘子張이 병이 나자 申祥을 불러서는 “君子를 보고는 終한다고 하고, 小人을 보고는 死한다고 한다. 내가 지금 君子이기를 其 바랄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는 殆처럼 ‘거의’ 혹은 ‘아마도’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春秋左氏傳》 「隱公」 6년에 善不可失/惡不可長/其陳桓公之謂乎, ‘善을 잃어서도 안 되고, 惡을 키워서도 안 된다고 하는데, 其 陳나라의 桓公을 보고 한 말이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고, 《國語》 「周語」에는 我又章之/懼長及子孫/王室其愈卑乎, ‘우리가 또 그것을 章하면, 子孫에까지 미칠까 걱정된다. 그러면 왕실의 입지가 其 더욱 낮아지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두 글에서 其는 모두 ‘아마도’, ‘거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其와 殆의 의미가 같기 때문에, 두 글자를 붙여서 한 단어처럼 사용한 사례도 있다. 《易》 「繫辭 下」에 顏氏之子/其殆庶幾乎, ‘顏氏의 자제가 其殆 경지에 가깝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其殆는 ‘거의’ 혹은 ‘아마도’라는 뜻이다. 이 문장의 其는 아마 顏氏之子를 가리키는 지시대명사가 아닐 것이다. 其가 지시대명사일 때는 항상 ‘~의’처럼 해석되고, 其 다음엔 체언이 오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그렇지 않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其」에 수록되어 있다. ◈ 爲는 아마 용언으로, ‘실천하다’, ‘행하다’는 말일 것이다. 앞에서 本立而道生이라고 했는데, 本은 孝弟를, 道는 德行을 뜻하였었다. 이 句에서는 이를 다시 설명하면서 孝弟를 爲仁之本, 즉 ‘仁을 실천하는 근본’이라고 한 것이다. 이 풀이가 글의 내용과 합치된다. 邢昺, 朱熹, 程氏, 劉寶楠이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한편, 皇侃은 그냥 仁之本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또, 판본에 따라 爲가 빠져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에는 孝弟가 仁之本, ‘仁의 근본’이 된다. 이 사례는 阮元이 소개해 놓았다. 俞樾은 이에 근거하여서 爲를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 조사로 보았다. 내 생각에는, 爲를 ‘행하다’처럼 보는 편이 낫다. 글 내용에 더 잘 합치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의 내용에 더 잘 합치되고, 조금 덜 합치되고의 차이는 있더라도, 爲仁之本과 仁之本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朱熹는 孝弟가 仁之本이 아니라 爲仁之本이라고 논증해 두었는데, 나는 이 문제가 그 정도로 유가치하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朱熹의 논증이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俞樾은 爲를 의미 없는 조사라고 하면서, 有子之言/本自平實/後人恥事功而虛談心性/於是其說始多矣, ‘有子의 말은 본래 평이하지만 실제적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事功을 부끄러워하여서 心性에 대해서 공론이나 펼쳤으니, 이에 그렇듯 쓸 데 없는 설들이 많아지고 말았다’라고 하였는데, 나도 이 점에 동의한다. ▼ 朱熹는 爲仁/猶曰行仁, ‘爲仁이라는 말은, 仁을 실천한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朱熹는 爲를 行, ‘행하다’로 풀이하였다. ▼ 阮元은 攷文引足利本無爲字, ‘《攷文》에는 《足利本》에 爲가 없다는 점이 인용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爲仁猶言行仁/所謂利仁彊仁者也//下篇/其爲仁矣/不使不仁者加乎其身///克己複禮爲仁///爲仁由己///子貢問爲仁///堂堂乎張也/難與並爲仁///皆是言爲仁//又志於仁/求仁/欲仁/用力於仁/亦是言爲仁也, ‘爲仁은 仁을 행한다는 말과 같다. 利仁이니, 彊仁이니 하는 말과 같다. 뒷편에 “仁을 爲할 때엔 不仁이 자신에게 더해지지 않도록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자신을 극복하고 禮를 復하여 仁을 爲한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仁을 爲할 때에는 자신에 근거한다”라는 말이 있고, “子貢이 仁을 爲하는 일에 대해 물었다”라는 말이 있고, “堂堂하구나, 張이여. 