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1 - 공부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2021. 9. 24. 09:56순자 이야기/원문 번역(하단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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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보기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래서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고, 원래 (음영)으로 처리해 둔 주석을 숫자로 바꾸고 하단으로 내려 두었습니다. 원래 글은 물론 원래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주석을 하단으로 내리니까 정작 중요한 주석과 중요하지 않은 주석을 구별하기가 너무 힘들어 지더라구요. 그래서 본문에다가 '*' 같은 것으로 표시해 둘까, 혹은 다르게 어떻게든 표시할까 고민을 많이 했지만, 결국 그렇게 하느니 원안을 보존하고 새로 글을 파 두는 게 낫다고 결론지었습니다. 보기가 편한 것이 우선이냐, 주석이 우선이냐, 모두 일리가 있지만, 결과적으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만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본인 편한 방식에 맞게 글을 봐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주석의 형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같습니다.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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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4일 13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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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을 본문과 함께 보고 싶으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6

 

순자 - 1 - 권학 - 1 - 공부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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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曰:

學不可以已。

靑,取之於藍而靑於藍;冰,水爲之而寒於水。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曓,不復挺者,輮使之然也。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

干、越、夷、貉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教使之然也。

詩曰:

嗟爾君子,無恆安息。靖共爾位,好是正直。神之聽之,介爾景福。

神莫大於化道,福莫長於無禍。

 

 

[옛] 군자는 [이렇게] 말했다.[각주:1]

 

"공부는 그만 둘 수가 없다."[각주:2]

 

푸른 빛깔은 쪽에서 얻지만 쪽 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변한 것이지만 물 보다 더 차갑다.[각주:3] 나무는 [본래] 곧아서 먹줄을 댈 수 있지만, [나무를] 구부려서 [둥근] 바퀴로 만들면, 그 구부러진 모양은 곱자를 댈 수 있을 정도가 된다. [그런데 일단 나무가 휘어지면 다시 펴지지 않는다.] 다시 [볕을 쬐어 나무를] 말리더라도, [나무가] 다시 곧아지지 않는 것은 구부린 행위 때문에 [나무가] 그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무가 휘어져서 다시 펴지지 않는 것처럼, 군자도 자신을 갈고 닦았기에 공부를 그만두지 않게 된 것이다.][각주:4]

 

나무는 먹줄을 대면 곧아지고,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는데.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헤아리니, 이에 나무가 곧아지고, 쇠가 날카로워지듯, [군자의] 식견은 명쾌해지고, 행동에는 잘못이 없어지게 된다.[각주:5] 높은 산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하늘이 높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고, 깊은 계곡을 내려다 보지 않으면 대지가 두껍다는 점을 깨달을 수가 없다. 이처럼, 선왕이 남긴 말을 배우지 않는다면, 학문이 훌륭하다는 점도 깨달을 수가 없는 법이다.[각주:6]

 

간나라와 월나라, [그리고] 이와 맥의 아이들은 태어났을 때 내는 소리는 똑같지만, 자라나면서 [각자의] 풍속은 달라진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아이들에게] 가르친 것[이 서로 달랐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처럼 나무가 구부러진 것은 그렇게 구부렸기 때문이고, 간나라와 월나라, 이와 맥의 아이들의 풍속이 다르게 된 것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선왕이 남긴 말을 배운다면 선왕처럼 올바르게 되지 않겠느냐.][각주:7]

 

[이에 대해] 《시》에 이런 말이 있다.[각주:8]

 

‘아아, 너희 군자들은 잠시라도 안주하지 말라. 너희들의 직무를 올곧게 처리하고, 정직한 태도를 좇아라. [그러면] 신명께서 [너희들의] 태도가 올바르다는 점을 살피시고, 커다란 복을 내리셔서 [너희를] 도우실 것이다.’[각주:9]

 

