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 - 1 - 학이 - 1 - 학이시습지

2024. 3. 26. 18:05논어 이야기/원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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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논어》 번역에는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정태현(鄭泰鉉)의 2013년 번역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이 글을 작성할 때는 皇侃의 《論語集解義疏》, 陸德明의 《經典釋文》, 韓愈의 《論語筆解》, 邢昺의 《論語註疏》, 朱熹의 《論語集註》, 阮元의 《十三經注疏校勘記》, 劉寶楠의 《論語正義》, 俞樾의 《群經平議》, 그리고 주석서들에 포함되어 있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참고하였습니다. 본래 《논어》의 주석으로는 朱熹의 《集註》가 유명하지만, 皇侃의 《義疏》에는 南北朝 시대 학자들의 견해가 수록되어 있고, 邢昺의 《註疏》에는 唐代까지의 정통 官學적 관점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經典釋文》과 《校勘記》에는 판본에 따라 글자가 어떻게 다른 사례들이 있는지가 소개되어 있고, 劉寶楠의 《正義》에는 이전까지의 연구 성과들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고, 또 분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俞樾의 《群經平議》에는 여러 가지 이설들이 논증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책들을 모두 참고하여, 이 중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되는 설을 택하여 번역하였습니다. 본문은 몰라도, 주석에 대한 번역문에는 아마 오역이 다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점을 감안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 ◈는 주석 안에서 내용이 나뉘는 지점을 표시합니다. 예를 들어, A라는 글자나 단어, 구를 설명하다가, B라는 글자, 단어, 구로 바뀌는 지점에 ◈를 넣었습니다. 구, 절 단위로 주석을 재편하면서, 주석 하나에 설명해야 할 점들이 아주 많이 늘었습니다. 그래서 ◈를 넣어서 구별하였으니, 이 점을 참고해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은 한 글자에 대한 풀이인데, 학자들의 설을 각각 구분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韓을 풀이하는데, 劉寶楠의 설을 소개하고, 또 俞樾의 설을 소개한다면, 그 사이에 ▼을 삽입해 두었습니다. 주석 중, 구나 절 전체를 총괄하는 주석들은 대체로 전부 주석 가장 마지막 부분에 일괄 넣어 두었습니다.
 
* 《괄호》는 책이나 문집 이름을 뜻합니다. 《논어》, 《장자》, 《순자》, 《한비자》, 《문선》처럼 사용하였습니다. 다른 판본을 표기할 때도 《괄호》를 사용하였습니다. 《足利本》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단편 산문이나 시, 편 이름을 뜻합니다. 「학이」, 「위정」, 「벽옹」, 「子虛賦」처럼 표기하였습니다. ≪괄호≫는 옛날에는 사용했지만, 지금은 컴퓨터로 표기할 수 없는 한자를 쓸 때 사용했습니다. 예를 들어 信이라면 ≪亻言≫처럼 표기했습니다.
 
* 《논어》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최범규,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잘 읽으셨다면, 혹은 유익하다면 공감 한 번씩 부탁드립니다. 로그인 안 해도 할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2024년 3월 26일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314

 

<하단 주석> 논어 - 1 - 학이 - 1 - 학이시습지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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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何晏集解/唐陸德明音義
 
學而第一
 
集解
 
凡十六章
 
 
 
 
子曰:「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魏나라의 何晏이 《集解》를 지었고, 唐나라의 陸德明이 《音義》를 지었다.(魏何晏集解/唐陸德明音義, ◈◈ 集解에 대해, 陸德明은 佳買反//何晏集孔安國馬融包氏周氏鄭玄陳羣王肅周生烈義/并下已意/故謂之集解, ‘解는 佳와 買의 반절로 읽는다. 何晏이 孔安國, 馬融, 包咸, 周氏, 鄭玄, 陳羣, 王肅, 周生烈의 풀이를 모으고, 아울러서 아래에 의미를 已하였으므로, 그래서 《集解》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集解》는 何晏의 《論語集解》다. 《音義》는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학이 제1(學而第一, ◈◈ 皇侃은 論語是此書總名/學而爲第一篇//別自中間講說多/分爲科段矣//侃昔受師業自學而至堯曰凡二十篇/首末相次無別科/而以學而最先者/言降聖以下皆須學成//故學記云/玉不琢不成器/人不學不知道///是明人必須學乃成//此書既遍該衆典以敎一切/故以學而爲先也//而者/因仍也//第者/審諦也//一者/數之始也//既諦定篇次以學而居首/故曰學而第一也, ‘《論語》는 이 책 전체의 제목이고, 「學而」를 첫 편이다. 설명하는 말이 많은데, 이를 나누어서 공부하는 과정을 편제한 것이다. 나는 예전에 스승에게서 「學而」에서 「堯曰」까지 모두 22을 배웠는데, 첫 편과 끝 편에 순서가 있고, 엇나가는 내용이 없었다. 「學而」를 가장 우선해야 하는 까닭은 이렇다. 聖人이 세상에 난 뒤, 언제나 공부하여, 학업을 이루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學記」에 “옥은 琢하지 않으면 그릇으로 만들 수 없고, 사람은 공부하지 않으면 道를 깨우칠 수 없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이야말로 사람이 꼭 공부해서 학업을 이루어야 한다는 점을 밝힌 말이라 하겠다. 이 책에서는 이미 여러 글들을 가지고 가르침 일체를 언급하고 있으니, 그래서 「學而」를 첫 편으로 둔 것이다. 學而第一의 而는 따르다는 뜻이다. 第는 살피다는 뜻이다. 一은 첫 번째 숫자다. 다른 편들을 살펴서 그 다음에 두었고, 「學而」를 가장 처음에 두었으니, 그래서 學而第一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 陸德明은 以學爲首者/明人必須學也, ‘학문에 대한 내용을 첫 편으로 삼아, 사람이 반드시 배워야 한다는 점을 밝혔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自此至堯曰/是魯論語二十篇之名及第次也//當弟子論撰之時/以論語爲此書之大名/學而以下爲當篇之小目//其篇中所載/各記舊聞/意及則言/不爲義例/或亦以類相從//此篇論君子/孝弟/仁人/忠信/道國之法/主友之規/聞政在乎行德/由禮貴於用和/無求安飽以好學/能自切磋而樂道/皆人行之大者/故爲諸篇之先//既以學爲章首/遂以名篇/言人必須學也//爲政以下/諸篇所次/先儒不無意焉/當篇各言其指/此不煩說//第/順次也//一/數之始也/言此篇於次當一也, ‘이 편에서부터 「堯曰」에 이르기까지는, 《魯論語》 스물 두 편의 이름이요, 차례이다. 제자들이 이 글을 論撰할 때, 論語라는 표현을 이 책의 전체적인 이름으로 정하였고, 學而 이하를 편들의 소제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편에 기재한 글들은 각각 제자들이 예전에 배웠던 바를 기억해서, 뜻이 이르면 언술하였으되, 형식을 따지지 않았다. 비슷한 것들을 모아 두기도 하였다. 이 편에서는 君子, 孝弟, 어진 사람, 忠信, 나라를 다스리는 법, 친구를 사귈 때 지켜야 할 점, 정사를 듣는 일이 德을 실천하는 데 달려 있다는 점, 禮에 근거할 때는 和를 쓰는 일이 중요하다는 점, 편안하고 배부르기를 바라지 말고 학문을 좋아해야 한다는 점, 자신을 갈고 닦아 道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점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모두 인간 행위의 요체이니, 이에 다른 편들의 앞에 배치한 것이다. 이미 學을 章들의 첫머리로 삼았기에, 마침내 편의 이름을 가지고 사람이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하겠다. 「爲政」 이하 편들의 순서에 대해서는, 옛 유학자들의 연구가 없지 않지만, 학자들은 각 편들에서 그 요지를 설명해 두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번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第一에서, 第라는 것은 순서고, 一이란, 숫자의 시작이다. 즉, 순서로 생각하면, 이 편이 마땅히 첫 번째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魯論語》란, 《魯論》을 뜻한다. 漢나라 때는 《論語》가 세 종류로 전해지고 있었다. 魯나라에서 전하던 《魯論》, 齊나라에서 전하던 《齊論》, 그리고 집 벽이 허물어지며 나온 《古論》이 그렇다. 이 중 《魯論》과 《齊論》은 사실 구전되던 것으로, 今文, 古文이라고 할 때의 今文에 해당한다. 《論語》는 이후, 세 판본이 함께 전수되다가, 西漢 사람인 張禹가 《魯論》에다 《齊論》을 섞어서 《論語章句》를 만들었고, 다시 東漢의 鄭玄이 張禹의 《論語章句》와 《古論》을 섞었다. 지금 전수되고 있는 《論語》은 鄭玄이 편집한 판본이라고 한다. 「爲政」 이하 편들에 대해 邢昺이 번잡하게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 까달은, 「爲政」, 「八佾」 등 각 편이 시작될 때, 이 편 제목의 의미에 대해 학자들이 설명하고 있으므로, 굳이 이 첫 부분에서 편들의 제목과 순서, 그 의미를 모두 나열해 설명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 朱熹는 此爲書之首篇/故所記多務本之意/乃入道之門/積德之基/學者之先務也//凡十六章, ‘이 글은 책의 첫 편이다. 그래서 근본에 대해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을 기재한 것이다. 이는 곧 道에 들어 가는 문이요, 德을 쌓을 기반이요, 배우는 자가 먼저 노력해야 할 바이다. 모두 16章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釋文及皇邢疏本皆有此題//邢疏云/自此至堯曰是魯論語二十篇之名及第次也//當弟子論撰之時/以論語爲此書之大名/學而以下/爲當篇之小目也//第/順次也/一/數之始也//言此篇於次當第一也///案/古人以漆書竹簡約當一篇/即爲編列/以韋束之//故孔子讀易/韋編三絕//當孔子時/諸弟子撰記言行/各自成篇/不出一人之手/故有一語而前後篇再出也//毛詩序疏引說文/第/次也/從竹𠂔///今本說文脫//弟字下云/韋束之次第也//從古字之象///疑弟指韋束之次言/第則指竹簡言//釋名/釋書契云/稱題亦有第/因其第次也///後漢安帝紀李賢注/第謂有甲乙之次第, ‘《釋文》과 皇侃, 邢昺의 疏에는 모두 學而第一이라는 소제목이 있다. 邢昺은 “이 편에서부터 「堯曰」에 이르기까지는, 《魯論語》 스물 두 개 편의 이름이요, 차례이다. 제자들이 이 글을 論撰할 때, 論語라는 표현을 이 책의 전체적인 이름으로 정하였고, 學而 이하를 편들의 소제목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第라는 것은 순서고, 一이란, 숫자의 시작이다. 즉, 순서로 생각하면, 이 편이 마땅히 첫 번째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옛 사람들은 漆書나 竹簡을 묶어서 한 篇으로 만들었다. 즉, 편집하거나 배열하기 위해서, 가죽끈을 가지고 묶었던 것이다. 그래서 孔子가 《易》을 읽는데,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한 것이다. 孔子의 시대에, 제자들이 孔子의 언행을 撰하고 기록하여, 각자 篇을 만들을 것이니, 한 사람이 일괄적으로 편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말들은 앞뒤의 편들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毛詩》 「序」에서는 《說文》의 “第는 차례라는 뜻이다. 竹과 𠂔가 들어 있다”라는 말을 인용해 두었다. 지금 《說文》에는 이 말이 빠져 있다. 弟에 대해서는 “가죽끈으로 묶어서 순서를 정했다는 뜻이다. 옛 글자의 모습을 따랐다”라는 말이 있다. 弟는 가죽끈으로 순서대로 배열한 것을 이르는 말이고, 第는 竹簡을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의뭉스럽다. 《釋名》 「釋書契」에 “題라는 말이 있고, 또 第라는 표현도 있는데, 第次라는 의미를 따 온 표현이다”라는 말이 있다. 《後漢》 「安帝紀」에 대해 李賢은 “第는 甲乙 같은 차례가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漆書는 종이가 없었을 때, 竹簡에 옻으로 쓴 검은 글씨를 이른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後漢》 「安帝紀」는 《後漢書》 「孝安帝紀」를 이른다. 李賢은 唐나라의 章懷太子를 이른다. 이 주석은 帝自在邸第, ‘帝는 원래 邸 第에 있었다’에 붙어 있다. ◈◈ 蜀虎案 : 戰國時代 중기의 글인 《莊子》와 《孟子》의 경우, 글의 형식이 일정하지는 않지만, 내용은 일관적이고, 주제도 분명하며, 글을 지은 전후 맥락도 드러나 있다. 戰國時代 말기의 글인 《荀子》의 경우, 글이 훨씬 더 체계적이다. 아예 논문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論語》는 그렇지 않다. 《論語》는 孔子와 그 제자들의 어록이 단편적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그 말이 나온 전후 사정이 설명되어 있지 않다. 애초에 孔子가 직접 저술한 책도 아니다. 따라서 주제 의식과 목표를 갖고 저술했기야 하겠지만, 《莊子》, 《孟子》와 비교해도 체계성이 부족하고, 《荀子》는 말할 것도 없겠다. 따라서 「學而」가 왜 첫 편에 오며, 「爲政」이 왜 그 다음 편인지 알 수가 없다. 또, 「學而」라고 할지라도, 열 여섯 장의 글이 모두 학문에 대한 글이라고 할 수도 없다. 「學而」 첫 장엔 孔子의 말이 나오다가, 다음 장엔 왜 有子의 말이 나오고, 그 다음 장엔 또 孔子의 말이 나왔다가, 네 번째 장엔 왜 曾子의 말이 나오는지도 알 수가 없다. 큰 주제를 정하고, 어록들을 짜 맞추며, 제자들의 서열 관계를 고려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論語》는 진정 어렵다.)

 

풀이를 모으다.(集解, ◈◈ 《經典釋文》에는 學而第一 뒤에 또 集解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陸德明은 一本作何晏集解, ‘어떤 판본에는 何晏集解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陸德明經典釋文載論語舊題止集解二字/在學而第一之下//自注/一本作何晏集解///一本必六朝時人改題/誤以集解爲何晏一人作也//然釋文雖仍舊題/而云何晏集孔安國云云/其文兩見/則亦爲後世之誤說所惑也, ‘陸德明의 《經典釋文》에는 《論語》의 옛 제목에 集解 두 글자가 學而第一 밑에 있었다고 한다. 그에 대해 陸德明은 “어떤 판본에는 何晏集解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어떤 판본이란, 분명 六朝 시대 사람이 제목을 고친 본이었을 텐데, 그 사람은 何晏 한 사람이 《集解》를 지었다고 오인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즉, 《釋文》에서는 옛 제목을 따르면서도, “何晏이 孔安國 등등이 주석을 모았다”라고 설명한 것이다. 이 문구는 양쪽에 다 나와 있는데, 후세 사람들이 잘못 오해할까봐 그렇게 기술해 두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經典釋文》이다.)