그러나 張과 함께 仁을 爲하기는 어렵도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들에서는 모두 爲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또, “仁에 뜻을 두다”나, “仁을 求하다”, “仁을 欲하다”, “仁에다가 힘을 쓴다”라는 말들이 있는데, 이 역시 爲仁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其爲仁矣/不使不仁者加乎其身은 「里仁」에, 克己復禮爲仁, 爲仁由己는 「顏淵」에, 子貢問爲仁은 「衛靈公」에, 堂堂乎張也/難與並爲仁은 「子張」에 나온다. 志於仁은 「里仁」에, 求仁은 「述而」에, 欲仁은 「述而」와 「堯曰」에 나온다. 用力於仁은 아마 「里仁」의 用其力於仁을 이를 것이다. ▼ 俞樾은 樾謹按/爲字乃語詞//阮氏校勘記曰/足利本無爲字///蓋語詞/無實義/故省之也//其爲仁之本與/猶云其仁之本與//子路篇曰/如有王者/必世而後仁///此所謂仁正與彼同此章之旨//卽孟子所謂/人人親其親/長其長/而天下平者//其爲人也/孝弟則自不至於犯上而作亂/故以爲仁之本//禮記經解篇曰/上下相親謂之仁///卽此仁字之義也//緇衣篇曰/禹立三年/百姓以仁遂焉///所謂仁者/無他/人人親其親/長其長而已//有子之言/本自平實/後人恥事功而虛談心性/於是其說始多矣, ‘爲는 어조사일 것이다. 阮元은 《校勘記》에서 《足利本》에 爲가 없다고 했다. 아마 어조사라서, 실제적인 의미가 없으니 생략하였을 것이다. 즉, 其爲仁之本與는 其仁之本與라는 말과 같다. 「子路」에 “만약 王者가 있다고 하더라도, 분명 세상은 世 이후에야 仁해질 것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부분의 仁이 바로 이 장의 주제와 같다. 곧, 《孟子》에서 “사람들이 모두 부모를 부모답게 모시고, 어른을 어른답게 모신다면 천하가 태평해질 것이다”라고 한 말인 것이다. 사람됨이 孝弟하면, 본래적으로 윗사람을 범하거나 난을 일으키는 지경까지 가지 않기 때문에, 仁之本이라고 한 것이다. 《禮記》 「經解」에는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가까운 모습, 이를 仁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본문의 仁과 의미가 같다. 「緇衣」에는 “禹가 즉위하고 3년이 되자, 백성들이 仁으로써 따랐다”라는 말이 있는데, 그 仁은 다른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모두 부모를 부모답게 모시고, 어른을 어른답게 모셨다는 말일 뿐이로다. 有子의 말은 본래 평이하지만 실제적이다. 그런데 후세 사람들은 事功을 부끄러워하여서 心性에 대해서 공론이나 펼쳤으니, 이에 그렇듯 쓸 데 없는 설들이 많아지고 말았다’라고 하였다. 《校勘記》는 《十三經注疏校勘記》다. 《孟子》 인용문은 「離婁 上」에 나온다. 「緇衣」는 《禮記》의 편이다. 有子之言/本自平實/後人恥事功而虛談心性/於是其說始多矣는 아마도 朱熹와 宋儒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말인 듯하다. 恥事功에서 事功은 事功學派를 이른다. 事功學派는 宋代의 학문적 조류로, 經書를 성리학적 입장이 아니라, 실제 정치, 경제적 입장에서, 특히 재무적 입장에서 해석하였다. 葉適 같은 사람이 대표적이다. 事功學派에서는 성리학을 불분명하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했다. 《論語集註》에서 朱熹는 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를 가지고, 孝弟가 爲仁之本인지, 아니면 仁之本에 대해 상세하게 논증하였는데, 俞樾은 有子의 이 말을 담백하게 받아 들이면 그만이지, 宋儒들처럼 心性에 대한 논의를 끌어 와서 복잡하게 따질 필요는 없다고 하고 있다. ◈ 仁은 체언으로, ‘인’이다. ‘어질다’는 말로, 儒家에서 제일 근본적인 덕목이다. ▼ 주석을 참고하면, 皇侃은 仁을 五德之初, ‘五德의 시초’라고 설명하였다. ▼ 朱熹는 仁者/愛之理/心之德也, ‘仁이라는 것은 愛의 이치요, 마음의 德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仁者何//下篇/樊遲問仁/子曰愛人///此仁字本訓//說文/仁字從二人/會意/言己與人相親愛也//善於父母/善於兄弟/亦由愛敬之心//故禮言/孝子有深愛///又言/立愛自親始/立敬自長始///敬亦本乎愛也, ‘仁이란 무엇인가. 뒷편에 “樊遲가 仁에 대해 물었다. 子는 ‘남을 사랑하는 일이다’라고 하였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仁이라는 글자의 본래 뜻이다. 《說文》에서는 仁에 대해 二와 人이 들어 있다고 했다. 仁은 會意字이니, 자신과 다른 사람이 서로 가까이 지내는 모습이라는 뜻이다. 