[모름지기] 신묘한 바로는 [올바른 길로] 교화하고 이끌어 주는 것 만큼 위대한 것이 없고, 복된 바로는 화를 당하지 않게 해 주는 것 만큼 나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학문을 익히는 일 만큼 신묘하고, 또 복된 바는 없을 것이로다.][각주:10]

 

 

 

  1. 君子曰, ◈ 君子는 체언으로, ‘군자’다. 여기서는 ‘옛 군자’처럼 번역해야 할 듯하다. 문맥상, 荀子가 어떤 君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君子를 荀子 자신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거나, 孔子를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소개해 보겠다. 君子는,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君의 아들’이 된다. 그러면 君은 무엇일까. 《書》 「商書 說命 中」에 樹后王君公/承以大夫師長, ‘后王과 君公을 세우고, 大夫와 師長을 가지고 받들게 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孔穎達은 后王/謂天子也//君公/謂諸侯也, ‘后王은 天子를 뜻하고, 君公은 諸侯를 이른다’라고 하였고, 蔡沈 역시 后王/天子也//君公/諸侯也, ‘后王는 天子고, 君公은 諸侯다’라고 하였다. 君은 일반적으로 ‘왕’을 뜻하지만, 이처럼 고대에는 ‘제후’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君子는, ‘왕의 자제’, 혹은 ‘제후의 자제’를 뜻하게 된다. 이로써 미루어 볼 때, 고대에 君子라는 말은 일반적인 ‘귀족’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孔子 이래로, 君子는 儒家적인 덕목을 잘 수양한 사람을 이르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論語》 「學而」 첫 장에 人不知而不慍/不亦君子乎, ‘다른 사람이 알아 주지 않더라도 원망하지 않는다면, 또한 君子가 아니겠느냐’라는 말이 있고, 또 두 번째 장에는 君子務本/本立而道生, ‘君子는 근본을 닦기로 힘쓴다. 근본이 서면 도리가 생겨난다’라는 말이 있으며, 또, 14번째 장에는 君子食無求飽/居無求安/敏於事而愼於言, ‘君子는, 먹을 때는 배부르기를 바라지 않고, 있을 때는 편안하기를 바라지 않으며, 일은 명민하게 처리하고, 말할 때는 삼간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君子는 德을 닦은 사람이자, 또 儒家적인 수양으로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인 학자의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왜 이렇게 변했을까. 내 생각은 이렇다. 孔子는 언제나 정치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당시에 정치는 곧 天子나 諸侯, 또는 卿, 大夫 같은 귀족이 시행하는 바였다. 따라서 孔子는 아마 귀족, 즉 君子의 행동거지를 儒家적 덕목에 맞추어 표현하고, 이를 귀감으로 삼게 만들어서, 당시 귀족들이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게 하고, 또 그 시대 이후로도 정치에 뜻을 둘 후학들이 儒家적인 君子를 목표로 정진할 수 있도록 하려 했을 것이다. 君子와 대조하여서는 小人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論語》 「爲政」에 君子周而不比/小人比而不周, ‘君子는 두루 사귀지, 파당을 이루지 않지만, 小人은 파당을 이루지, 두루 사귀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荀子》에도 이와 같이 君子와 小人이 대조되어 사용된다. 예를 들어 「不苟」에 君子能亦好/不能亦好//小人能亦醜/不能亦醜, ‘君子의 자태는 재주가 있어도 아름답고, 재주가 없어도 역시 아름답다. 