 

모두 열 여섯 장이다.(凡十六章, ◈◈ 劉寶楠은 釋文舊有此題/其所據即集解本//今皇邢疏無凡幾章之題者/當由所見本已刪之也//漢石經則每卷後有此題//蓋昔章句家所記之數//統計釋文各篇四百九十二章/趙岐孟子篇敘曰/論四百八十六章///較釋文少六章//然釋文先進篇二十三章/依集解宜爲二十四章//衛靈篇四十九章/依集解實爲四十三章//又陽貨篇二十四章/漢石經作廿六章//凡皆所據本異/故多寡迥殊//今但依釋文以存集解之舊/其有離合錯誤/各記當篇之下//至後世分析移並之故/言人人殊/既有臆造/則皆略焉//又趙岐言章次大小各當其事/無所法也//明謂論語章次依事類敘/無所取法/與孟子篇章迥殊//而皇疏妄有聯貫/翟氏灝考異已言其誤//後之學者/亦有茲失//既非理所可取/則皆刪佚/不敢更箸其說焉, ‘《釋文》에는 이 소제목이 달려 있었는데, 아마도 《集解本》을 저본으로 했기 때문일 것이다. 皇侃, 邢昺의 疏에는 모두 몇 장인지에 대한 소제목이 없으니, 이들이 참고한 판본에 이 소제목이 이미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漢石經》에는 卷들이 끝날 때마다 이러한 소제목이 있다. 아마 옛날 章句를 나누던 학자들이 장의 수를 기재해 둔 말일 것이다. 《釋文》의 篇들을 모두 계산해 보면 492장인데, 趙岐는 《孟子》의 「敘」에서 “《論》은 486장이다”라고 하였으니, 《釋文》과 비교해 보면 6장이 적다. 그런데, 《釋文》의 「先進」은 23장인데, 《集解》에 근거해 보면 24장이 되어야 한다. 「衛靈」은 49장인데, 《集解》에 근거해 보면 실제로 43장이다. 또, 「陽貨」는 24장인데, 《漢石經》에는 26장으로 되어 있다. 근거한 판본에 달라서, 이렇게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면서 개수가 다른 것이다. 나는 다만 《釋文》에 근거하여, 《集解》의 옛 형식을 존치시키려 한다. 아마도 합치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으며, 맞는 경우도 있고, 그른 경우도 있겠으나, 각각 편들 아래에 기재해 두었다. 이 소제목을 移並한 이유에 대해 후세 사람들이 분석하기도 했지만, 사람마다 말이 다르고, 억측이기 때문에 모두 인용하지 않고 생략한다. 또, 趙岐는 장의 순서나 개수가 그 기재된 사실들에 마땅하지만, 法한 바는 없다고 하였다. 분명히 《論語》의 장들의 차례는 사안들의 차례에 근거하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法한 바는 없기에, 《孟子》의 篇章과는 다를 것이다. 皇侃은 망령되게도 편이나 장들의 순서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았으나, 그 말에 오류가 있다는 점은 翟灝가 《考異》에서 이미 지적한 바이다. 나중에 공부하던 사람도 이와 같이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 이치가 取해질 수 있는 바가 아니어서, 모두 刪佚되었으니, 감히 그 설들을 이 글에 다시 인용하진 않았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論》은 《論語》다. 「衛靈」은 「衛靈公」이다. 翟灝는 浙江의 仁和 사람으로, 淸나라 乾隆帝 때 학자다. 《考異》는 아마 《四書考異》일 것이다. ◈◈ 蜀虎案 : 이 부분까지가 체제에 대한 설명이다. 이 다음의 子曰부터가 본문이다.)

 

 

 

 