父母에게 잘하고, 형제에게 잘하는 태도 또한 아끼고 공경하는 마음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禮》에 “孝子에게는 深愛가 있다”라는 말이 있고, 또 “愛를 立하는 일은 부모를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되고, 敬을 立하는 일은 어른을 공경하는 데에서 시작된다”라는 말이 있다. 敬 역시 愛에 근본이 있다’라고 하였다. 樊遲問仁 인용문은 「顏淵」에 나온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仁은 「人部」에 기재되어 있고, 仁/親也//从人从二, ‘仁은 가까이 하다는 뜻이다. 人과 二가 들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禮》는 《禮記》 「祭義」다. 「祭義」에는 孝子之有深愛者라고 되어 있다. 立愛自親始와 立敬自長始도 모두 「祭義」에 나오는데, 立敬自長始의 경우, 「祭義」에는 立敎自長始라고 되어 있다. ◈ 爲仁之本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 혹은 ‘~한’이라고 해석된다. 爲仁을 行仁이라고 본다면 ‘~한’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고, 爲仁을 仁이라고 본다면 ‘~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本은 체언으로, ‘근본’이다. ◈ 與는 감탄사다. ‘~로다’, ‘~구나’처럼 해석된다. 여기서는 ‘~일 것이다’처럼 번역하였다. 아니면, ‘~가 아니겠느냐’처럼 반문하는 의문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 때 與는 歟와 같다. ▼ 陸德明은 與音餘, ‘與는 餘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禮尙謙退/不敢質言/故云與也, ‘禮法에서는 겸손한 자세를 숭상하기 때문에, 감히 직언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니겠느냐”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與/平聲, ‘與는 平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고, 또 與者/疑辭/謙退不敢質言也, ‘與는 의문사다. 겸양하여서, 감히 직설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는 표현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與者/語助辭, ‘與는 어조사다’라고 하였다. ◈◈ 何晏은 先能事父兄/然後仁道可大成, ‘父兄을 먼저 섬길 줄 알아야, 그런 뒤에 仁의 도리가 크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皇侃의 《論語集解義疏》에는 苞咸, 즉 包咸의 주석으로 인용되어 있다. 이 점은 阮元이 밝혀 놓았다. 이 주석에 대해 劉寶楠은 表記云/仁之難成久矣/人人失其所好/故仁者之過易辭也///又云/仁之爲器重/其爲道遠/舉者莫能勝也/行者莫能致也//取數多者/仁也//夫勉於仁者/不亦難乎///是仁道大成/最爲難能//故惟能先事父兄/復擴充其本性之善/兼有衆德/然後仁道可冀大成也//皇本以先能事父兄爲包注, ‘「表記」에 “仁이 이루어지기 어렵게 된 지 오래이니, 사람들은 따를 바를 잃었다. 그러므로 仁한 사람의 잘못은 쉽게 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仁을 그릇이라고 한다면 무거운 그릇일 것이요, 길이라 한다면 먼 길일 것이다. 들려고 하는 자는 감당해 낼 수가 없을 것이고, 가려 하는 자는 도착할 수가 없을 것이다. 天下의 도리를 들어 보면, 가장 많은 것이 仁일 것이다. 이러하니, 仁하기로 노력하기는 역시 어렵지 않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이는 仁道가 大成되기가 가장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직 먼저 父兄을 잘 모시고, 그리고 다시 자신의 本性적 善을 확충하여, 여러 가지 덕목들을 겸비한 뒤에야 仁道가 크게 이루어지기로 바랄 수 있겠다. 《皇侃本》에서는 주석 중 先能事父兄 부분을 包咸의 주석으로 보았다’라고 하였다. 「表記」는 《禮記》의 편이다. ◈◈ 皇侃은 此更以孝悌解本以仁釋道也//言孝是仁之本//若以孝爲本/則仁乃生也//仁是五德之初/舉仁則餘從可知也//故孝經云/大孝/德之本也/敎之所由生也///王弼曰/自然親愛爲孝/推愛及物爲仁也, ‘이 글에서 다시 孝悌를 통하여, 本을 仁을 가지고 풀이하고 있다. 孝가 仁의 本이라는 뜻이다. 만약 孝를 本이라고 한다면, 仁이 孝에서 생겨나야 한다. 