반면 小人의 모습은 재주가 있어도 흉하고, 재주가 없어도 역시 흉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孔子 이후에 君子라는 표현이 반드시 儒家적인 맥락 속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莊子》 「大宗師」에 天之小人/人之君子//人之君子/天之小人也, ‘하늘 앞에 小人인 자는 사람에게는 君子요, 하늘 앞에 君子인 자는 사람에게는 小人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道德經》 31장에는 君子居則貴左/用兵則貴右, ‘君子는 居할 때는 左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군사를 부릴 때는 右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다. 한편 《墨子》 「親士」에도 是故君子自難而易彼/眾人自易而難彼, ‘이러한 까닭으로, 君子는 어려운 일을 자신이 맡고, 쉬운 일은 남에게 맡기는데, 보통 사람들은 쉬운 일을 자신이 맡고, 어려운 일은 남에게 맡긴다’라는 말이 나온다. 이처럼 道家나 墨家에서도 君子는 긍정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또 모범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宋基采는 본문의 君子에 대해 두 가지 설들을 소개해 두었다. 첫 번째는 冢田虎와 熊公哲의 의견으로, 이 君子가 荀子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지칭한 말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榮辱」에 我甚醜之, ‘나는 정말 이런 놈들이 싫다’라고 하면서, 荀子가 직접 자기 자신을 我라고 지칭한 사례가 있다는 점을 볼 때, 이 설을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두 번째는 王天海의 의견으로, 이 君子가 아마 孔子를 지칭하는 말일지도 모른다는 설이다. 宋基采가 인용하기로, 王天海는 《論語》 「學而」의 學而時習之, ‘배우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힌다’라는 말과, 《論語》 「述而」의 學而不厭, ‘배우면서 싫증내지 않는다’라는 말을 근거로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학문에 대한 이런 태도는 儒家 전반에 널리 퍼져 있기 때문에, 이 구절들을 가지고 본문의 君子가 孔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王天海의 주장은 오히려 다른 곳을 통해 어느 정도 증명할 수 있다. 상기하였듯, 《荀子》 「勸學」과 《大戴禮記》 「勸學」은 내용이 상당 부분 겹친다. 그런데 《荀子》 중, 吾嘗終日而思矣/不如須臾之所學也, ‘나는 종일 생각만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잠시 동안 공부한 것만 못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大戴禮記》에는 孔子가 한 말로 인용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부분에서 말을 하는 주체인 君子 역시 孔子일 가능성이 있다 하겠다. ◈ 曰은 용언으로, ‘말하다’는 뜻이다. 인용문을 표시하는 표현으로 사용되었다. ◈◈ 蜀虎案 : 「勸學」의 주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아마 옛 君子가 한 말을 인용하였을 것이다. ◈◈ 蜀虎又案 : 이 君子曰부터, 爲善不積邪/安有不聞者乎까지는 《大戴禮記》 「勸學」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글자나 내용이 다를 경우, 《大戴禮記》 「勸學」과 비교하면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2. 學不可以已, ◈ 學은 체언으로, ‘공부’, ‘학문’, ‘배움’이라는 말이다. ◈ 不은 부정어로, 可를 한정한다. ◈ 可는 용언으로, ‘가능하다’, ‘할 수 있다’라는 말이다. ◈ 以는 ‘~를’이다. 已를 받는다. ◈ 已는 체언으로, ‘멈춤’, ‘중단’, ‘끝냄’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不可以已는 ‘已를 할 수가 없다’, ‘멈추기를 할 수가 없다’, 즉 ‘그만 둘 수가 없다’라는 말이 된다. 