공자가 말했다.(子曰, ◈ 子는 체언으로, ‘孔子’를 이른다. 나는 ‘孔子’라고 번역하였다. 子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莊子, 老子, 孔子, 荀子 같은 속칭 諸子들에 붙은 子가 그렇다. 이 때 子는 ‘선생’, ‘선생님’과 같은 의미이다. 그러나 본문의 子曰처럼, 子라고만 하면 일반적으로 孔子 만을 가리킨다. 아마도 儒學者들이 자기 시조인 孔子를 유일한 스승이라고 생각하여 子라고 기재하였을 것이다. 고대에는 남성을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간혹, 子를 앞에 붙여서, 지칭하는 사람을 한 번 더 높이는 경우도 있다. 《墨子》 「公孟」에 子墨子라는 말이 나오고, 《列子》 「天瑞」에 子列子라는 말이 나오며, 《春秋公羊傳》 「隱公」 11년에는 子沈子라는 말이 나온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馬融은 子者/男子之通稱/謂孔子也, ‘子라는 말은 남자에 대한 통칭이다. 孔子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주석 중 稱에 대해, 稱/尺證反, ‘稱은 尺과 證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주석 중 子者/男子之通稱에 대해, 凡有德者/皆得稱子/故曰通稱也, ‘대체로 德을 품은 자는 모두 子라고 지칭될 수 있다. 따라서 통칭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謂孔子也에 대해 子乃是男子通稱//今所稱子曰/不闗通他/即指謂孔子也, ‘子는 남자에 대한 통칭이다. 그러나 이 글에서 子曰이라고 한 말은 다른 사람에 관계된 말이 아니라, 곧 孔子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子者/指於孔子也//子是有德之稱/古者稱師爲子也, ‘子는 孔子를 지칭하는 말이다. 子는 德을 품은 사람을 칭하는 말로, 옛날에는 스승을 子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子者/古人稱師曰子//子/男子之通稱//此言子者/謂孔子也, ‘子는 이렇다. 옛 사람들은 스승을 부를 때 子라고 하였다. 子라는 말은 男子에 대한 통칭이다. 이 부분의 子라는 표현은 孔子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또, 邢昺은 馬融의 주석 중 子者/男子之通稱에 대해, 云子者男子之通稱者/經傳凡敵者相謂皆言吾子/或直言子/稱師亦曰子/是子者/男子有德之通稱也, ‘馬融이 子者/男子之通稱이라고 한 말은 이렇다. 경전들에서는 대체로 대등한 사람들끼리 서로 吾子라고 부른다. 곧장 子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스승을 일컬을 때 역시 子라고 한다. 이 子는 德을 품은 남자에 대한 통칭이다’라고 하였다. 또, 馬融의 주석 중 謂孔子에 대해, 云謂孔子者/嫌爲他師/故辨之//公羊傳曰/子沈子曰///何休云/沈子稱子冠氏上者/著其爲師也//不但言子曰者/辟孔子也//其不冠子者/他師也///然則書傳直言子曰者/皆指孔子/以其聖德著聞/師範來世/不須言其氏/人盡知之故也//若其他傳受師說/後人稱其先師之言/則以子冠氏上/所以明其爲師也/子公羊子/子沈子之類/是也//若非己師/而稱他有德者/則不以子冠氏上/直言某子/若高子/孟子之類/是也, ‘馬融이 謂孔子라고 한 말은 이렇다. 다른 선생을 이른다고 오해할까봐, 孔子라고 하여 변별한 것이다. 《公羊傳》에 “子沈子가 말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何休는 “沈子가 子로 불리며, 氏 위에 子를 붙인 까닭은, 스승으로 여긴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단지 子曰이라고만 하지 않은 까닭은, 孔子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孔子의 경우에 子를 붙이지 않는 까닭은, 子를 붙이는 경우가 다른 선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경전들에서 다만 子曰이라고만 한 경우는, 모두 孔子를 가리킨 사례인 것이다. 孔子의 聖德이 유명해져서, 지난 세상의 모범이 되었으니, 그 氏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모조리 孔子인 줄 알기 때문이다. 만약, 그 외에 존경할 만한 언설을 전수한 경우가 있다면, 후세 사람들이 그 先師의 설을 칭송면서, 子를 氏 위에 붙였으니, 子가 앞에 붙어 있는 표현들은 자신이 선생으로 생각한다는 점을 밝힌 말이라 하겠다. 子公羊子, 子沈子 같은 부류가 그렇다. 만약 자기가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德을 품은 다른 사람을 부를 때에는, 子를 氏 앞에 붙이지 않고, 다만 어떠어떠한 子라고만 한다. 高子, 孟子 같은 부류가 그렇다’라고 하였다. 《公羊傳》은 《春秋公羊傳》이다. 子沈子曰이라는 말은 「隱公」 11년, 「莊公」 10년, 「定公」 원년에 등장하는데, 何休의 저 주석이 붙어 있는 기사는 「隱公」 11년의 것이다. 子公羊子라는 표현은 《春秋公羊傳》 「桓公」 6년, 「宣公」 5년에 등장한다. ▼ 劉寶楠은 白虎通號篇/子者/丈夫之通稱也///與此注義同//言尊卑皆得稱子/故此孔子門人稱師亦曰子也//邢疏云/書傳直言子曰者/皆指孔子//以其聖德著聞/師範來世/不須言其氏/人盡知之故也, ‘《白虎通》 「號」에는 “子는 丈夫에 대한 통칭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이 주석의 풀이와 같다. 존귀하든, 천하든 모두 子라고 불릴 수 있으니, 본문에서처럼 孔子의 문인들도 자기 스승을 子라고 불렀던 것이다. 邢昺은 “경전들에서 다만 子曰이라고만 한 경우는, 모두 孔子를 가리킨 사례인 것이다. 孔子의 聖德이 유명해져서, 지난 세상의 모범이 되었으니, 그 氏를 표현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모조리 孔子인 줄 알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할 때 주로 사용된다. 지금 사용하는 따옴표와 같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曰者/發語之端也//許氏說文云/開口吐舌謂之爲曰///此以下是孔子開口談說之語/故稱子曰爲首也, ‘曰은 말을 시작할 때 표시하는 말이다. 許氏의 《說文》에서는 “입을 열고 말을 털어 놓는 일을 曰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曰 이하의 글들은 孔子가 입을 열고 말한 이야기들이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子曰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許氏는 許愼, 《說文》은 《說文解字》를 이른다. 그런데 《說文解字》에는 開口吐舌謂之爲曰이라는 말이 없다. ▼ 邢昺은 曰者/說文云/詞也//從口/乙聲//亦象口氣出也///然則曰者/發語詞也, ‘曰은 이렇다. 《說文》에는 “말하다는 뜻이다. 口가 들어 있고, 乙이라고 발음한다. 입에서 공기가 나오는 모습을 본떴다고 보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한 즉, 曰이라는 것은, 말을 시작하는 표현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저 말은 《說文解字》 「曰部」에 나온다. 「曰部」에는 曰/詞也//从口乙聲//亦象口气出也//凡曰之屬皆从曰, ‘曰은 말하다는 뜻이다. 口가 들어 있고, 乙이라고 발음한다. 입에서 공기가 나오는 모습을 본떴다고 보기도 한다. 曰의 부류에는 모두 曰이 들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 劉寶楠은 曰者/皇疏引說文云/開口吐舌謂之爲曰///邢疏引說文云/䛐也//從口/乙聲//亦象口氣出也///所引說文各異//段氏玉裁校定作/從口乙//象口氣出也///又引孝經釋文云/從乙在口上/乙象氣/人將發語/口上有氣/故曰字缺上也, ‘曰에 대한 풀이다. 皇侃의 疏에서는 《說文》을 인용해서 “입을 열고 말을 털어 놓는 일을 曰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邢昺은 《說文》을 인용해서 “말하다는 뜻이다. 口가 들어 있고, 乙이라고 발음한다. 입에서 공기가 나오는 모습을 본떴다고 보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같은 曰인데도, 인용한 《說文》 내용이 각자 다르다. 段玉裁의 교정본에는 “口와 乙이 들어 있다. 입에서 공기가 나오는 모습을 본떴다”라고 되어 있고, 또 《孝經釋文》에 “乙이 입 위에 있는 모양이다. 乙은 氣를 본뜬 것이다. 사람이 말을 시작하면, 입 위에 氣가 생긴다. 그래서 曰의 옛 글자는 윗부분이 트여 있었다”라고 되어 있는 말을 인용해 두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를 이른다. 開口吐舌謂之爲曰이라는 말은 《說文解字》에 없다. 邢昺이 인용한 말은 《說文解字》 「曰部」에 나온다. 「曰部」에는 曰/詞也//从口乙聲//亦象口气出也//凡曰之屬皆从曰, ‘曰은 말하다는 뜻이다. 口가 들어 있고, 乙이라고 발음한다. 입에서 공기가 나오는 모습을 본떴다고 보기도 한다. 曰의 부류에는 모두 曰이 들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孝經釋文》은 《孝經》에 대한 《經典釋文》을 이른다. 《孝經釋文》 인용문은 《孝經》 「開宗明義」의 仲尼居/曾子侍//子曰, ‘仲尼가 있었는데, 曾子가 모시고 있었다. 子가 曰했다’의 曰 부분에 대한 풀이다. ◈◈ 皇侃은 然此一書或是弟子之言/或有時俗之語//雖非悉孔子之語/而當時皆被孔子印可也//必被印可/乃得預錄/故稱子曰通冠一書也, ‘그런데 이 책에는 간혹 제자들의 말이 실려 있기도 하고, 그 때 사람들의 말이 들어 있기도 하다. 그러나 모든 말이 孔子의 말은 아닐지라도, 당시에 모두 孔子의 인정을 받은 말들일 것이다. 꼭 인정을 받았어야 기록되었을 것이니, 이에 子曰을 글 가장 앞에 붙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孔子가 직접 한 말이 아닐지라도, 孔子의 인정을 받았기에, 子曰이라는 표현을 서두에 붙였을 것이라고 본 것 같다. ◈◈ 邢昺은 以此下是孔子之語/故以子曰冠之//或言孔子曰者/以記非一人/各以意載/無義例也, ‘曰 이하의 말들이 孔子의 말이므로, 子曰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그 말들을 덮은 것이다. 孔子曰이라는 표현도 있는데, 이는 기억한 사람이 한 명이 아닌지라, 각자의 뜻에 따라 기재하고, 형식을 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冠은 관을 ‘쓰다’라는 표현이다. 한문은 새로로 쓰니까, 子曰이라는 말이 孔子의 말 첫 머리에 붙어 있으면, 孔子의 말이 子曰이라는 관을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冠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馬曰/子者/男子之通稱/謂孔子也의 ▼ 馬曰에 대해서는 皇本作/馬融曰//後放此, ‘馬曰이 《皇侃本》에는 馬融曰로 되어 있다. 이후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男子之通稱에 대해서는 皇本作/男子通稱也//北監本通誤道, ‘男子之通稱이 《皇侃本》에는 男子通稱也로 되어 있다. 《北監本》에는 通이 道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論語》는 본래 孔子가 직접 편찬하였던 책이 아니다. 孔子가 죽은 뒤, 제자들이 孔子의 말들과, 자신들의 말을 모아서 《論語》를 편찬하였을 것이다. 子曰은, 이 뒤에 나오는 말이 子, 즉 孔子의 언술이라는 점을 표시해 주는 말이다. 邢昺이 지적한 것처럼, 子曰 대신 孔子曰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述而」, 「泰伯」, 「子路」가 그렇다. 이는 아마 각 편들을 편찬한 제자들의 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 蜀虎又案 : 그러면 왜 아무 맥락 없이, 갑자기 子曰이라는 표현과 함께 孔子의 말이 등장할까. 《論語》의 형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論語》는 대부분 대화체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글들과 비교해 보면 이렇다. 《莊子》와 《孟子》의 경우, 대화체와 논설 형식이 반복되면서 등장한다. 戰國時代 가장 후반기에 저술된 《荀子》의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의 글이 논설로만 구성되어 있고, 글 자체의 완결성 또한 아주 높다. 그러나 《論語》의 경우는 대부분의 내용이 대화체로만 구성되어 있으며, 대화체라고 하더라도 그 대화가 등장한 전후의 맥락이 글 속에 제대로 제시되어 있지가 않다. 아마도 편찬 시기를 생각하면, 《論語》가 가장 앞서고, 《莊子》와 《孟子》가 그 다음이며, 《荀子》가 가장 마지막일 텐데, 글의 형식이 서로 다른 까닭은 시대별로 당대에 유행하였던 문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고, 배운 바를 때에 맞게 익힌다면 기쁘지 않겠느냐.”(學而時習之/不亦說乎, ◈ 學은 용언으로, ‘공부하다’, ‘배우다’는 말이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白虎通云/學/覺也/悟也///言用先王之道/導人情性使自覺悟/而去非取是/積成君子之德也, ‘《白虎通》에는 “學이라는 것은 깨우다, 깨닫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先王의 방법을 사용하여서, 사람들이 자기 情性을 가지고 스스로 깨달아, 그른 바는 버리고, 옳은 바를 따르면서 君子의 德을 이루어 나가도록 이끌어 준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를 이른다. 저 말은 《白虎通義》 「辟雍」에 나온다. 「辟雍」에는 學之爲言覺也/悟所不知也, ‘學은 깨운다는 뜻이니, 깨닫지 못했던 점을 깨우친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 邢昺 역시 《白虎通義》를 인용하여, 白虎通云/學者/覺也/覺悟所未知也, ‘《白虎通》에는 “學이라는 것은 깨운다는 뜻이니, 깨닫지 못했던 것을 깨우친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學之爲言效也//人性皆善/而覺有先後/後覺者必效先覺之所爲/乃可以明善而復其初也, ‘배운다는 말은 본받는다는 말을 이른다. 사람의 性은 모두 선한데, 이를 깨닫는 데 선후가 있을 뿐이다. 나중에 깨달은 사람은 반드시 먼저 깨달은 자들이 행하는 바를 본받아야 한다. 그러면 선한 본성을 밝히고, 본래의 선한 상태로 되돌아 갈 수 있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學者/說文云/斅/覺悟也//從敎從冂//冂/尙矇也//臼聲///學/篆文斅省//白虎通辟雍篇/學之爲言覺也/以覺悟所未知也///與說文訓同//荀子勸學篇/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又云/學惡乎始/惡乎終//曰/其數則始乎誦經/終乎讀禮/其義則始乎爲士/終乎爲聖人//真積力久則入/學至乎沒而後止也///案/王制言/樂正崇四術/立四敎/順先王詩書禮樂以造士/春秋敎以禮樂冬夏敎以詩書王太子王子羣后之太子卿大夫元士之適子國之俊選/皆造焉///是詩書禮樂/乃貴賤通習之學/學已大成/始得出仕/所謂先進於禮樂者也//春秋時/廢選舉之務/故學校多廢/禮樂崩壞/職此之由//夫子十五志學/及後不仕/乃更刪定諸經//史記孔子世家/言孔子當定公五年已修詩書禮樂/即謂此也//刪定之後/學業復存//凡篇中所言爲學之事/皆指夫子所刪定言之矣, ‘學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는 “斅은 깨우치다는 뜻이다. 敎, 冂이 들어 있다. 冂은 여전히 어리석다는 뜻이다. 臼라고 발음한다”라고 되어 있다. 學은 전서인 斅이 생략된 글자다. 《白虎通》 「辟雍」에는 “學은 깨운다는 뜻이니, 깨닫지 못했던 점을 깨우친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說文》의 풀이와 같다. 《荀子》 「勸學」에는 “君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헤아리니, 식견은 명쾌해지고, 행동에는 잘못이 없어지게 된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하늘이 높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고,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지 않으면 대지가 두껍다는 점을 깨달을 수가 없다. 이처럼, 先王이 남긴 말을 배우지 않는다면, 학문이 훌륭하다는 점도 깨달을 수가 없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공부는 무엇으로 시작하고, 어떻게 끝내야 할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공부 방법을 생각하자면 《經》을 외우는 것으로 시작하여 《禮》를 읽는 것으로 마쳐야 하고, 공부의 목적을 생각하자면 선비가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聖人이 되는 것으로 마쳐야 한다. 진정 오랫동안 매진해야만 聖人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聖人이 되었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공부라는 것은 죽은 뒤에야 끝나는 법이다”라는 말이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王制」에 “樂正이 四術을 숭상해, 四敎를 세우고, 先王의 《詩》, 《書》, 《禮》, 《樂》을 따름으로써 선비를 양성했다. 봄과 가을에는 《禮》, 《樂》을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詩》, 《書》를 가르쳤다. 왕태자, 왕자, 제후의 太子, 卿, 大夫, 元士의 適子, 나라의 수재들이 모두 造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듯 《詩》, 《書》, 《禮》, 《樂》은 신분이 귀하든, 천하든, 일반적으로 공부했던 글이었다. 학문이 대성하면 비로소 출사할 수 있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禮樂에 대한 先進이었다. 