그런데 仁은 五德의 시초이므로, 仁을 들어 이야기한다면, 나머지 德들도 따라 생겨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孝經》에서는 “大孝는 德의 本으로, 교화가 기인해 생겨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王弼은 “자연스럽게 친애하는 모습이 孝이고, 그 사랑을 확장해서 外物에까지 미치게 하는 모습이 仁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孝經》 인용문은 「開宗明義」에 나온다. 王弼의 말은 王弼이 지었다는 《論語釋義》에서 인용한 말 같은데, 《論語釋義》는 지금 남아 있지 않다. ◈◈ 邢昺은 恐人未知其本何謂/故又言/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 ‘그런데 孔子는 사람들이 그 근본을 무엇이라 부를지 알지 못할까 걱정하였기에, “孝弟라는 것은 仁을 행하는 일의 근본이 아니겠느냐”라고 다시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程氏는 德有本/本立則其道充大//孝弟行於家/而後仁愛及於物/所謂親親而仁民也//故爲仁以孝弟爲本//論性則以仁爲孝弟之本, ‘德에는 근본이 있으니, 근본이 세워지면, 그 도리 또한 충만해진다. 집안에 孝弟가 이행된다면, 그런 뒤엔 仁愛가 外物에게 미칠 것이니, 소위 부모를 親하고, 백성들을 仁한다고 하는 말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仁을 행하는 일은 弟孝를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性에 대해 논하자면, 仁을 孝弟의 근본이라 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朱熹의 《論語集註》에 程子의 말이라고 인용되어 있다. 程顥인지, 程頤인지 알 수 없으므로, 程氏라고 밝혀만 두었다. ◈◈ 朱熹는 或問/孝弟爲仁之本/此是由孝弟可以至仁否///曰/非也//謂行仁自孝弟始/孝弟是仁之一事//謂之行仁之本則可/謂是仁之本則不可//蓋仁是性也/孝弟是用也/性中只有箇仁義禮智四者而已/曷嘗有孝弟來//然仁主於愛/愛莫大於愛親/故曰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 ‘어떤 사람이 물었다. “孝弟가 仁을 행하는 근본이라면, 이 말은 孝弟를 따르다 보면 仁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아니냐.”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仁을 행하는 일이 孝弟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을 뿐이다. 孝弟는 仁의 한 가지 형태다. 이 말을 仁을 행하는 일의 근본이라고 한다면 옳지만, 仁의 근본이라고 하면 옳지 않은 것이다. 대체로, 仁은 性이고, 孝弟는 用이다. 性에는 仁, 義, 禮, 智의 네 가지가 있을 뿐이다. 어찌 孝弟가 포함되어 있었겠느냐. 그러나, 仁은 愛에 主하고, 愛에는 부모를 愛하는 일 보다 중요한 일이 없으니, 그래서 ‘孝弟也者/其爲仁之本與’라고 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나는 爲仁之本이든, 仁之本이든,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何晏의 주석인 先能事父兄/然後仁道可大成에 대해, 皇本/此注作苞氏曰/又作然後仁道可成也, ‘《皇侃本》에는 이 주석이 苞咸의 말로 되어 있고, 또 然後仁道可大成은 然後仁道可成也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주석 중에 인용된 其爲仁之本與에 대해, 十行本/與作歟//按/作與用假借字, ‘《十行本》에는 與가 歟로 되어 있다. 내 의견인데, 與는 가차자로 사용된 글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주석 중 禮尙謙退에 대해, 毛本/尙作讓/非, ‘《毛本》에는 尙이 讓으로 되어 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孝弟之所以爲仁之本者/孝經云/夫孝/德之本也/敎之所由生也///德兼仁義禮智/此不言德/言仁者/仁統四德/故爲仁尤亟也//孟子/離婁篇/仁之實/事親是也//義之實/從兄是也///又云/親親而仁民/仁民而愛物///是爲仁必先自孝弟始也//孝經云/故不愛其親而愛他人者/謂之悖德//不敬其親而敬他人者/謂之悖禮//以順則逆/民無則焉//不在於善/而在於凶德//雖得之/君子不貴也///觀此/則不孝不弟/雖有他善/終是不仁/何者//謂其大本已失/其末自不足貴也//宋氏翔鳳/鄭注輯本/爲仁作爲人/云/言人其有本性/則成功立行也///案/仁人當出齊古魯異文/鄭就所見本人字解之爲人之本/與上文其爲人也句相應/意亦通也//鄭注又云/孝爲百行之本///言孝則弟可知//百行者/不一行也//呂氏春秋/孝行云/凡爲天下/治國家/必務本而從末///又云/務本莫貴於孝//夫孝/三皇五帝之本務/而萬事之紀也//夫執一術而百善至/百邪去/天下從者/其惟孝也//故論人必先以所親/而後及所疏/必先所重/而後及所輕///是知孝弟爲爲人之本/故君子先務此也//孝弟也者云云/是釋務本二句之義, ‘孝弟는 爲仁의 근본이다. 