已를 문장을 끝내는 조사로 볼 수도 있을 듯한데, 그러면 앞의 以를 已처럼 ‘끝내다’, ‘중단하다’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마지막에 矣가 한 마디 더 있다. 즉, 學不可以已矣가 된다. 이렇게 보면 본문의 已가 문장을 끝내는 조사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 蜀虎案 : 뒤에 이어지는 내용을 감안할 때, 이 말은 단순히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멈추지 않고 계속 공부함으로써, 자신을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의미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3. 靑/取之於藍而靑於藍//冰/水爲之而寒於水, ◈ 가장 앞에 있는 靑은 체언으로, ‘청색’, ‘파란색’, ‘푸른 빛깔’을 이른다. ◈ 取는 용언으로, ‘얻다’라는 말이다. 다만 여기서 取之於藍은, 판본에 따라 出之藍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고, 出於藍이라고 되어 있기도 하다. 王念孫은 出於藍이 원본이라고 보았고, 王應麟은 무엇이 맞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며, 王先謙은 出이 원래 글자라고 하더라도, 이미 唐代에 取로 바뀐 판본이 등장하므로, 무엇을 꼭 맞다고 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나 역시, 出이 원전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出이라 하든, 取라 하든, 의미는 본연적으로 같기 때문에, 이 점을 언급만 하고 지나가려 한다. 각 학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盧文弨는 靑取之於藍/從宋本//困學紀聞所引同//元刻作靑出之藍/無於字, ‘靑取之於藍이라고 한 말은 《宋本》을 따른 것이다. 《困學紀聞》에 인용되어 있는 바도 그렇다. 《元刻》에는 靑出之藍이라고 되어 있어서, 於가 없다’라고 하였다. 《元刻》은 《元刻本》을 이른다. 《困學紀聞》은 南宋 말기에 王應麟이 지은 서적이다. 저 인용문은 권10에 있는 「諸子」에 들어 있다. 원문에는 勸學篇青出之藍/作青取之於藍, ‘「勸學」에는 青出之藍이 青取之於藍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되어 있고, 또 監本未必是/建本未必非, ‘《監本》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고, 《建本》이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되어 있다. 《監本》과 《建本》은 모두 당시에 남아 있던 《荀子》의 판본일 것이다. 한편 王念孫은 困學紀聞云/靑出之藍/作靑取之於藍//監本未必是/建本未必非[自注云/今監本/乃唐與政台州所栞熙寧舊本/亦未爲善///又云/請占之五泰注云/五泰/五帝也///監本改爲五帝而刪注文]///是王以作出者爲是也//元刻作出之藍/即本於建本/監本作取之於藍者/用大戴記改之也//荀子本文自作出於藍/藝文類聚草部上/太平御覽百卉部三及意林埤雅引此竝作出於藍/新論崇學篇同//史記褚少孫續三王世家引傳曰/靑采出於藍而質靑於藍者/敎使然也///即是此篇之文//則本作出於藍明矣[宋錢佃本/從監本/作取之於藍/而所引蜀本/亦作出於藍/宋龔士卨荀子句解同]//今從王說, ‘《困學紀聞》에는 “靑出之藍이 靑取之於藍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監本》이 꼭 맞다고 할 수는 없고, 《建本》이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王先謙의 부연 : 自注에서는, “지금 《監本》은 오히려 唐與政이 台州에서 간행한 熙寧 시대의 옛 판본이니, 역시 좋다고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고, 또 “請占之五泰에 대한 주석을 보면, ‘五泰는 五帝다’라고 하였는데, 《監本》에서는 아예 五帝로 고치고, 주석을 없애 버렸다”라고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王應麟이 出이라고 적은 것은, 出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元刻》에 