春秋時代에는 인재를 가려 천거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았다. 학교가 다수 문을 닫았고, 禮樂 제도도 무너졌으니, 오로지 이 때문이다. 夫子는 15살 때 공부에 뜻을 두었지만, 나중에도 출사하지 않았고, 여러 《經》들을 刪定하였다. 《史紀》 「孔子世家」에는 孔子가 定公 5년에 이미 《詩》, 《書》, 《禮》, 《樂》을 정비했다는 말이 있으니, 곧 이를 이르는 말일 것이다. 夫子가 刪定한 뒤에 學業이 세상에 다시 존재하게 되었다. 《論語》의 모든 편들에서 공부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할 텐데, 모두 夫子가 刪定한 바를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斅는 「敎部」에 기재되어 있다. 「王制」는 《禮記》의 편이다. 先進於禮樂이라는 말은 《論語》 「先進」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표현이다. 《史紀》 「孔子世家」 이야기는 아마 故孔子不仕/退而脩詩書禮樂, ‘이에 孔子는 출사하지 않고, 물러나 《詩》, 《書》, 《禮》, 《樂》을 정비했다’라는 말을 이를 것이다. ◈ 而는 순접으로, ‘그리고’, ‘~하고’처럼 해석된다. ▼ 皇侃은 而/猶因仍也, ‘而는 좇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皇侃과 같이 해석한다면, 學而時習之는 ‘學하고, 이를 좇아서 之를 時習한다’라는 말이 된다. ◈ 時는 부사어로, 아마 ‘때에 맞게’라는 말일 듯하다. 용언인 習을 한정한다. 이 時는 ‘때마다’, ‘때때로’라고 해석할 수도 있고, ‘때에 맞게’라고 풀이할 수도 있다. ‘때마다’, ‘때때로’처럼 해석하면 배운 뒤에 ‘생각이 날 때마다’ 익힌다는 말이 되고, ‘때에 맞게’라고 한다면, 말 그대로 ‘적당한 시기에’ 익힌다는 말이 된다. 나는 ‘때에 맞게’라고 번역하였다. 皇侃은 時를 ‘체칠적으로 적당한 때’, ‘1년 중 적당한 때’, ‘하루 중 적당한 때’로 나누어 풀이했는데, 따져 보자면 ‘하루 중 적당한 때’라고 할 수 있겠다. 《漢書》 「元帝紀」에 陰陽和/風雨時/日月光, ‘陰陽은 어우러지고, 비와 바람은 時하며, 해와 달은 빛난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時는 ‘때에 맞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王肅은 時者/學者以時誦習之//誦習以時/學無廢業/所以爲說懌, ‘時라는 말은, 공부할 때, 때에 맞춰서 외우고 익힌다는 뜻이다. 때에 맞춰서 외우고 익히면, 공부가 멈추는 일이 없을 테니, 그래서 기뻐진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王肅의 주석에 대해, 背文而讀曰誦也//然王此意即是日中不怠之時也//舉日中不怠則前二事可知也, ‘등을 돌리고 읽는 일을 誦이라고 한다. 王肅은 이 글을 하루 중 공부할 때 게으르게 굴지 않는다고 풀이하였다. 하루 내내 공부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면, 앞의 두 가지 일에 대해서도 어떻게 할지 짐작할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前二事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劉寶楠은 王肅의 주석 중 誦習에 대해, 誦習者/說文/誦/諷也/諷/誦也///周官/大司樂注/倍文曰諷/以聲節之曰誦///諷誦皆是口習//故此注言誦習也//但古人爲學/有操縵/博依/雜服/興藝諸事/此注專以誦習言者/亦舉一端以見之也, ‘誦習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는 “誦은 諷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고, 또 “諷은 誦이라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周官》 「大司樂」에 대한 주석에는 “글을 외우는 일을 諷이라 하고, 소리를 내서 節하는 일을 誦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諷과 誦은 모두 입으로 익히는 일을 이른다. 그래서 이 주석에서 誦習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다만 옛 사람들은 공부할 때, 操縵, 博依, 雜服하면서 여러 방면으로 기예를 닦았는데, 이 주석에서 誦習이라고만 언급한 까닭은, 공부의 한 측면만을 설명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誦, 諷은 모두 「言部」에 기재되어 있다. 《周官》 「大司樂」은 《周禮》 「春官宗伯」의 일부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以樂語敎國子/興道/諷誦/言語, ‘樂과 語를 가지고 國子를 가르치니, 興, 道, 諷, 誦, 言, 語이다’에 붙어 있다. 操縵, 博依, 雜服는 모두 《禮記》 「學記」에 나오는 말로, 아마 공부 방법의 일종일 것이다. 또, 劉寶楠은 王肅의 주석 중 學無廢業에 대해, 學不廢業者/廢者/棄也//說文/業/大版也//所以飾縣鍾鼓/捷業如鋸齒///簡冊亦用竹爲版/故亦名業//曲禮云/請業則起///注/業謂篇卷也///是也, ‘學不廢業에 대한 풀이다. 廢는 버리다는 뜻이다. 《說文》에는 “業은 큰 版이다. 종이나 북을 꾸미고 매다는 것으로, 톱니처럼 業을 捷한다”라고 되어 있다. 죽간 역시 대나무를 版으로 사용한 경우로, 옛날에는 이 역시 業이라고 했다. 「曲禮」에는 “業을 청할 때에는 일어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주석에서는 “業은 책을 엮는 일을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말이다’라고 하였다. 상기하였듯 王肅은 學不廢業이 아니라 學無廢業이라고 하였다. 《論語正義》의 주석 부분에도 學無廢業으로 인용되어 있다. 이 부분에만 學不廢業이라고 되어 있다. 아마 劉寶楠이 글자를 실수한 모양이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業은 「丵部」에 기재되어 있다. 「曲禮」는 「曲禮 上」으로, 《禮記》의 편이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 皇侃은 時를 ‘공부의 때’라고 풀이하면서,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皇侃은 時者/凡學有三時//一是就人身中爲時/二就年中爲時/三就日中爲時也//一就身中者/凡受學之道/擇時爲先/長則捍格/幼則迷昏//故學記云/發然後禁/則捍格而不勝//時過然後學/則勤苦而難成///是也//既必須時/故內則云/六年敎之數與方名/七年男女不同席/八年始敎之讓/九年敎之數日/十年學書計/十三年學樂誦詩舞勺/十五年成童舞象///竝是就身中爲時也//二就年中爲時者/夫學隨時氣則受業易入/故王制云/春夏學詩樂/秋冬學書禮///是也//春夏是陽/陽體輕清/詩樂是聲/聲亦輕清/輕清時學輕清之業/則爲易入也//秋冬是陰/陰體重濁/書禮是事/事亦重濁/重濁時學重濁之業/亦易入也//三就日中爲時者/前身中年中二時/而所學竝日/日修習不暫廢也//故學記云/藏焉修焉息焉游焉///是也, ‘時는 이렇다. 공부에는 세 가지 때가 있다. 하나는 체질적으로 적당한 때요, 둘은 한 해 중 적당한 때요, 셋은 하루 중 적당한 때다. 먼저, 체질적으로 적당한 때란 이렇다. 학문을 배울 때에는, 적당한 시기를 고르기를 먼저 해야 한다. 나이가 너무 들면 하기 싫어지고, 너무 어리면 흐리멍텅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學記」에는 “發한 뒤에 禁하면, 扞格하여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난 뒤에 배우면, 이행하기가 괴로워서 이루기가 힘들어진다”라고 되어 있으니, 바로 이 말이다. 이처럼 적당한 때는 아주 중요하니, 이에 대해 「內則」에는 “6살이 되면 숫자와 방위를 가르치고, 7살이 되면 남자애와 여자애가 한 자리에 앉지 않게 하며, 8살이 되면 처음으로 겸양을 가르치고, 9살이 되면 날짜를 세는 법을 가르친다. 10살이 되면 글쓰기와 계산을 배우고, 13살이 되면 《樂》을 배우고, 《詩》를 외우며, 「勺」을 춘다. 15살이 되면 成童이 되어 「象」을 춘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모두 체질적으로 적당한 때이다. 두 번째로, 한 해 중 적당한 때란 이렇다. 대저, 공부할 때의 기운에 따라, 수업을 들었을 때 쉽게 체득되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해 「王制」에 “봄과 가을에는 《詩》와 《樂》을 배우고, 가을과 겨울에는 《書》와 《禮》를 배운다”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뜻이다. 봄과 여름은 陽인데, 陽이면 신체가 산뜻해진다. 《詩》와 《樂》은 소리인데, 소리 또한 산뜻하다. 산뜻한 때에 산뜻한 분야를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쉽게 익힐 수 있다. 가을과 겨울은 陰이다. 陰이면 신체는 둔탁해진다. 《書》와 《禮》는 세상일이다. 세상일은 역시 둔탁하다. 둔탁한 시기에 둔탁한 분야를 배우니, 역시 쉽게 익힐 수 있다. 세 번째는 하루 중 적당한 때다. 앞에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한 해 중에서 적당한 때를 두 개 들었었다. 이렇게 매일 공부하여, 날마다 익히고, 잠시도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 이에 대해 「學記」에는 “藏하고, 修하며, 息하고, 遊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뜻이다’라고 하였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內則」, 「王制」는 《禮記》의 편이다. 「王制」에는 春秋敎以禮樂/冬夏敎以詩書, ‘봄과 가을에는 《禮》와 《樂》을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詩》와 《書》를 가르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세 가지 時 중, 學而時習之의 時는 무엇일까. 皇侃은 時是日中之時也, ‘時는 하루 중 적당한 때를 뜻한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王肅의 주석 중 時者/學者以時誦習之를 皇侃의 주석과 연관지어 설명하였다. 邢昺은 云時者學者以時誦習之者/皇氏以爲/凡學有三時/一/身中時//學記云/發然後禁/則扞格而不勝//時過然後學/則勤苦而難成///故內則云/十年出就外傅/居宿於外/學書計//十有三年/學樂/誦詩/舞勺//十五成童/舞象///是也//二/年中時//王制云/春秋敎以禮樂/冬夏敎以詩書///鄭玄云/春夏/陽也//詩樂者聲/聲亦陽也//秋冬/陰也//書禮者事/事亦陰也//互言之者/皆以其術相成///又文王世子云/春誦/夏弦/秋學禮/冬讀書///鄭玄云/誦謂歌樂也//弦謂以絲播詩//陽用事則學之以聲/陰用事則學之以事/因時順氣/於功易也///三/日中時//學記云/故君子之於學也/藏焉/修焉/息焉/遊焉///是日日所習也, ‘王肅이 時者/學者以時誦習之라고 한 말은 이렇다. 皇侃은 공부해야 할 시기가 셋 있다고 하였다. 하나는 체질적으로 적당한 시기다. 「學記」에 “發한 뒤에 禁하면, 扞格하여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 시간이 지난 뒤에 배우면, 이행하기가 괴로워서 이루기가 힘들어진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內則」에는 “열 살이 되면 外傅에게 나아가, 밖에 살면서 글과 계산법을 배운다. 13살이 되면, 《樂》을 배우고, 《詩》를 외우며, 「勺」을 춘다. 15살이 되면 「象」을 춘다”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러한 의미다. 두 번째는 한 해 중 적당한 시기다. 「王制」에 “봄과 가을에는 《禮》, 《樂》을 가르치고, 겨울과 여름에는 《詩》, 《書》를 가르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봄과 여름은 陽이다. 《詩》와 《樂》은 소리인데, 소리 역시 陽이다. 가을과 겨울은 陰이다. 《書》와 《禮》는 事에 대한 글인데, 事 역시 陰이다. 그러나 뒤섞어서 말한 것은, 術을 가지고 서로 보완해 주려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또, 「文王世子」에는 “봄에는 誦하고, 여름에는 弦하며, 가을에는 《禮》를 배우고, 겨울에는 《書》를 읽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誦은 음악을 노래한다는 뜻이다. 弦은 현악기를 가지고 《詩》를 播한다는 뜻이다. 陽을 가지고 일을 처리할 때는 소리를 배우고, 陰을 가지고 일을 처리할 때는 事를 배운다. 계절에 근거하고, 기운을 따르니, 공부를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세 번 째는, 하루 중 적당한 시기다. 「學記」에 “그래서 君子는 공부할 때, 藏하고, 修하며, 息하고, 遊하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말이 나날이 익힌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學記」, 「內則」는 《禮記》의 편이다. 「勺」과 「象」은 아마 樂曲의 이름일 것이다. 「王制」, 「文王世子」는 《禮記》의 편이다. ▼ 劉寶楠 역시 皇侃의 설을 인용하며 설명하고 있다. 劉寶楠은 時習者/說文/時/四時也///此謂春夏秋冬//而日中晷刻亦得名時/引申之義也//皇疏云/凡學有三時/一是就人身中爲時//內則云/六年敎之數目/十年學書計/十三年學樂/誦詩/舞勺/十五成童舞象///並是就身中爲時也//二就年中爲時//王制云/春夏學詩樂/冬夏學書禮///三就日中爲時//前身中年中二時/而所學並日日修習/不暫廢也//今云學而時習之者/時是日中之時, ‘時習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서는 “時는 사철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뜻한다. 그러나, 하루 중의 晷刻들도 時라고 하니, 본래 의미를 확장시킨 것이다. 皇侃은 공부에는 세 가지 때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체질적으로 적당한 때이다. 「內則」에 “6살이 되면 숫자를 가르치고, 10살이 되면 글쓰기와 계산을 배운다. 13살이 되면 《樂》을 배우고, 《詩》를 외우며, 「勺」을 춘다. 15살이 되면 成童이 되어 「象」을 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모두 체질적으로 적당한 때를 이른다. 두 번째는 한 해 중 적당한 때다. 「王制」에 “봄과 가을에는 《詩》와 《樂》을 배우고, 가을과 겨울에는 《書》와 《禮》를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세 번째는 하루 중 적당한 때다. 앞에서 신체적으로, 그리고 한 해 중에서 적당한 때를 두 개 들었었다. 이렇게 매일 공부하여, 날마다 익히고, 잠시도 그만두지 않아야 한다. 본문의 學而時習之에 나오는 時는 세 가지 때 중, 바로 하루 중 적당한 때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時는 「日部」에 기재되어 있다. 「內則」, 「王制」는 《禮記》의 편이다. 「內則」에는 六年敎之數目이 六年敎之數與方名이라고 되어 있다. ◈ 習은 용언으로, ‘익히다’, ‘연습하다’,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익히다’라는 말이다. 《說文解字》 「習部」에 習/數飛也//从羽从白//凡習之屬皆从習, ‘習은 여러 번 날갯짓한다는 뜻이다. 羽와 白이 들어 있다. 習의 부류에는 모두 習이 들어 있다’라는 말이 있다. 《禮記》 「月令」에 鷹乃學習, ‘매가 習을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새 새끼는 처음부터 날 수가 없고, 날개를 펄럭이는 연습을 여러 차례 한 뒤에야 날 수 있다. 이와 같이, 習은 ‘반복해서 연습하다’라는 뜻이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習是修故之稱也, ‘習은 갈고 닦는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習/鳥數飛也//學之不已/如鳥數飛也, ‘習이란, 새가 여러 번 날갯짓을 한다는 뜻이다. 배우고, 멈추지 않는 모습이 새가 여러 번 날갯짓하는 모습과 같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程頤는 習/重習也, ‘習은 거듭 익힌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謝良佐는 時習者/無時而不習//坐如尸/坐時習也/立如齊/立時習也, ‘時習이라는 말은, 때때로 익히지 않는 경우가 없다는 뜻이다. 시체처럼 앉아서 하는 것을 坐時習이라고 하고, 재계하듯 서서 하는 것을 立時習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坐如尸/立如齊는 《禮記》 「曲禮 上」에 나오는 말이다. 아마 坐時習, 立時習이라는 말은 謝良佐가 《禮記》를 보고 만들어낸 표현이거나, 趙宋 시대에 사용되었던 표현일 것이다. ▼ 劉寶楠은 說文/習/鳥數飛也///引申爲凡重習學習之義//呂覽/審己注/習/學也///下章/傳不習乎/訓義亦同, ‘《說文》에는 “習은 새가 여러 번 날갯짓한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의미가 확장되어서 重習이나 學習이라는 뜻이 된 것이다. 《呂覽》 「審己」에 대한 주석에서는 “習은 學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다음 장에 나오는 傳不習乎의 習과 의미가 같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習은 《說文解字》 「習部」에 나온다. 《說文解字》에는 習/數飛也, ‘習은 여러 번 날갯짓한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呂覽》 「審己」는 《呂氏春秋》 「季秋紀 審己」를 이른다. 주석은 高誘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退而習之三年, ‘물러나서 3년 동안 習했다’에 달려 있다. ◈ 習之의 之는 學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다. ‘배운 것’, ‘배운 바’를 이른다. ▼ 皇侃은 之之於所學之業也, ‘學而時習之의 之는 배운 바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之者/詩/蓼莪/鄭箋云/之/猶是也///此常訓, ‘之에 대한 풀이다. 