《孝經》에 “대저 孝는 德의 근본이요, 교화가 생겨나는 바이다”라는 말이 있다. 德은 仁, 義, 禮, 智를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德이 아니라 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仁이 四德을 통괄하므로 爲仁이 더욱 亟하기 때문이다. 《孟子》 「離婁」에 “仁의 實은 부모를 모시는 일이요, 義의 實은 형을 따르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부모를 가까이 모시고서 백성을 仁하게 대하고, 백성을 仁하게 대사고서 物을 愛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爲仁은 孝弟가 시작되는 데에서부터 선행되어야 한다. 《孝經》에 “따라서 부모를 사랑하지 않고서 남을 사랑하는 짓, 이를 悖德이라 한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서 남을 공경하는 짓, 이를 悖禮라고 한다. 이를 따르면 거스르게 되니, 백성들에게 법도가 없게 될 것이다. 뜻이 善한 데 있지 않고, 凶德을 품고 있으니, 비록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君子는 이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를 감안할 때, 不孝하고 不弟하다면, 다른 善을 품고 있더라도, 끝내 不仁하게 된다 하겠다. 왜 그런가. 大本이 이미 어그러졌으니, 末을 귀하게 여길 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宋翔鳳의 《鄭注輯本》에는 其爲仁之本與의 爲仁이 爲人으로 되어 있다. 宋翔鳳은 “사람은 本性을 품고 있는데, 공적을 이루면서 行을 立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爲仁과 爲人에서 仁과 人이 나뉜 까닭은, 분명 《齊》, 《古》, 《魯》의 글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鄭玄은 人으로 되어 있는 판본을 보고, 이를 爲人之本이라고 풀이하였을 것이니, 앞의 글에 있는 其爲人也와 상응하고, 의미 역시 통한다. 鄭玄은 주석에서 또 “孝는 百行을 爲하는 근본이다”라고 하였는데, 孝를 언급했지만, 弟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겠다. 百行이란, 一行이 아니라는 말이다. 《呂氏春秋》 「孝行」에 “대체로, 天下를 爲하고, 國家를 治할 때에는, 반드시 本을 務하고서 末을 從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務本에는 孝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저 孝는 이렇다. 三皇과 五帝가 本을 務하자, 萬事를 바로잡았던 것이다. 대저, 한 가지 術을 견지하면, 온갖 善이 생겨나고, 온갖 邪가 사라지며, 天下가 따르게 된다. 이러한 것은 오직 孝밖에 없다. 따라서 사람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 사람이 부모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하고,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중요한 것을 반드시 먼저 살피고, 중요하지 않은 것을 나중에 보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孝弟가 爲人의 本이라는 점을 알 수 있으니, 君子는 먼저 孝弟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孝弟也者 운운한 말은 務本 두 句의 의미를 풀이한 글이다’라고 하였다. 夫孝/德之本也/敎之所由生也는 《孝經》 「開宗明義」에 나온다. 「離婁」는 「離婁 上」이다. 親親而仁民/仁民而愛物은 《孟子》 「盡心 上」에 나온다. 故不愛其親而愛他人者 부분의 인용문은 《孝經》 「聖治」에 나온다. 宋翔鳳은 江蘇의 長州 사람으로, 淸나라 嘉慶帝 때의 학자다. 《齊》, 《古》, 《魯》는 《齊論》, 《古論》, 《魯論》을 이른다. 「孝行」은 「孝行覽」에 속해 있다. ◈◈ 蜀虎案 : 이 장의 주제를 한 번 더 총괄하는 말이다. 됨됨이가 孝弟하면 못된 짓을 벌이지 않게 되고, 또 德行을 실천하게 된다. 따라서 孝弟는 德行의 근본이요, 곧 爲仁의 근본인 것이다. 仁의 근본이라고 해도 좋겠다.)

 

 

 

<참고>

 

** 빗금은 원소가 없다는 뜻. x는 원소가 존재한다는 뜻.

 

그림1

 

그림2

 

그림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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