出之藍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곧 《元刻》이 《建本》을 기초로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監本》에 取之於藍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大戴記》에서 고쳐 쓴 글을 사용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荀子》 본문에는 본래 出於藍이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藝文類聚》 「草部 上」, 《太平御覽》 「百卉部 三」 및 《意林》, 《埤雅》에서 이 글을 인용하면서, 모두 出於藍이라고 한 것이다. 《新論》의 「崇學」에서도 그렇다. 《史記》 중 褚少孫이 덧붙인 「三王世家」에는 「傳」을 인용해서 “푸른빛이 쪽에서 나오는데도, 본질적으로 쪽 보다 푸른 것은, 敎하여서 그렇게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라고 한 말이 있는데, 이 것이 곧 이 편에서 나온 글이다. 즉, 본래 出於藍이라고 되어 있었음이 분명하다.[王先謙의 부연 : 《宋錢佃本》에는 《監本》을 좇아 取之於藍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蜀本》을 인용한 글에는 또 出於藍이라고 되어 있으며, 宋나라 龔士卨의 《荀子句解》에도 그렇게 되어 있다.] 따라서 王應麟의 설을 따른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의 부연 중 自注라는 것은 《困學紀聞》에 대한 王應麟 본인의 주석을 뜻한다. 이 글은 《困學紀聞》 내에 포함되어 있다. 《困學紀聞》에는 今監本/乃唐與政台州所刊熙寧舊本亦未爲善/當俟詳考//五泰/注云/五泰/五帝也///監本改爲五帝/而刪注文, ‘지금 《監本》은 오히려 唐與政이 台州에서 간행한 熙寧 시대의 옛 판본이니, 역시 좋다고 할 수가 없다. 마땅히 상세하게 고찰해 보아야 할 것이다. 五泰에 대해서 주석에는 “五泰는 五帝다”라고 되어 있는데, 《監本》에서는 아예 五帝로 고치고, 주석을 없애 버렸다’라고 되어 있다. 몇 글자가 다를 뿐, 王先謙이 인용한 바와 같다. 熙寧은 北宋 神宗 때의 연호로, 1070년 즈음을 이른다. 請占之五泰라는 말은 《荀子》 「賦」에 나온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를 이른다. 君子曰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이 편 내용은 《大戴禮記》 「勸學」에도 거의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藝文類聚》 「草部 上」은 아마 「藥香草部 上」을 이를 것이다. 「藥香草部 上」에는 孫卿子曰/青出於藍而青於藍, ‘《孫卿子》에는 푸른색은 쪽에서 生하는데도, 쪽 보다 더 푸르다는 말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孫卿子는 곧 荀子를 이른다. 《太平御覽》 「百卉部 三」에는 孫卿子曰/青生於藍/而青於藍, ‘《孫卿子》에는 푸른색은 쪽에서 生하는데도, 쪽 보다 더 푸르다는 말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意林》 「荀卿子 十二卷」에는 青出于藍而青于藍, ‘푸른색은 쪽에서 나오는데도 쪽 보다 더 푸르다’라고 되어 있다. 《意林》에는 「藍」 부분에 荀子曰青出之藍而青於藍, ‘《荀子》에는 “푸른색은 쪽에서 나오는데도 쪽 보다 더 푸르다”라는 말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新論》은 北齊의 劉晝가 지은 《劉子新論》을 이른다. 《劉子新論》 「崇學」에는 青出於藍而青於藍, ‘푸른색은 쪽에서 나오는데도 쪽 보다 더 푸르다’라고 되어 있다. 龔士卨은 南宋 理宗 때 사람이다. 《荀子句解》의 본문은 찾지 못하였다. 한편 王先謙은 群書治要作靑取之藍/是唐人所見荀子本/已有作取者//且大戴記即用荀子文/亦作靑取之於藍/不得謂荀子本作出於藍/而作取者爲非也//宋建監本岐出/亦緣所承各異/故王氏應麟無以定之//謝本從盧校/今仍之, ‘《群書治要》에는 靑取之藍이라고 되어 있다. 