《詩》 「蓼莪」에 대한 鄭玄의 箋에서 “之는 이것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일반적인 의미다’라고 하였다. 「蓼莪」는 「小雅 小旻之什」에 속해 있다. 箋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欲報之德, ‘之 德에 보답하고 싶다’에 붙어 있다. ◈ 不亦은 일반적으로 乎와 같이 사용된다. 不亦 A 乎라고 하면 ‘또한 A하지 않겠느냐’, ‘역시 A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된다. 不이 붙어 있어서 부정문 같지만, 乎가 다시 반문하는 의문사이므로, 실질적으로는 부정문이 아니다. 이 不亦 A 乎이라는 표현은 고대 한문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말이다. 이 不亦에 대해서는, 不과 亦 중 어느 부분에 실제적인 의미가 있고, 어느 부분에 실제적인 의미가 없는지에 대해 이견이 있다. 不亦 A 乎에서 不을 뺀다면, ‘역시 A하지 않겠느냐’, ‘또한 A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되고, 亦을 뺀다면, ‘A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된다. 趙岐는 不을 날리고, 亦을 살려야 한다고 보았다. 《孟子》 「滕文公 上」에 不亦善乎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趙岐는 不亦者/亦也//問此/亦其善也, ‘不亦은 亦이라는 뜻이다. 이 점을 물은 일이 또한 훌륭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내용은 劉寶楠 역시 예로 들었다. 王引之는 趙岐의 주석에 반대하고, 不亦에서 亦을 날려야 한다고 보았다. 王引之는 《經傳釋詞》에서 凡言不亦者/皆以亦爲語助//不亦說乎/不說乎也//不亦樂乎/不樂乎也//不亦君子乎/不君子乎也//趙岐注/孟子/滕文公篇曰/不亦者/亦也///失之, ‘不亦이라는 표현들에서는 亦이 모두 어조사다. 不亦說乎는 “說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고, 不亦樂乎는 “樂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며, 不亦君子乎는 “君子답지 않겠느냐”라는 말이다. 《孟子》 「滕文公」에 대해 趙岐는 “不亦은 亦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이제 본문을 살펴 보자. 不亦說乎는 어떨까. 學해서 이미 기쁜데, 時習之해서 ‘또한’ 기쁘다는 점을 표현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亦에 실제적 함의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나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의 경우, 有朋自遠方來나 人不知而不慍을 學而時習之처럼 단계적으로 나누어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亦을 풀이하지 않고, ‘즐겁지 않겠느냐’, ‘君子답지 않겠느냐’처럼 번역해야 타당하다. 아니면, 不亦樂乎와 不亦君子乎의 亦을 有朋自遠方來나 人不知而不慍이 아니라, 문장 전체에서 즐거울 일이 하나가 아니다, 君子다울 일이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學而時習之/不亦說乎와 의미상 대구를 맞추지 못하게 되고, 또 사실 不亦을 온전하게 번역하기 위해 의미를 끼워 맞췄다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내 생각에는, 이 장의 句文들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부분의 不亦說乎를 不亦樂乎와 不亦君子乎의 경우처럼, 亦을 번역하지 않고 풀이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그러면 不亦說乎는 ‘說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되고, 不亦樂乎는 ‘樂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되며, 不亦君子乎는 ‘君子답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學而時習之를 두 단계로 나누어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다만, 皇侃, 邢昺, 劉寶楠은 不亦說乎의 亦에 의미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상기하였듯 學而時習之가 공교롭게도 그렇게 풀이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설들은 말미에 소개해 두었다. 다른 사례들은 어떨까. 《莊子》 「逍遙遊」에 而彭祖乃今以久特聞/眾人匹之/不亦悲乎, ‘그런데 요즘에는 彭祖가 장수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며, 뭇사람들도 나이를 가지고 자신을 彭祖에 비기려 드니, 悲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고, 「齊物論」에 偃/不亦善乎而問之也, ‘偃아, 善하지 않는가, 니가 그 점을 물은 점이’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역시 亦을 따로 번역하지 않아도 의미가 잘 표현된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亦/猶重也, ‘亦은 거듭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言亦者/凡外境適心/則人心說樂//可說可樂之事/其類非一/此學而時習/有朋自遠方來/亦說樂之事耳/故云亦//猶易云/亦可醜也/亦可喜也, ‘본문에서 亦이라고 표현한 점은 이렇다. 대체로, 외부의 상황이 마음에 들어 맞으면, 사람의 마음은 說하고, 樂해진다. 說하고 樂할 일들의 경우, 그 종류가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니, 본문에서 學而時習, 有朋自遠方來라고 한 상황 역시 說하고 樂할 일인 것이다. 그래서 亦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易》에서 “亦 醜할 만하다”, “亦 喜할 만하다”라고 한 경우와 같다’라고 하였다. 亦可醜也라는 말은 《易》의 觀에 대한 「象傳」, 大過에 대한 「象傳」, 解에 대한 「象傳」에 각각 나온다. 亦可喜也라는 말은 《易》의 損에 대한 「象傳」에 나온다. 邢昺은 또, 君子之行非一/此其一行耳/故云亦也, ‘君子의 모습은 하나가 아닌데, 이 부분에 기재되어 있는 내용은 그 중 하나의 모습일 뿐이다. 그래서 孔子가 “亦”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孟子/滕文公上/不亦善乎///趙岐注/不亦者/亦也, ‘《孟子》 「滕文公 上」에 不亦善乎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趙岐는 “不亦은 亦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즉, 쓰기로는 不亦이라고 쓰지만, 실제로 앞의 不은 실제적 의미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 說은 용언으로, ‘기쁘다’라는 뜻이다. 이 때는 ‘열’이라고 읽는다. 悅과 같다. 阮元은 說을 悅의 가차자로 보았다. 劉寶楠은 《說文解字》에 說만 나오고, 悅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說이 본래 글자이고, 悅이 속자일 것이라고 하였다. 참고할 만하다. 아마 說의 의미 중 ‘기쁘다’가 나중에 悅로 분화되었을 것이다. ▼ 時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면, 王肅은 說懌이라고 풀이하였다. 說懌 역시 ‘기쁘다’는 뜻이다. 陸德明은 說懌의 懌에 대해, 懌音亦, ‘懌은 亦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劉寶楠은 王肅의 주석 중 說懌에 대해, 說懌者/說文新附/懌/說也///注重言以曉人, ‘說懌에 대한 풀이다. 《說文新附》에는 “懌은 기쁘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주석에서는 기쁘다는 글자를 두 번 써서 사람들이 잘 이해하도록 하였다’라고 하였다. 《說文新附》는 어떤 책인지 모르겠다. ▼ 皇侃은 悅者/懷抱欣暢之謂也, ‘悅은 기쁜 마음을 품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陸德明은 說音悅/注同, ‘說은 悅로 읽는다. 주석에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陸德明은 樂 부분에서 또, 譙周云/悅深而樂淺///一云/自內曰悅/自外曰樂, ‘譙周는 “悅은 깊고, 樂은 얕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안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悅이고, 밖에서부터 생겨 나는 것이 樂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邢昺은 言學者以此時誦習所學篇簡之文/及禮樂之容/日知其所亡/月無忘其所能/所以爲說懌也//譙周云/悅深而樂淺也///一曰/在內曰說/在外曰樂, ‘배우는 사람은 이 방법을 가지고 때마다 篇과 簡에서 배운 바와, 《禮》, 《樂》의 대체를 외우고, 익혀서, 날마다 알지 못하는 것을 터득하고, 달마다 자신이 할 수 있었던 바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기쁘다고 하는 것이다. 譙周는 “悅은 깊고, 樂은 얕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감정이 내면에 있으면 說이라고 하고, 외면에 있으면 樂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譙周는 蜀漢 사람이다. ▼ 程頤는 說在心/樂主發散在外, ‘說은 마음에 깃든 바이고, 樂은 주로 발산하니, 외부에 깃드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邢昺이 인용한 譙周의 말과 같다. ▼ 朱熹는 說/悅同, ‘說은 悅과 같다’라고 하였고, 또 說/喜意也, ‘說은 기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皇本/說作悅/後竝放此//釋文出亦說云/音悅/註同///案說文說/說/釋也//从言兌聲//一曰/談說///蓋古人喜悅字多假借作說/唯皇本俱作悅/而先進篇/無所不說///子路篇/君子易事而難說也///又仍作說, ‘《皇侃本》에는 說이 悅로 되어 있다. 이 뒤로도 모두 그렇다. 《釋文》에는 亦說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데, “音은 悅이다. 주석에서도 그렇다”라고 되어 있다. 살펴 보건대, 《說文》에서는 說에 대해 “說은 풀다는 뜻이다. 言이 들어 있고, 兌라고 발음한다.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다는 뜻이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아마도 옛날 사람들은 喜悅이라는 표현을 說로 가차해서 사용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皇侃本》에는 說이 모두 悅로 되어 있는데, 「先進」의 無所不說, 「子路」의 君子易事而難說也에는 또 說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說/樂也///皇本凡說皆作悅//說文有說無悅/悅是俗體//夫子自言/發憤忘食/樂以忘憂///又稱顔囘好學/雖貧不改其樂//皆是說學有然也, ‘《爾雅》 「釋詁」에는 “說은 즐겁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皇侃本》에는 說이 모두 悅로 되어 있다. 《說文》에는 說은 나오지만, 悅은 나오지 않는다. 悅은 속자체일 것이다. 夫子는 스스로 “發憤하면 먹는 일도 잊고, 즐워서 걱정거리도 잊는다”라고 하였었고, 또 顔囘가 공부를 좋아하고, 가난하더라도 공부를 즐기는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고 칭찬하였다. 모두 공부를 즐기는 모습이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說에 대한 풀이가 없고, 怡/懌/悅/欣/衎/喜/愉/豫/愷/康/妉/般/樂也, ‘怡, 懌, 悅, 欣, 衎, 喜, 愉, 豫, 愷, 康, 妉, 般은 즐겁다는 뜻이다’라는 풀이가 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說은 「言部」에 기재되어 있다. 發憤忘食/樂以忘憂는 《論語》 「述而」에 나온다. 顔囘는 顏回와 같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하지 않겠느냐’처럼 해석된다. 不亦樂乎, 不亦君子乎의 乎도 모두 그렇다. ▼ 劉寶楠은 乎者/說文云/乎/語之餘也///廣雅/釋詁/乎/詞也///此用爲語助, ‘乎에 대한 풀이다. 《說文》에는 “乎는 말의 餘다”라고 되어 있고, 《廣雅》 「釋詁」에는 “乎는 詞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듯 어조사로 사용된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乎는 「兮部」에 기재되어 있다. 語之餘, 詞는 모두 어조사를 가리키는 표현일 것이다. ◈◈ 皇侃은 此以下/孔子言也//就此一章分爲三段/自此至不亦悅乎/爲第一明//學者幼少之時也/學從幼起/故以幼爲先也, ‘이 이하는 孔子의 말들이다. 이 장은 세 문단으로 나뉜다. 이 부분에서부터 不亦悅乎까지가 첫 번째 문단이다. 배우는 사람이 어릴 경우에 대한 말이다. 어릴 때는 자라남에 따라 배우니, 어릴 때의 행동을 처음에 설명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今此段明學者/少時法也/謂爲學者,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학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점은 어릴 때 이행해야 할 방식으로, 이를 爲學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學而時習之에 대해, 言人不學則己既學必因仍而修習日夜無替也, ‘사람이 공부하지 않으면, 자신이 이미 학문이 필요하다고 느껴, 이에 따라 배운 바를 익히고, 밤이든 낮이든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不亦說乎에 대해서는 言知學已爲可欣/又能修習不廢是/日知其所亡/月無忌其所能/彌重爲可悅/故云/不亦悅乎///如問之然也, ‘공부한 바를 깨달아 이미 欣한데, 또 이를 익혀 나가면서 그만 두지 않으니, 나날이 모르는 바를 깨우쳐 나가고, 다달이 늘어 가는 재능을 질투하는 자도 없으니, 더욱 悅한 것이다. 그래서 “또한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한 것이다. 질문이 그러한 바와 같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此章勸人學爲君子也, ‘이 장에서는 사람들에게 배워서 君子가 되어라는 점을 권면하고 있다’라고 하였고, 또 孔子曰/學者而能以時誦習其經業/使無廢落/不亦說懌乎, ‘孔子는 “배우는 자가 때마다 자기 經業을 외우고 익혀서, 실수가 없도록 하면, 역시 즐겁지 않겠느냐”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程頤는 時復思繹/浹洽於中/則說也, ‘때때로 다시 탐구하면, 마음 속에 젖어 들 터이니, 기뻐지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學者/將以行之也//時習之/則所學者在我/故說, ‘배운 것들은 앞으로 이행해야 할 것들이다. 배운 바를 때때로 익히면, 배운 바가 나에게 각인될 것이니, 그래서 기뻐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既學而又時時習之/則所學者熟/而中心喜說/其進自不能已矣, ‘이미 배운 내용을, 또 때때로 時習하면, 배운 바가 완숙해지고, 마음 속이 기뻐진다. 그러니 정진하게 되는 바가 저절로 끝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王曰/時者/學者以時誦習之//誦習以時/學無廢業/所以爲說懌 중 ▼ 王曰에 대해, 皇本作/王肅曰//後放此, ‘王曰이 《皇侃本》에는 王肅曰로 되어 있다. 이후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學者以時誦習之에 대해서는 皇本/之作也, ‘之가 《皇侃本》에는 也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所以爲說懌에 대해서는 皇本/懌下有也字, ‘《皇侃本》에는 懌 다음에 也가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則扞格而不勝에 대해, 十行本扞誤杆, ‘《十行本》에는 扞이 杆으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又文王世子云에 대해, 北監本子吳干, ‘《北監本》에는 子가 干으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弦謂以絲播時에 대해, 禮記文王世子注時作詩/是也, ‘《北監本》 「文王世子」의 주석에는 時가 詩로 되어 있다. 詩가 옳다’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 《論語註疏》에는 弦謂以絲播詩로 바르게 되어 있다. ▼ 邢昺의 疏 중 於功易也에 대해, 北監本毛本/於誤初//案/禮記文王世子注作/於功易成也, ‘《北監本》과 《毛本》에는 於가 初로 잘못되어 있다. 살펴 보면, 《北監本》 「文王世子」의 주석에는 於功易也가 於功易成也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三/日中時에 대해, 十行本閩本/日誤曰, ‘《十行本》과 《閩本》에는 日이 曰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공부하고 익혀서, 알지 못했던 점을 깨닫고, 식견이 넓어지니, 학자로서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자의 말 이어짐>