이를 감안하면, 唐代 사람들이 본 《荀子》의 판본에는 이미 取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또, 《大戴記》에서도 《荀子》의 글을 인용하여서, 역시 靑取之於藍이라고 써 두었으니, 《荀子》에 본래 出於藍이라고 되어 있었다고 해서, 取라고 되어 있는 판본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宋本》, 《建本》, 《監本》에는 이렇게 되어 있기도 하고, 저렇게 되어 있기도 하니, 이 역시 각 판본이 승계하여 근거한 바가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王應麟도 한 가지가 맞다고 확정하지 않았던 것이로다. 다만 《謝本》은 盧文弨의 교정을 따랐으니, 그대로 따르면 되겠다’라고 하였다. 마지막에 나온 《謝本》은 淸代 浙江 사람인 謝墉이 지은 《荀子箋釋》을 이른다. 宋基采는 王先謙이 《荀子集解》를 편찬할 때, 《荀子箋釋》을 저본으로 삼았고, 또 《荀子箋釋》이 盧文弨의 교정을 그대로 따른 판본이기 때문에 王先謙이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고 설명하였다. ◈ 取之於藍의 之於는 ‘~에서’라는 뜻이다. 取之於藍의 藍을 받는다. ◈ 藍은 체언으로, ‘쪽’, ‘쪽풀’이다. 풀의 일종인데, 이 풀에서 파란색 염료를 얻는다. ◈ 而靑於藍의 而는 역접이다. ‘그런데’, ‘그러나’처럼 해석된다. 而寒於水의 而도 그렇다. ◈ 而靑於藍의 靑은 용언으로, ‘푸르다’는 말이다. ◈ 而靑於藍의 於는 비교하는 말이다. ‘~보다’, ‘~보다 더’처럼 해석된다. 而寒於水의 於도 그렇다. ◈ 冰은 체언으로, ‘얼음’이다. ◈ 水는 체언으로, ‘물’이다. ◈ 水爲之의 爲는 아마 용언으로, ‘되다’, ‘변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水爲는 ‘물이 그렇게 되다’, ‘물이 변하다’라는 말이 된다. ◈ 水爲之의 之는 의미 없는 조사 같다. ◈ 寒은 용언으로, ‘차갑다’라는 말이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冰/水爲之가 水則爲冰, ‘물은 얼음으로 변한다’라고 되어 있다. ◈◈ 楊倞은 以喩學則才過其本性也, ‘비유를 통하여, 공부하면 재주가 본성을 뛰어 넘을 수 있다는 점을 보였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楊倞의 설명이 타당하다. 쪽에서 푸른빛을 얻고, 물이 얼음이 되지만, 푸른빛은 쪽 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 보다 더 차갑다. 이렇듯, 본래 타고난 품성이 게으르든, 성실하든 간에, 그 품성을 극복하고, 더 나은 상태가 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뒤에 이어지는 내용의 맥락 역시 같다. [본문으로]
  4. 木直中繩/輮以爲輪/其曲中規/雖有槁曓/不復挺者/輮使之然也, ◈ 木은 체언으로, ‘나무’라는 뜻이다. ‘목재’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 直은 용언으로, ‘곧다’는 말이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木直而中繩, 즉 木直과 中繩 사이에 而가 더 들어 있다. 여기서 而는 ‘그래서’처럼 해석된다. ◈ 木直中繩은 木直而中繩, ‘木이 直하여서 繩에 中하다’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中繩의 中은 용언으로, ‘맞아 들어가다’, ‘들어 맞다’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中繩, ‘繩에 中하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먹줄에 맞다’, ‘먹줄을 댈 수 있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中規의 中 역시 의미가 같다. 《春秋左氏傳》 「定公」 원년에 子家子亟言於我/未嘗不中吾志也, ‘子家子는 나에 대해 亟하게 말을 하였는데, 내 뜻에 中하지 않은 적이 없다’라는 말이 있고, 《莊子》 「養生主」에 莫不中音, ‘음률에 中하지 않는 경우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으며, 「養生主」 바로 뒷부분에 또 中經首之會, ‘「經首」의 박자에도 中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 繩은 체언으로, ‘먹줄’이다. 먹줄은 끈이나 실에 먹을 묻혀서, 목재처럼 가공해야 할 대상에, 가공할, 즉 자를 지점을 선으로 표시하는 도구다. 그런데 먹줄은 곧은 나무에나 사용하지, 굽은 나무에는 보통 사용하지 않는다. 먹줄을 쓸 때는, 한 쪽을 고정시켜 놓고, 다른 쪽을 자르려는 선 모양으로 팽팽하게 당긴 뒤, 목재 면의 수직 방향으로 튕긴다. 그러면 먹줄이 자르려는 선 모양으로 목재에 부딪힐 것이고, 그러면 먹줄에 묻어 있는 먹 때문에 나무에 선 모양이 생긴다. 먹줄을 쓰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먹줄은 아마도 곧은 나무에 사용하기 쉽고, 굽은 나무에는 사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먹줄은 사용할 때 팽팽하게 당겨야 하는데, 줄을 팽팽하게 당기면 곧아지므로, 그 모습이 나무가 ‘곧은’ 모습과 또한 같아진다. 아마 이러한 까닭으로, 木直中繩, ‘나무는 곧아서 먹줄을 댈 수 있다’ 혹은 ‘나무는 곧아서 먹줄에 꼭 맞다’라고 표현하였을 것이다. ◈ 輮以爲輪의 輮는 체언으로, 아마 ‘구부림’, ‘휘게 함’이라는 말일 것이다. 《易》 「說卦」에 爲矯輮, ‘矯하기도 하고, 輮하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孔穎達은 使曲者直爲矯/使直者曲爲輮, ‘굽은 것을 곧게 만드는 것을 矯라고 하고, 곧은 것을 굽게 만드는 것을 輮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즉, 輮는 곧은 것을 ‘굽히다’는 말이다. 楊倞은 輮/屈, ‘輮는 굽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宋基采는 輮를 煣와 통하는 글자로 보았는데, 煣는 ‘불을 쬐서 나무를 구부리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宋基采의 설에는 정황상 설득력이 있다. 이 문구 바로 뒤에 雖有槁曓, ‘비록 또 槁曓하더라도’라는 말이 있는데, 槁曓가 바로 ‘볕을 쬐어서 말리는 일’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무를 구부릴 때는 약한 열을 가해서 나무를 부드럽게 만든다. 이 방법은 지금까지도 사용된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句에 나온 輮 역시 기본적으로 ‘구부린다’는 뜻이되, 槁曓처럼 ‘열을 가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宋基采는 輮와 煣가 통한다고 하였는데,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하였는지 모르겠다. ◈ 以는 ‘~함으로써’라는 말이다. 輮를 받는다. 즉, 輮以는 ‘輮함으로써’, 즉 ‘구부림으로써’, ‘휘게 함으로써’라는 말이 된다. ◈ 爲輪의 爲는 용언으로, ‘~로 만들다’라는 말이다. 즉, 爲輪은 ‘輪으로 만들다’라는 말이 된다. 《周禮》 「春官宗伯」에 典同/掌六律六同之和/以辨天地四方陰陽之聲/以爲樂器, ‘典同은 六律과 六同의 조화를 관장하여, 天地와 四方, 陰陽의 소리를 변별하고, 이를 가지고 악기를 爲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爲/作也, ‘爲는 만들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爾雅》 「釋言」에는 作/造/爲也, ‘만들거나 짓는 것을 爲라고 한다’라는 말도 있다. 《莊子》 「逍遙遊」에는 萬物以爲一, ‘萬物을 하나로 爲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爲 역시 ‘만들다’는 뜻이다. ◈ 輪은 체언으로, ‘바퀴’, ‘수레바퀴’라는 말이다. ◈ 其曲의 其는 대명사로, 木 혹은 輪을 가리킨다. ◈ 曲은 체언으로, ‘굽어진 정도’, ‘휘어진 정도’, ‘곡률’을 뜻한다. 여기서는 ‘구부러진 모양’이라고 번역하였다. ◈ 規는 체언으로, ‘곱자’를 뜻한다. 지금의 컴퍼스처럼, 원을 그리는 도구였다. ◈ 雖는 부사어로, ‘비록’, ‘설사’, ‘~하더라도’라는 말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雖가 빠져 있다. ◈ 有는 부사어로, ‘또’, ‘다시’라는 말이다. 