 

“[내 공부가 깊어져서, 의견을 나누기 위해] 친구들이 멀리서부터 찾아 온다면 즐겁지 않겠느냐.”(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 有朋은 아마 友朋의 오기일 것이다. 체언으로, ‘友와 朋’, 즉 요즘 말로 하면 ‘친구’가 된다. 그러면 友과 朋는 무엇이 다를까. 《周禮》 「地官司徒」에는 五曰聯朋友, ‘다섯 번째는 朋友를 聯하는 일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同師曰朋/同志曰友,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고, 孔穎達은 但朋疏而多/友親而少/故云同師曰朋/同志曰友, ‘다만 朋은 멀지만 많고, 友는 가깝지만 적으니, 그래서 스승이 같으면 朋이라고 하고,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고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朋은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람을, 友는 뜻하는 바가 같은 사람을 이른다. 宋翔鳳과 劉寶楠은 朋을 ‘제자’라고 풀이했는데, 이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는 아랫쪽에 기술해 두었다. 그런데 이 有朋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다. 包咸은 주석에서 朋만 풀이하고, 友는 풀이하지 않았다. 友를 풀이하지 않은 까닭은 友가 본문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班固가 저술한 《白虎通義》 「辟雍」에는 이 글이 朋友自遠方來라고 인용되어 있다. 《白虎通義》는 東漢의 章帝가 班固 등을 모아서 經傳들에 대해 토론하게 하여 지은 책이다. 皇侃은 주석에서 友와 朋을 모두 풀이하였고, 본문에 友가 생략되어 있다고 보았다. 陸德明은 어떤 판본에 友朋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을 밝혔으나, 友朋이 틀렸고, 有朋이 맞을 것이라고 하였다. 邢昺은 皇侃처럼, 본문에 友가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朱熹는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阮元은 《白虎通義》와 鄭玄의 주석을 예로 들면서, 옛 판본에는 友朋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劉寶楠은 朋과 友가 모두 제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 宋翔鳳의 설에 동의하면서, 《隸釋》의 「漢樓壽碑」에는 이 글이 有朋이라고 인용되어 있고, 또 《呂氏春秋》에 有人自南方來라는 말이 있어서, 본문의 글 구조와 흡사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아마 劉寶楠은 판본에 따라 友朋이라고도 되어 있었을 것이나, 有朋이 옳다고 생각한 것 같다. 俞樾은 《白虎通義》와 《文選》의 「輓歌」를 예로 들면서, 이 글이 友朋이라고 인용되어 있고, 따라서 友朋이 맞다고 보았다. 이처럼, 有朋이라고 인용되어 있는 사례, 友朋이라고 인용되어 있는 사례가 혼재하며, 이에 따라 학자들의 설도 양분되어 있다. 내 생각에는 包咸과 《白虎通義》가 가장 중요할 것 같다. 包咸은 기원전 6년에 태어나 기원후 65년에 죽었다. 《白虎通義》는 기원후 79년에 저술되었다. 이 둘이 여러 설들 중 가장 앞서며, 또 내용은 상반된다. 다만,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미 기원후 1세기에 有朋이라고 되어 있는 판본과 友朋이라고 되어 있는 판본이 나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皇侃과 邢昺은 본문의 有朋을 고치지 않으면서, 동시에 友에 대한 내용이 이 글에 포함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는 아마 두 사람이, 友와 朋이 대칭적인 표현이므로, 朋이 언급되었다면 友가 언급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皇侃과 邢昺은 友朋이라고 되어 있는 판본을 正本으로 택하지도 않았고, 또 본문의 有朋을 友朋으로 고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友를 함께 고려하였을 것이다. 俞樾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有朋이 友朋이므로, 友와 朋이 ‘함께’ 왔다는 말이 되고, 이에 따라 有朋自遠方來의 方을 竝, 즉 ‘함께’라고 풀이하였다. 실제로 고대에는 友와 朋이 함께 사용되는 예가 있었다. 友, 朋이 고대에는 구분되어 사용되었을지라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친구’라는 말처럼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을 것이다. 友朋의 경우, 《春秋左氏傳》 「莊公」 22년에 畏我友朋, ‘내 友朋이 두렵다’라는 逸詩가 인용되어 있고, 《韓非子》 「解老」에는 知交友朋之相助也宜, ‘知交와 友朋가 서로 도와야 한다는 점은 마땅하다’라는 말이 있으며, 《逸周書》 「大武解」에 三友朋, ‘세 번째는 友朋이다’라는 말이 있다. 글자의 순서를 바꾸어서 朋友라고 하면 용례가 훨씬 많다. 당장 《論語》에만 하더라도, 「學而」에 與朋友交而不信乎, ‘朋友와 交할 때 信하지 않았는가’라는 말이 있고, 《禮記》 「檀弓 上」에는 朋友之墓/有宿草而不哭焉, ‘朋友의 묘에 宿草가 있으면 곡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友朋이라고 된 판본이 옛날부터 존재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본문 역시 본래 友朋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정황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有朋自遠方來 그대로 본다면, 有는 용언으로 어떤 사건이 ‘있다’라는 말로 풀이해야 한다. 이 때 有는 명사구인 朋自遠方來를 받는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包咸은 同門曰朋, ‘배운 곳이 같은 사람을 朋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에 대해 皇侃은 鄭玄注司徒云/同師爲朋/同志爲友, ‘「司徒」에 대해 鄭玄은 “스승이 같으면 朋,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司徒」는 《周禮》 「地官司徒」의 한 부분이다. 인용된 주석은 五曰聯朋友, ‘다섯 번째는 朋友를 聯하는 일이다’라는 부분에 달려 있다. 皇侃은 또, 然何集注皆呼人名/唯苞獨云氏者/苞名咸/何家諱咸/故不言也, ‘그런데, 《何集注》에서는 사람을 부를 때 전부 이름을 기술하다가, 왜 유독 苞咸만 이름을 부르지 않고 苞氏라고 하였을까. 苞咸의 이름은 咸인데, 咸은 何晏 집안 사람의 諱이기에 苞咸이라고 기술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何集注》는 何晏의 《論語集解》를 이른다. 이 말은 본문 내용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풀이하자면 이렇다. 何晏은 馬融, 王肅 등에 대해서는 모두 성명을 모두 언급하면서, 包咸의 경우 만은 包氏라고 하였는데, 皇侃은 이를 何晏의 친족 중에 이름이 咸인 사람이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서 包氏라고 하였다고 추측하였다. 또, 邢昺은 包咸의 주석에 대해, 鄭玄注大司徒云/同師曰朋/同志曰友///然則同門者/同在師門以授學者也//朋即羣黨之謂//故子夏曰/吾離羣而索居///鄭玄注云/羣謂同門朋友也, ‘「大司徒」에 대한 주석에서 鄭玄은 “스승이 같으면 朋, 뜻이 같으면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그러한 즉, 包咸의 同門이라는 표현은 함께 스승의 문하에 있으면서 학문을 배우는 일을 이를 것이다. 朋이란, 곧 무리를 이르는 말이다. 따라서 子夏가 “나는 무리에서 떨어져서 살 곳을 찾겠다”라고 하자, 이에 대해 鄭玄은 “羣은 같은 문하의 朋友를 이른다”라고 설명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大司徒」는 《周禮》 「地官司徒」의 한 부분이다. 인용된 주석은 五曰聯朋友, ‘다섯 번째는 朋友를 聯하는 일이다’라는 부분에 달려 있다. 子夏의 말은 《禮記》 「檀弓 上」에 나온다. 劉寶楠은 包咸의 주석에 대해, 文選/古詩十九首注/引鄭注此文/與包同//同門者/謂之同處一師門也//禮/學記云/古之敎者/家有塾///注/古者仕焉而已者/歸敎於閭里/朝夕坐於門/門側之堂謂之塾///孔疏/周禮/百里之內/二十五家爲閭/同共一巷//巷首有門/門邊有塾///當夫子時/學校已廢/仕焉而已者多不任爲師/夫子乃始設敎於魯/以師道自任/開門授業/洙泗之間/必有講肄之所/而非爲舊時家塾矣, ‘《文選》 「古詩十九首」의 주석에, 본문에 대한 鄭玄의 주석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 인용된 주석이 包含의 주석과 같다. 同門이란, 같은 곳에서 같은 스승에게 배웠다는 뜻이다. 《禮》 「學記」에 “옛날 교육 기관으로는, 家에 塾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주석에서는 “옛날에는 관직을 마친 사람이 귀향해서는 閭里에서 가르쳤는데, 조석으로 門에 앉아 있었다. 門 옆의 堂을 塾이라고 한다”라고 풀이하였고, 孔穎達은 疏에서 “《周禮》에서는 백 里 안에서, 25家를 閭라고 한다고 했다. 이 家들은 巷을 공유하고 있었다. 巷의 첫 부분에는 門이 있었고, 門 가쪽에 塾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夫子가 살았던 때엔 학교는 이미 문을 닫았고, 벼슬을 마친 사람도 사람들을 가르치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이에 夫子는 魯나라에 敎를 만들고, 스스로 선생이 되어, 門을 열어 놓고 학문을 전수했으니, 洙水와 泗水 사이 지역에는 강의하는 곳이 반드시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옛날 家塾을 爲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하였다. 「古詩十九首」 중 「明月皎夜光」의 昔我同門友, ‘옛날에 나와 같은 문하에서 배우던 友들은’에 論語曰/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鄭玄曰/同門曰朋, ‘《論語》에 “朋이 멀리서부터 찾아 오는 일이 있으면 역시 즐겁지 않겠느냐”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鄭玄은 “同門을 朋이라 한다”라고 하였다’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는 李善의 주석이다. 《禮》는 《禮記》다. 「學記」에 대한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孔穎達이 인용한 《周禮》 내용은 아마 「地官司徒」의 내용인 듯한데, 정확히 어떤 부분을 이르는지는 모르겠다. ▼ 皇侃은 學記云/獨學而無友/則孤陋而寡聞///君子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出其言不善/則千里之外違之//今由我師德高/故有朋從遠方而來/與我同門共相講說/故可爲樂也//所以云遠方者/明師德洽被/雖遠必集也//招朋已自可爲欣/遠至彌復可樂/故云亦也//然朋疎而友親/朋至既樂/友至故忌言/但來必先同門/故舉朋耳, ‘「學記」에 “혼자만 공부하고 友가 없으면, 고루해져서 견문이 좁아진다”라는 말이 있다. 君子가 하는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도 응하지만, 하는 말이 선하지 않다면, 천 리 밖에서라도 거스를 것이다. 이 말은, 자기 스승의 德이 고고하기에, 朋이 먼 곳에서도 이를 좇아 와서, 자신과 같은 문하에서 의견을 나누니, 그래서 즐거워한다는 뜻이다. “먼 곳”이라고 한 까닭은, 스승의 德에 좋은 영향을 받아, 비록 멀더라도 반드시 모여 들기 때문이다. 朋을 불렀기 때문에 이미 스스로 기쁜데, 멀리에서 왔으니, 더욱 다시 즐거운 것이다. 그래서 “또한”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朋은 먼 사이고, 友는 가까운 사이다. 朋이 이미 도착해서 즐겁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友가 도착했다는 말을 피한 까닭은, 다만 동문을 우선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朋을 든 것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또, 皇侃은 江熙가 君子以朋友講習, ‘君子는 朋友와 토론한다’라고 한 말도 인용해 두었다. ▼ 陸德明은 朋/蒲弘反//有或作友/非, ‘朋은 蒲와 弘의 반절로 읽는다. 友라고 되어 있는 경우도 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 邢昺은 此言有朋自遠方來者/即學記云/三年視敬業樂羣也///同志謂同其心意所趣鄉也//朋疏而友親/朋來既樂/友即可知/故略不言也, ‘이 부분에서 有朋自遠方來라고 한 말은, 곧 「學記」에서 “3년이 되면 학업을 敬하는지, 羣과 즐겁게 지내는지를 살핀다”라고 한 말과 같다. 同志라는 말은, 마음 속 뜻이 향하는 바가 같다는 뜻이다. 朋은 멀고, 友는 가까운데, 朋이 찾아 와서 이미 즐거우니, 友도 그러하였음을 알 만하다. 그러므로 생략하고, 따로 말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 朱熹는 朋/同類也//自遠方來/則近者可知, ‘朋은 같은 부류라는 뜻이다. 먼 곳에서부터 찾아 오니, 가깝다는 점이 이해될 만하다’라고 하였다. ▼ 阮元은 釋文出有朋云/有或作友/非///案/白虎通辟雍篇引/朋友自遠方來///又鄭氏康成注此云/同門曰朋/同志曰友///是舊本作友字, ‘《釋文》에는 有朋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有가 友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지만, 틀렸다”라고 되어 있다. 살펴 보니, 《白虎通》 「辟雍」에는 이 글이 朋友自遠方來라고 인용되어 있다. 또, 鄭康成의 주석에도 또 “같은 문하에서 배운 사람을 朋이라 하고, 뜻이 같은 사람을 友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옛 판본에는 友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를 이른다. 鄭康成은 鄭玄을 이른다. 鄭玄의 字가 康成이다. ▼ 劉寶楠은 宋氏翔鳳樸學齋劄記/史記/世家/定公五年/魯自大夫以下/皆僭離於正道/故孔子不仕/退而修詩書禮樂/弟子彌衆/至自遠方/莫不受業焉///弟子至自遠方/即有朋自遠方來也//朋/即指弟子//故白虎通/辟邕篇云/師弟子之道有三/論語曰/朋友自遠方來///朋友之道也///又孟子/子濯孺子曰/其取友必端矣///亦指友爲弟子///按/宋說是也//釋文云/有或作友/非///白虎通引有朋作朋友/疑白虎通本作友朋/即釋文所載或本/後人乃改作朋友耳//隸釋載漢樓壽碑/有朋自遠///亦作有朋//盧氏文弨釋文考正云/呂氏春秋/貴直篇/有人自南方來///句法極相似//陸氏謂/作友非/是也, ‘宋翔鳳은 《樸學齋劄記》에서, “《史記》 「世家」에 ‘定公 5년에, 魯나라에서는 大夫부터 아랫사람들까지, 모두 참람하게 굴며 正道에 벗어난 짓을 하였다. 그래서 孔子는 출사하지 않고, 물러나서 《詩》, 《書》, 《禮》, 《樂》을 손보았다. 제자들은 더욱 많아져서, 遠方에서부터 찾아 와서 수업을 받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다. 제자들이 遠方에서 왔으니, 그래서 본문에서 有朋自遠方來라고 한 것이다. 朋은 곧 제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대해 《白虎通》 「辟邕」에 ‘師弟子할 도리에는 세 가지 경우가 있다. 《論語》에 朋友가 遠方에서부터 온다는 말이 있으니, 이것이 朋友의 도리다’라는 말이 있고, 또 《孟子》에는 子濯孺子가 ‘그 사람이 取한 友도 분명 올바를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글들에서도 友는 제자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宋翔鳳의 의견이 타당하다. 《釋文》에서는 “有가 友라고 되어 있는 판본도 있는데, 틀렸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白虎通》에서는 有朋이 朋友라고 인용되어 있다. 그러한 즉, 《白虎通》에서 참고한 《論語》에는 友朋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니, 이 《論語》가 곧 《釋文》에 기재되어 있는 或本일 것이다. 나중 사람들이 이에 따라 朋友라고 고쳤을 뿐이다. 《隸釋》에 실려 있는 「漢樓壽碑」에는 有朋自遠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 비석에도 역시 有朋이라고 되어 있다. 盧文弨는 《釋文考正》에서 《呂氏春秋》 「貴直」에 “有人自南方來”라는 말이 있다고 하였는데, 본문의 有朋自遠方來와 句法이 아주 비슷하다. 陸德明은 “友라고 된 판본은 틀렸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옳다’라고 하였다. 宋翔鳳이 인용한 《史記》 「世家」는 《史記》 「孔子世家」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다. 「辟邕」은 「辟雍」을 이른다. 《孟子》는 《孟子》 「離婁 下」를 이른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隸釋》은 洪适이 저술한 책이다. 洪适은 趙宋 高宗 때 사람으로, 鄱陽 출신이다. 「貴直」은 「貴直論」에 속해 있다. 내 생각은 이렇다. 宋翔鳳은 《史記》 「孔子世家」의 弟子彌衆/至自遠方를 들어, 이 구절이 바로 본문의 有朋自遠方來를 뜻하므로, 朋이 곧 孔子에게 수업을 받은 ‘제자’를 이른다고 보았다. 宋翔鳳은 또 《白虎通義》와 《孟子》를 예로 들어서 朋과 友가 모두 ‘제자’를 이른다고 주장하였다. 劉寶楠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白虎通義》에서는 분명 師弟子之道有三라고 되어 있으나, 이는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리’ 같은 말이 아니라, ‘弟子를 師할 도리’, 즉 ‘제자들에게 모범으로 보일 만한 도리’라는 뜻이다. 《白虎通義》 본문을 살펴 보면, 朋友之道, 父子之道, 君臣之道 세 가지가 제시되니, 어느 것도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라는 말은 아니다. 또, 《孟子》에 나오는 友 역시,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친구’라는 의미에 가깝지, 宋翔鳳이 이야기한 ‘제자’와는 거리가 있다.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전체의 내용이나 이 장 전체의 맥락을 생각해 보더라도 그렇다. 朋 혹은 友와 朋이 먼 데서부터 찾아 오는 까닭은, 학문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이지,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토론하고 의견을 나누는 일을, ‘배운다’라고 표현하더라도, 이는 함께 공부하는 사람들끼리 맺는 관계이지, 스승과 제자 사이의 관계라 할 수는 없다. 또, 사실 友와 朋은, ‘같은 무리’라는 의미로 사용될 수는 있어도, ‘제자’라는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宋翔鳳이 「孔子世家」 내용이 본문과 합치되는 듯하다는 점에 착안한 점에는 주목할 만하지만, 논증이 옳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 俞樾은 何晏集解引/包曰同門曰朋, ‘何晏의 《集解》에는 “包咸이 ‘同門을 朋이라고 한다’라고 했다”라는 말이 인용되어 있다’라고 하고, 樾謹按/釋文曰/有或作友///阮氏校勘記據白虎通辟雍篇引此文作/朋友自遠方來///洪氏頤煊讀書叢錄又引文選陸機輓歌/友朋自遠方來///證舊本是友字//今按說文方部/方/併船也//象兩舟省總頭形///故方卽有竝義//淮南氾論篇曰/乃爲窬木方版///高誘注曰/方/竝也///尙書微子篇曰/小民方興///史記宋世家作/竝興///是方竝同義//友朋自遠方來/猶云友朋自遠竝來/曰友曰朋明非一人/故曰竝來//然則有之當作友/尋繹本文卽可見矣//今學者誤以遠方二字連文/非是//凡經言方來者如周易不甯方來尙書作兄弟方來/義皆同//此其說各具本經, ‘《釋文》에서는 “有가 友라고 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라고 하였고, 阮元은 《校勘記》에서 《白虎通》 「辟雍」에 이 글이 朋友自遠方來라고 인용되어 있다는 점을 들었다. 洪頤煊은 《讀書叢錄》에서, 《文選》에 실려 있는 陸機의 「輓歌」에 이 글이 友朋自遠方來라고 인용되어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 글들은 옛 판본에 有가 友라고 되어 있다는 증거다. 또, 《說文》 「文方」를 살펴 보면, “方은 배가 나란히 있다는 뜻이다. 두 배의 선두 부분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본땄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方은 곧 竝이라는 뜻이다. 《淮南》 「氾論」에 “이에 나무를 비우고, 판을 方하여서”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方은 竝이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尙書》 「微子」에 “小民이 方하게 興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史記》 「宋世家」에는 方興이 竝興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方과 竝은 의미가 같다. 友朋自遠方來라는 말은 “友朋이 멀리서부터 함께 왔다”라는 말과 같다. 友라고 하고, 또 朋이라고 했으니, 한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그래서 竝來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한 즉, 有는 마땅히 友로 보아야 할 것이니, 이렇게 파고 들어서 본래 글이 어떠하였는지를 알아 낼 수 있겠다. 그런데 학자들은 遠方 두 글자를 한 단어로 잘못 풀이하였으니, 옳지 않다. 經들에는 方來라는 표현이 《周易》의 不甯方來, 《尙書》의 兄弟方來와 같이 사용되는데, 의미는 모두 같다. 이에 대한 논증은 각 經文 부분에 기재해 두었다’라고 하였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校勘記》는 《十三經注疏校勘記》를 이른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淮南》 「氾論」은 《淮南子》 「氾論訓」을 이른다. 《尙書》 「微子」는 《書》 「商書 微子」를 이른다. 《史記》 「宋世家」는 《史記》 「宋微子世家」를 이른다. 《史記》에는 小民乃竝興이라고 되어 있다. 乃는 아마 주격 조사일 것이다. 不甯方來는 《易》 중 比에 대한 「卦辭」, 「彖傳」, 困에 대한 「卦辭」에 나오는 말이다. 兄弟方來는 《書》 「周書 梓材」에 나오는 말이다. 마지막의 此其說各具本經은, 《群經平議》 중 《易》과 《書》를 다룬 부분에서 俞樾이 不甯方來와 兄弟方來를 풀이해 두었다는 뜻이다. ◈ 自는 부사어로, ‘~로부터’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遠方을 받는다. 즉, 自遠方은 ‘遠方에서부터’, ‘遠方으로부터’라는 말이 된다. 有朋 부분에 소개하였듯, 俞樾은 方을 竝, ‘함께’라고 풀이했는데, 俞樾의 설을 따른다면 自는 체언인 遠을 받아야 한다. 從도 自처럼 ‘~로부터’라는 말이다. 《論衡》 「變動」에 風從南方來者旱/從北方來者湛/東方來者爲疫/西方來者爲兵,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旱하고, 북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湛하며, 동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疫하고, 서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兵하다’라는 말이 있다. 《說苑》 「權謀」에는 有狂兕從南方來, ‘狂兕가 남쪽에서부터 온 일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예시들에서 從은 모두 ‘~로부터’라는 뜻이다. 皇侃과 劉寶楠은 自를 從이라고 풀이했는데, 從도 이렇듯 ‘~로부터’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自/猶從也, ‘自는 從과 같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廣雅/釋詁/自/從也, ‘《廣雅》 「釋詁」에 “自는 從이라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 遠은 ‘멀다’는 말인데, 여기서는 관형어로, ‘먼’이다. 遠方의 方을 한정한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遠/遐也, ‘《爾雅》 「釋詁」에는 “遠은 멀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遠에 대해 永/悠/迥/遠/遐也, ‘永, 悠, 迥, 遠은 멀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 遠方의 方은 체언으로, ‘곳’, ‘지역’이다. 地方의 方과 같다. 즉, 遠方은 ‘먼 곳’, ‘먼 데’가 된다. 有朋 부분에 인용하였듯, 俞樾은 方을 竝, ‘함께’라고 풀이했다. 有朋이 友朋인데, 友와 朋이 ‘함께’ 찾아 오므로, 方을 ‘함께’처럼 부사어로 풀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方來가 ‘함께 오다’라고 해석될 것이므로, 합리적이다. 또, 俞樾은 方이 竝으로 풀이된다는 문헌적 근거들도 들었다. 그러나 自 부분에서 내가 예로 든 《論衡》 「變動」에 風從南方來者旱/從北方來者湛/東方來者爲疫/西方來者爲兵, ‘바람이 남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旱하고, 북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湛하며, 동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疫하고, 서쪽에서부터 불어 오면 兵하다’라는 말이나 《說苑》 「權謀」에는 有狂兕從南方來, ‘狂兕가 남쪽에서부터 온 일이 있었다’라는 말에서처럼, ‘어떤 방향에서 왔다’는 의미로 方來가 사용되는 경우가 훨씬 많고, 일반적이며, 본문의 有朋自遠方來 역시 그렇듯 일반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方에 대해서는 俞樾의 설을 따르지 않았다. 俞樾의 설은 有朋 부분에 이미 전문을 인용해 두었으므로, 다시 인용하지는 않겠다. ▼ 劉寶楠은 淮南/兵略訓/方者/地也///禮/表記注/方/四方也, ‘《淮南》 「兵略訓」에는 “方은 땅이다”라는 말이 있다. 《禮》 「表記」에 대한 주석에 “方은 사방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淮南》은 《淮南子》다. 《禮》 「表記」는 《禮記》 「表記」다. 주석은 鄭玄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以受方國, ‘그래서 方國을 받았다’에 달려 있다. ◈ 來는 용언으로, ‘오다’, ‘찾아 오다’라는 말이다. 友와 朋이 먼 곳에서 자신을 ‘찾아 왔다’는 말이다. 그럼 왜 찾아 온다고 하였을까. 이 장의 句들을 연속적으로 이해해 보자. 앞서 學而時習之 하였으니, 공부해서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을 것이다. 성취를 이루었으니 명망이 퍼질 것이다. 명망이 퍼지니, ‘찾아 와서’ 따르는 사람도 생길 것이고, 또 함께 공부했거나, 생각이 비슷한 친구들, 즉 友朋들도 ‘찾아 와’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것이다. 아마 이런 의미가 아닐까 하다. 皇侃은 樂에 대한 주석을 참고하면, 학문에 대해 토론하기 위해 찾아 온다고 생각한 듯하다. 江熙는 善한 말이 파급되어, 아주 멀리서도 그 말에 응해 찾아 온다고 풀이하였다. 程頤 역시 江熙처럼 설명하였다. 劉寶楠은 학문이 성취된 효과가 현현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江熙가 君子以朋友講習/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遠人且至/况其近者乎, ‘君子는 朋友와 토론하는데, 하는 말이 선하면 천 리 밖에서도 응할 것이요, 멀리 있는 사람도 찾아 올 것이니, 하물며 가까운 사람이야 어떻겠느냐’라고 했다고 인용해 두었다. ▼ 程頤는 以善及人/而信從者眾, ‘善을 가지고 남에게 영향을 주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아진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爾雅/釋詁/來/至也, ‘《爾雅》 「釋詁」에 “來는 이르다는 말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고, 또 學記言/學至大成/足以化民易俗/近者說服/而遠者懷之/此大學之道也///然則朋來/正是學成之驗, ‘「學記」에 “學이 大成하기에 이르면, 백성들을 교화시키고, 풍속을 바꿀 수 있으며, 가까이 있는 자는 기뻐하며 복속해 올 것이요, 遠者는 사모할 것이니, 이것이 大學의 도리로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한 즉, 朋이 온다는 말은, 바로 학문이 이루어져서 드러난 효험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詁」에는 來에 대해 迄/臻/極/到/赴/來/弔/艐/格/戾/懷/摧/詹/至也, ‘迄, 臻, 極, 到, 赴, 來, 弔, 艐, 格, 戾, 懷, 摧, 詹은 이르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 不亦樂乎의 不亦은 앞의 不亦說乎에서와 같이, 不樂乎, ‘樂하지 않겠느냐’라고 풀이해야 할 것이다. 不亦의 亦은 의미가 없다. ◈ 樂은 용언으로, ‘즐겁다’는 말이다. 앞에서는 說이라 하였고, 여기서는 樂이라 하였는데, 說과 樂은 무엇이 다를까. 陸德明, 邢昺은 譙周의 말을 인용해서, 說은 내재적인 감정이고, 樂은 외향적인 현상이라고 하였다. 程頤도 똑같이 풀이하였다. 皇侃도 그렇게 풀이하였다. 내 생각은 이렇다. 본래 ‘기쁘다’는 말과, ‘즐겁다’는 말은 유의미하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學而時習之와 有朋自遠方來의 의미를 재고해 볼 때, 說을 내재적인 감정, 樂을 외향적인 현상이라고 풀이한 점은 타당해 보인다. 공부야 혼자 하는 일이니 學而時習之하면 내재적으로 기쁠 것이고, 友와 朋이 찾아 와서 토론하는 행위는 함께 하는 일이니 有朋自遠方來하면 외향적으로 즐거울 것이다. ▼ 皇侃은 悅之與樂/俱是懽欣在心//常等而貌跡有殊/悅則心多貌少/樂則心貌俱多/所以然者//向得講習在我/自得於懐抱/故心多曰悅//今朋友講說義味/相交德/音往復/形彰在外/故心貌俱多曰樂也, ‘悅과 樂은 모두 기쁨이 마음 속에 있는 모습이다. 이 둘은 대체로 같지만, 양태와 자취에 차이가 있다. 悅은 감정적으로 풍부하지만,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은 적다. 樂은 감정적으로도 풍부하고,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도 풍부하다. 그래서 悅과 樂을 구별한 것이다. 예전에 토론하였던 내용이 기억나, 느끼는 바를 저절로 깨달으니, 이에 감정이 풍부해져서 悅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朋友와 서로 토론하고, 德으로 사귀니, 말소리가 오가고, 그 모습은 겉으로 드러나, 이에 감정적으로도 풍부해지고,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도 풍부해지니, 樂이라고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故江熙云/君子以朋友講習/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遠人且至/况其近者乎//道同齊味/歡然適願/所以樂也, ‘이에 대해 江熙는 “친구끼리 道도 같고, 취향도 같으니, 기쁘게도 원하는 바에 맞아 들어갈 것이다. 그래서 樂한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 陸德明은 樂音洛//譙周云/悅深而樂淺///一云/自內曰悅/自外曰樂, ‘樂은 洛이라고 발음한다. 譙周는 “悅은 깊고, 樂은 얕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안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이 悅이고, 밖에서부터 생겨 나는 것이 樂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程頤는 以善及人/而信從者眾/故可樂, ‘善을 가지고 남에게 영향을 주면, 믿고 따르는 자가 많아진다. 그래서 즐거워질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樂/音洛, ‘樂은 洛이라고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蒼頡篇/樂/喜也///與說義同//易象傳/麗澤/兌/君子以朋友講習///兌者/說也//禮中庸云/誠者/非自誠己而已也/所以成物也///此文時習是成己/朋來是成物//但成物亦由成己/既已驗己之功修/又以得敎學相長之益//人才造就之多/所以樂也//孟子以得天下英才而敎育之爲樂/亦此意, ‘《蒼頡篇》에는 “樂은 기쁘다는 말이다”라고 되어 있으니, 樂은 說과 의미가 같다. 《易》 「象傳」에는 “잇달아 있는 못이 兌이니, 君子가 朋友와 함께 講習한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兌는 說이다. 《禮》 「中庸」에 “誠은 본래 자신을 이루는 데서 그치지 않으니, 이에 物을 이루어 준다”라는 말이 있는데, 본문의 時習이 바로 成己와 같고, 朋來가 바로 成物과 같다. 다만, 成物만 할 수는 없고, 成己해야 成物할 수가 있으니, 자신이 노력한 효험이 드러나야,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또 배워서, 서로 더욱 성장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인재가 많이 양성되니, 이에 樂한 것이다. 孟子는 天下의 인재들을 얻어서, 이를 가르쳐 기르는 일을 樂하다고 하였는데, 이 역시 본문과 같은 뜻이다’라고 하였다. 《蒼頡篇》은 李斯가 지었다는 자서다. 인용된 「象傳」은 兌에 대한 「象傳」이다. 《禮》는 《禮記》다. 得天下英才而敎育之는 《孟子》 「盡心 上」에 나오는 말이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皇侃은 此第二段明取友交也, ‘이 글은 두 번째 문단으로, 친구와 교분을 나누는 일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고, 또 又從有朋至不亦樂乎/爲第二明//學業稍成/能招朋聚友之由也//既學已經時/故能招友爲次也//故學記云/一年視離經辨志/三年視敬業樂羣/五年視博習親師/七年視論學取友/謂之小成///是也, ‘또, 有朋에서부터 不亦樂乎까지가 두 번째 문단이다. 학업이 점차 이루어지기에, 朋을 불러서 친구로 사귈 수 있다. 공부한 지 이미 시일이 지났으니, 친구를 부르는 일에 대한 말을 그 다음 차례로 둔 것이다. 이에 대해 「學記」에는, “첫 해에는 經을 나누고, 의미를 분별하는지를 살피고, 3년째에는 학업을 공경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지를 살피며, 5년째에는 폭넓게 익히고, 스승과 가까이 지내는지를 살피고, 7년째에는 학문을 논하고, 친구를 사귀는 모습을 살핀다. 이를 小成이라고 한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이 말이다’라고 하였다. 「學記」는 《禮記》의 편이다. ◈◈ 邢昺은 孔子曰/學業稍成/能招朋友/有同門之朋從遠方而來/與己講習/不亦樂乎, ‘孔子는 “학업이 점차 창성해져서, 朋友을 초청하는데, 이에 동문의 朋이 멀리서부터 찾아 와서, 자신과 토론을 나눌 수 있다면, 역시 즐겁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包曰/同門曰朋의 包曰에 대해, 皇本作/苞氏曰//後放此, ‘包曰이 《皇侃本》에는 苞氏曰로 되어 있다. 이후로도 그렇다’라고 하였다. ▼ 包咸의 주석 중 同門曰朋에 대해, 皇本/朋下有也字, ‘《皇侃本》에는 朋 다음에 也가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學業稍成에 대해, 十行本學誤覺, ‘《十行本》에는 學이 覺으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공부하고 익혀서 학문이 깊어지니, 친구들이 자신을 찾아 와 서로 토론하고, 의견을 나눈다. 학자의 입장에서, 이 만큼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

 

<공자의 말 이어짐>

 

“[학문을 이루었는데,] 남들이 [내 기량을] 몰라 주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군자답지 않겠느냐.”(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 人은 체언으로, ‘다른 사람’, ‘남’이다.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不知에 대한 주석에서 劉寶楠은 人을 군주나 卿, 大夫라고 풀이하여, 기용해 줄 줄 모른다고 풀이했는데,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 皇侃은 人/謂凡人也, ‘人은 보통 사람들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不知는 ‘알아 주지 않다’, ‘대우해 주지 않다’, ‘몰라 주다’라는 말이다. 不는 부정어다. 知를 한정한다. 知는 용언으로, ‘알아 주다’, ‘대우해 주다’는 말이다. ‘알아 주다’는 일반적인 의미고, ‘대우해 주다’는 知遇의 知와 같다. 학식이 성취되었는데도 남들이 이를 ‘알아 주지 못한다’, 혹은 이에 걸맞게 ‘대우해 주지 않다’라는 말이다. 劉寶楠은 기용해 줄 줄 ‘모른다’라고 풀이하였는데, 이 풀이가 ‘대우하다’와 같다. 孔子는 평생 天下를 주유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기를 바랬지만, 방해를 받기도 하고, 운이 따르지 않기도 하여,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대우하다’라는 해석도 타당하다. ▼ 劉寶楠은 人不知에 대해, 謂當時君卿大夫不知己學有成舉用之也, ‘人不知에 대한 풀이다. 자신이 학문을 이루었으나, 당시의 군주, 卿, 大夫가, 자신을 기용할 줄 몰랐다는 점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 不知而不慍의 而는 역접이다. ‘그런데도’처럼 해석된다. ◈ 不慍은 ‘성내지 않다’, ‘화내지 않다’, ‘원망하지 않다’라는 말이다. 不은 부정어다. 慍을 한정한다. 慍은 용언으로, ‘성내다’, ‘화내다’라는 말이다. 朱熹는 ‘화를 품고 있다’라고 풀이하였고, 劉寶楠은 鄭玄의 말을 인용해서 ‘원망하다’라고 해석하였는데, 이 설명이 마음에 든다. 남들이 알아 주지 않아서 생기는 화는, 남들이 자신을 알아 주지 않은 데 대한 ‘원망’이기 때문이다. ▼ 何晏은 慍/怒也, ‘慍은 성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皇侃은 慍/怒也, ‘慍은 화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李充이 慍/怒也, ‘慍은 성내다는 뜻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두었다. ▼ 陸德明은 慍/紆問反/怒也//鄭云/怨也, ‘慍은 紆와 問의 반절로 읽는다. 성내다는 뜻이다. 鄭玄은 “성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慍/紆問反, ‘慍은 紆과 問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고, 또 慍/含怒意, ‘慍은 화를 품고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鄭注云/慍/怨也///詩緜正義引說文同, ‘鄭玄은 “慍은 원망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詩》 「緜」에 대한 《正義》에서 인용한 《說文》 내용과 같다’라고 하였다. 「緜」은 《詩》 「大雅 文王之什」에 속해 있다. 《正義》는 《毛詩正義》 중, 孔穎達의 疏를 이른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孔穎達은 說文云/慍/怨也//恚/怒也///有怨者必怒之/故以慍爲恚, ‘《說文》에는 “慍은 원망하다는 뜻이고, 恚는 화내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원망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내므로, 그래서 毛亨은 慍을 恚라고 풀이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肆不殄厥慍, ‘끝내 그 慍을 없애지는 못했다’에 달려 있다. ◈ 不亦君子乎는 不君子乎와 같다. 亦은 의미가 없다. 이 점은 不亦說乎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君子는 용언으로, ‘군자답다’라는 말이다. 君子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君의 아들’이 된다. 그러면 君은 무엇일까. 《書》 「商書 說命 中」에 樹后王君公/承以大夫師長, ‘后王과 君公을 세우고, 大夫와 師長을 가지고 받들게 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后王/謂天子也//君公/謂諸侯也, ‘后王은 天子를 뜻하고, 君公은 諸侯를 이른다’라고 하였고, 蔡沈 역시 后王/天子也//君公/諸侯也, ‘后王는 天子고, 君公은 諸侯다’라고 하였다. 君은 일반적으로 ‘왕’을 뜻하지만, 이처럼 고대에는 ‘제후’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君子는, ‘왕의 자제’, 혹은 ‘제후의 자제’를 뜻하게 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고대에 君子라는 말은 일반적인 ‘귀족’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孔子 이래로, 君子는 儒家적인 덕목을 잘 수양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이 장에서도 그렇고, 「學而」 두 번째 장에는 君子務本/本立而道生, ‘君子는 근본을 닦기로 힘쓴다. 근본이 서면 도리가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14번째 장에는 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敏於事而愼於言, ‘君子는, 먹을 때는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있을 때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은 명민하게 처리하고, 말할 때는 삼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君子는 德을 닦은 사람이자, 또 儒家적인 수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학자의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孔子는 언제나 정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당시에 정치는 곧 天子나 諸侯, 또는 卿, 大夫 같은 귀족이 시행하는 바였다. 따라서 孔子는 아마 귀족, 즉 君子의 행동거지를 儒家적 덕목에 맞추어 표현하고, 이를 귀감으로 삼게 만들어서, 당시 귀족들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게 하고, 또 그 시대 이후로도 정치에 뜻을 둘 후학들이 儒家적인 君子를 목표로 정진할 수 있도록 하려 했을 것이다. 君子와 대조하여서는 小人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論語》 「爲政」에 君子周而不比/小人比而不周, ‘君子는 두루 사귀지, 파당을 이루지 않지만, 小人은 파당을 이루지, 두루 사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荀子》에도 이와 같이 君子와 小人이 대조되어 사용된다. 예를 들어 「不苟」에 君子能亦好/不能亦好//小人能亦醜/不能亦醜, ‘君子의 자태는 재주가 있어도 아름답고, 재주가 없어도 역시 아름답다. 반면 小人의 모습은 재주가 있어도 흉하고, 재주가 없어도 역시 흉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孔子 이후에 君子라는 표현이 반드시 儒家적인 맥락 속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莊子》 「大宗師」에 天之小人/人之君子//人之君子/天之小人也, ‘하늘 앞에 小人인 자는 사람에게는 君子요, 하늘 앞에 君子인 자는 사람에게는 小人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道德經》 31장에는 君子居則貴左/用兵則貴右, ‘君子는 居할 때는 左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군사를 부릴 때는 右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墨子》 「親士」에도 是故君子自難而易彼/眾人自易而難彼, ‘이러한 까닭으로, 君子는 어려운 일을 자신이 맡고, 쉬운 일은 남에게 맡기는데, 보통 사람들은 쉬운 일을 자신이 맡고, 어려운 일은 남에게 맡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道家나 墨家에서도 君子는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또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옛 학자들의 설은 다음과 같다. ▼ 皇侃은 君子/有德之稱也, ‘君子는 德을 품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朱熹는 君子/成德之名, ‘君子는 德을 이룬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君子者/白虎通/號篇/或稱君子者/道德之稱也//君之爲言羣也/子者丈夫之通稱也///禮/哀公問//君子也者/人之成名也, ‘君子에 대한 풀이다. 《白虎通》 「號」에는 “君子라는 호칭은 道德에 대한 호칭이다. 君子의 君은 群이라는 뜻이다. 君子의 子는 丈夫에 대한 통칭이다”라고 되어 있다. 《禮》 「哀公問」에는 “君子라는 것은 남이 지어 주는 명칭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白虎通》은 《白虎通義》다. 《禮》는 《禮記》다. ◈ 乎는 반문하는 의문사다. ◈◈ 何晏은 凡人有所不知/君子不怒, ‘대체로, 다른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는 경우가 있더라도, 君子는 화내지 않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에 대해 皇侃은 就注乃得兩通而於後釋爲便也//故李充云/君子忠恕/誨又不倦/何怒之有乎//明夫學者/始於時習中於講肆/終於敎授者也, ‘주석을 따르면 모두 잘 이해되지만, 나중의 풀이를 따르는 편이 편하다. 이에 대해 李充은 “君子는 忠恕한 데다, 남을 깨우치기에 게으르지 않으니, 어떻게 남에게 화를 낼 수 있겠느냐. 공부라는 것이 講肆에서 時習하는 일에서 시작되어, 남을 가르치는 데에서 끝난다는 점을 밝힌 말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後釋이 무엇을 이르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또, 凡注無姓名者/皆是何平叔語也, ‘이 주석처럼, 주석에 주석을 쓴 사람의 성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는, 모두 何平叔의 말이다’라고 하였다. 何平叔은 何晏이다. 본래 주석에는 馬曰, 孔曰처럼, 주석을 단 사람의 성이나 이름이 붙어 있는데, 凡人有所不知/君子不怒에는 아무 성명도 붙어 있지 않다. 이러한 주석이 何晏의 주석이라는 점을 밝힌 말이다. 何晏의 주석에 대해 劉寶楠은 詩/緜傳/慍/恚也///恚怒義同//皇疏/後一解云/君子易事/不求備於一人/故爲敎誨之道/若人有鈍根不能知解者/君子恕之而不慍怒之也///此即注義//焦氏循論語補疏/注言/人有所不知///則是人自不知/非不知己也//我所知而人不知/因而慍之/矜也///後漢/儒林傳注引魏略云/樂詳字文載/黃初中/徵拜博士//時有博士十餘人/學多褊/又不熟悉/惟詳五業並授//其或難質不解/詳無慍色/以杖畫地/牽譬引類/至忘寑食///此亦焦氏就注說證之//實則敎學之法/語之而不知/雖舍之亦可/無容以不慍卽稱君子//此注所云/不與經旨應也, ‘《詩》 「緜」에 대한 傳에서는 “慍은 恚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恚와 怒는 의미가 같다. 皇侃은 나중 사람의 풀이를 소개해 두었는데, 그 풀이는 다음과 같다. “君子는 모시기 쉽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원하지도 않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어떤 사람이 우둔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君子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성내지 않는다.” 이는 곧 주석의 풀이와 같다. 焦循은 《論語補疏》에서 “주석의 人有所不知라는 말은, 남이 본래 이해하지 못했다는 말이지, 자신을 알아 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다. 자신은 깨달았는데, 남은 이해하지 못하니, 이 때문에 慍하고, 괴로워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後漢》 「儒林傳」의 주석에서는 《魏略》를 인용하여 “樂詳은 字가 文載다. 黃初 연간에 博士로 徵拜되었다. 이 때 博士가 열 사람 정도 있었는데, 학문이 편협한 경우가 많아, 다방면에 고르지 못했다. 그러나 樂詳만은 五業이 모두 授하였다. 가끔 어려운 질문이 들어와서 풀이해 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樂詳은 빡친 기색을 보이지 않고, 지팡이를 땅에 그림을 그리며, 비슷한 학설을 끌고 와서 설명했으니, 자고 먹는 일을 잊을 정도였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焦循이 주석의 설을 就하였다는 점을 증명하는 말이라 하겠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학문을 가르칠 때에는 설명해 주어도 깨닫지 못한다면 내 버려 두어도 괜찮다고 한다. 그러한 즉, 이해받지 못하더라도 慍하지 않으니, 君子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주석의 내용은, 經文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것 같다’라고 하였다. 「緜」은 《詩》 「大雅 文王之什」에 속해 있다. 傳은 毛亨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肆不殄厥慍, ‘끝내 그 慍을 없애지는 못했다’에 달려 있다. 《後漢》 「儒林傳」은 《後漢書》 「儒林列傳 下」를 이른다. 주석은 李賢의 주석이다. 이 주석은 建安中/河東人樂詳條左氏疑滯數十事以問/該皆爲通解之/名爲謝氏釋/行於世, ‘建安 연간에 河東 사람 樂詳이 《左氏》에서 이해가 안 가는 일들 수십 가지를 물었는데, 該皆는 명쾌하게 풀이하였다. 이는 《謝氏釋》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유행하였다’에 붙어 있다. 語之而不知/雖舍之亦可는 《禮記》 「學記」에서 인용한 말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어떤 내용이 있는데, 이 내용을 자신은 이해했지만, 남은 이해를 못하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갑갑하고, 짜증이 난다. 그러나 君子는 갑갑해 하지도 않고, 짜증도 내지 않는다. 皇侃이 소개한 설도 이러한 의미요, 焦循의 설도 이러한 뜻이다. 즉, 이 풀이들에서는 남이 자신의 가치를 알아 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고 간주하고 있다. 그런데 劉寶楠은 「學記」를 인용해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의 입장에서, ‘내용을 이해하지 못해서 용납되지 못하였더라도 이에 대해 화내지 않으니 君子라고 한다’처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皇侃이 소개한 설이나, 아니면 焦循의 취지는,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해도 화내지 않으니 君子라고 할 만하다는 데 있다. 劉寶楠이 이 말을 거꾸로 이해하고 있지 않은지 의뭉스럽다. ◈◈ 皇侃은 又從人不知訖不亦君子乎/爲第三明//學業已成/能爲師爲君之法也//先能招友/故後乃學成爲師君也//故學記云/九年知類通達/強立而不反/謂之大成///又云/能博喻然後能爲師/能爲師然後能爲長/能爲長然後能爲君///是也, ‘또, 人不知에서 不亦君子乎까지가 세 번째 문단이다. 학업이 이미 성취되어, 스승이나, 군주의 모범이 될 수 있다. 먼저 친구를 부를 수 있게 되고, 그런 뒤에 비로소 학업을 이루어 스승이나 군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學記」에는, “9년째에는 만물을 꿰뚫고 통달하여, 굳건하게 서서 돌이키지 않으니, 이를 大成이라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폭넓게 깨우친 뒤에 스승이 되고, 스승이 된 뒤에 長이 될 수 있으며, 長이 된 뒤에 군주가 될 수 있다”라는 말이 있으니, 바로 이 말이다’라고 하였다. 皇侃은 또, 此第三段/明學已成者也, ‘이 부분은 세 번째 문단이다. 학업이 이미 성취된 경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라고 하고, 此有二釋//一言古之學者爲己/己學得先王之道/含章內映而他人不見知/而我不怒/此是君子之德也//有德己爲所可貴/又不怒人之不知/故曰亦也//又一通云/君子易事/不求備於一人/故爲敎誨之道/若人有鈍根不能知解者/君子恕之而不慍怒之也//爲君子者亦然也, ‘이 말에 대해서는 두 가지 풀이가 있다. 하나는 이렇다. 옛 사람들의 학문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공부하여 先王의 도리를 깨달아서 그 내용을 내면에 품고 있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그 점을 알아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화내지 않는다. 이것이 君子의 德이다. 德을 품는 일은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바요, 또 다른 사람이 알아 주지 않는다고 화내지도 않으니, 그래서 “또한”이라고 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이를 설명하며, “君子는 모시기 쉽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원하지도 않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어떤 사람이 우둔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君子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성내지 않는다. 君子가 되려는 자도 역시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君子易事/不求備於一人이라는 말은 《論語》 「子路」에서 인용한 말이다. 「子路」에 君子易事而難說也//說之不以道/不說也//及其使人也/器之, ‘君子는 섬기기 쉽지만 기쁘게 해 주기는 어렵다. 君子를 기쁘게 해 주되 道를 따르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부릴 때에는, 그 사람의 그릇에 맞추어 한다’라는 말이 있다. ◈◈ 邢昺은 孔子曰/既有成德/凡人不知而不怒之/不亦君子乎///言誠君子也, ‘孔子는 “이미 德을 이룬 바가 있는데, 보통 사람들이 이 점을 알아 주지 못하더라도 빡치지 않는다면, 역시 君子가 아니겠느냐”라고 한 것이니, 그 말이 진정 君子답도다’라고 하였다. 또 邢昺은 其說有二/一云古之學者爲己/已得先王之道/含章內映/而他人不見不知/而我不怒也//一云君子易事/不求備於一人/故爲敎誨之道/若有人鈍根不能知解者/君子恕之而不慍怒也, ‘何晏이 凡人有所不知/君子不怒라고 한 말은 이렇다. 이에 대한 설이 두 가지 있다. 한 설에서는, 옛날 공부하던 자들은 자신을 위해 공부하였는데, 이미 先王의 道를 깨달아, 글의 뜻을 품고, 이치가 내면에 비춰졌다면, 다른 사람이 이를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더라도, 그 자신은 화나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 다른 설에서는, 君子는 모시기 쉽고,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갖추기를 원하지도 않으니, 다른 사람을 가르칠 때에도, 어떤 사람이 우둔해서 이해하지 못한다면, 君子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성내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해석하였다’라고 하였다. 君子易事/不求備於一人이라는 말은 《論語》 「子路」에서 인용한 말이다. 「子路」에 君子易事而難說也//說之不以道/不說也//及其使人也/器之, ‘君子는 섬기기 쉽지만 기쁘게 해 주기는 어렵다. 君子를 기쁘게 해 주되 道를 따르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부릴 때에는, 그 사람의 그릇에 맞추어 한다’라는 말이 있다. ◈◈ 程氏는 雖樂於及人/不見是而無悶/乃所謂君子, ‘樂이 다른 사람에게 전이되었을 때, 비록 긍정 받지 못하더라도 근심하지 않는다면, 곧 君子라고 부를 수 있겠다’라고 하였고, 또 樂由說而後得/非樂不足以語君子, ‘樂이란, 說에 근거하여, 說한 뒤에 이르는 상태이다. 樂하지 않다면, 君子라고 표현할 만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朱熹의 《論語集註》에 程子의 말로 기재되어 있는데, 程頤와 程顥 중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程氏라고만 표기해 둔다. ◈◈ 尹焞은 學在己/知不知在人/何慍之有, ‘학식은 자신의 문제이고, 알아 주거나 알아 주지 않는 일은 다른 사람의 문제다. 그러니 어찌 성을 낼 일이 생기겠느냐’라고 하였다. ◈◈ 朱熹는 愚謂及人而樂者順而易/不知而不慍者逆而難/故惟成德者能之//然德之所以成/亦曰學之正/習之熟/說之深/而不已焉耳, ‘내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쳐 즐겁게 되는 일은, 본성을 따르는 일이요, 쉬운 일이다. 그러나 남들이 알아 주지 않았을 때 화를 내지 않는 일은, 본성을 거스르는 일이요,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오직 德을 이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이러하듯, 德이 이루어지는 모습은, 학문이 바로잡힌다고 표현되기도 하고, 공부가 완숙해진다고 표현되기도 하며, 기쁨이 깊어진다고 표현되기도 하지만, 끝이 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 劉寶楠은 禮/中庸記/子曰/正己而不求於人/則無怨//上不怨天/下不尤人///又論語下篇/子曰/莫我知也夫/不怨天/不尤人/下學而上達//知我者其天乎///正謂己之爲學/上達於天/爲天所知/則非人所能知/故無所怨尤也//夫子一生進德修業之大/咸括於此章//是故學而不厭/時習也/知也/誨人不倦/朋來也/仁也//遯世不見知而不悔/不知不慍也/唯聖者能之也//夫子生衰周之世/知天未欲平治天下/故唯守先王之道/以待後之學者//記者因以其言/列諸篇首, ‘《禮》 「中庸記」에는 “子가 말했다. ‘자신을 바로잡고, 남에게서 求하지 않는다면, 원망을 받지 않을 것이다. 위로는 하늘을 원망하지 말고, 아래로는 남을 탓하지 않아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또, 《論語》 뒷편에는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없도다. 그래도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남을 탓하지 않을 것이다. 아래로 공부하여서, 위로 이르면, 나를 알아 줄 이는 아마도 하늘일 것이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들이 바로 자신이 공부해서 위로 하늘에 이르면, 하늘이 알아 줄 일이요, 남이 알아 줄 수 있는 바가 아니라, 따라서 남을 원망할 바가 없다는 말이로다. 夫子는 한평생 위대하게 德을 닦고, 학문을 이루었는데, 그 내용이 이 장에 포괄되어 있다. 그러한 까닭에, 배우면서도 싫증내지 않으며, 때에 따라 익혔으니, 이 모습이 知요, 남을 가르치기도 게을리 하지 않아 朋이 찾아 왔으니, 이 모습은 仁이로다. 세상을 피해 드러나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으니, 이것이 남이 알아 주지 않아도 성내지 않는 모습이로다. 오직 聖人만이 할 수 있는 바이다. 夫子는 周나라가 쇠퇴한 시대를 살았는데, 하늘이 天下를 바로잡고자 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달았으니, 이에 다만 先王의 道를 지키면서, 후학들이 세상을 바로잡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이 말을 《論語》에 기록한 사람은, 이러한 의미를 좇아서 「學而」의 첫머리에 배치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中庸記」는 「中庸」을 이를 것이다. 莫我知也夫 부분의 인용문은 《論語》 「憲問」에 나온다. ◈◈ 阮元은 《十三經注疏校勘記》에서 다음과 같이 교정하였다. ▼ 何晏의 주석 중 君子不怒에 대해, 皇本作/君子不慍之也//攷文引足利本作君子不慍, ‘君子不怒기 《皇侃本》에는 君子不慍之也라고 되어 있다. 《攷文》에는 《足利本》에 君子不慍이라고 되어 있다는 점이 인용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 邢昺의 疏 중 古之學者爲己에 대해 北監本己誤巳, ‘《論語》에는 己가 巳로 잘못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己, 已, 巳의 경우, 옛 문헌들에 글자가 잘못 기재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蜀虎案 : 공부는 남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는 일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일일까. 모르는 것을 깨우치려는 까닭은, 자신의 식견을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말 그대로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일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남에게 드러내고자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또 진정 학문적으로 성장하려 하는 마음도 품고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대부분 그 중간에 있다. 그러나 君子는 그렇지 않다. 君子는 스스로 성장하기 위해 공부하지, 남에게 드러내기 위해 공부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순수하게 학문적 깊이를 남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기량을 갖추었음에도 大夫나 宰相으로 기용되지 못하더라도, 君子는 남을 원망하지 않고, 계속 학문을 닦고, 자신을 수양한다. 學而時習之와 有朋自遠方來 부분에서는 학문적 성장이, 그리고 이 人不知而不慍에서는 학문의 완성과 君子다운 처신이 무엇인지에 대해 드러나 있는 셈이다. 《荀子》 「勸學」에는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君子之學也以/美其身/小人之學也以/爲禽犢, ‘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신을 위하여 공부하였지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공부하고 있다. 君子는 공부해서 옛 사람들처럼 자신을 바로잡지만, 小人은 공부함으로써 날짐승이나 송아지를 보답으로 바라기나 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의미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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