又와 같다. 여기서는 ‘다시’라고 해석하면 타당하겠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有가 빠져 있다. ◈ 槁曓은 용언으로, 아마 ‘말리다’, ‘건조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槁와 曓은 모두 ‘마르다’는 말이다. 먼저 槁는 ‘마르다’는 말이다. 《孟子》 「滕文公 下」에 夫蚓/上食槁壤/下飲黃泉, '저 지렁이는 위로는 槁壤을 먹고, 아래로는 흙탕물을 마신다'라는 말이 있는데, 朱熹는 槁壤/乾土也, '槁壤은 마른 흙이다'라고 하였다. 즉, 槁는 乾, '마르다', '물기가 없다'라는 뜻이다. 《莊子》 「齊物論」에도 形固可使如槁木/而心固可使如死灰乎, ‘너의 모습은 진정 槁한 나무 같다고 할 만하구나. 그런데 사람의 정신도 진정 타고 남은 재처럼 될 수 있단 말인가’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의 槁 역시 ‘마르다’는 뜻이다. 다음으로, 曓은 아마 㬥과 통용되었던 글자인 듯 보인다. 㬥은 ‘말리다’는 뜻이다. 《說文解字》 「夲部」에는 曓/疾有所趣也//从日出𠦍廾之, ‘曓은 바빠서 서두르는 바가 있다는 뜻이다. 日이 들어 있고, 나아가서 받드는 모양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說文解字》 「日部」에는 㬥/晞也//从日从出/从𠬞从米, ‘㬥은 말리다는 뜻이다. 日, 出, 𠬞, 米가 들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즉, 曓은 ‘바쁘다’, ‘서두르다’는 의미일 것이고, 㬥은 ‘말리다’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槁曓이 같은 의미의 글자가 붙어서 한 단어의 용언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曓 역시 槁와 같이 ‘마르다’ 혹은 ‘말리다’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즉, 曓은 㬥의 의미로 해석된다. 이 두 글자는 西漢이나 東漢 초기, 즉 《說文解字》가 저술될 즈음까지는 구분되었을 것이나, 적어도 東漢 후기부터는 통용되었을 것이다. 이 점은 《說文解字》에 曓과 㬥이 나뉘어 기재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周禮》의 「冬官考工記」에 대한 鄭玄의 주석에서, 曓이 ‘말리다’, ‘마르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통하여 알 수 있다. 鄭玄의 주석은 이 문단 말미에 소개해 둔 盧文弨의 설 안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金善美는 「先秦文獻에 나타난 同源字 硏究 - 舌音과 脣音을 중심으로」에서, ‘고대에는 㬥과 曓이 구별되지 않았으나, 지금은 모두 暴으로 사용한다’라고 하였다. 이 설이 맞다면, 曓과 㬥은 본래 다른 글자였으나, 나중에 暴이라는 글자로 합쳐져서 사용되었을 것이므로, 본래 㬥이었으나, 나중에 暴으로 글자가 합쳐진 뒤, 暴의 옛 글자인 曓을 㬥과 같은 글자로 간주하고, 曓으로 본문을 바꾸어 적었거나, 두 글자가 처음엔 구별되었지만 나중에는 자연스레 통용되게 되어, 글자를 바꾸어 적었을 수도 있겠다. 宋基采는 曓을 曝의 옛 글자라고 하였는데, 曝 역시 ‘말리다’, ‘볕을 쬐다’라는 뜻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槁曓이 枯暴이라고 되어 있는데, 枯는 ‘마르다’는 뜻이며, 暴 역시 曓과 㬥이 변한 글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마르다’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槁/枯//曓/乾, ‘槁는 마르다는 뜻이고, 曓은 마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盧文弨는, 曓/舊本作暴/非//說文/一作㬥/晞也//一作曓/疾有所趣也///顔氏家訓分之亦極明//今此字注雖訓乾/然因乾而曓起/則下當从本//案考工記輪人槁作藃/鄭注云/藃/藃曓/陰柔後必橈減/幬革曓起///釋文/步角反/劉步莫反/一音蒲報反, ‘曓은 옛 판본에는 暴이라고 되어 있었으나, 틀렸다. 《說文》에는, 어떤 데에는 㬥이라고 되어 있고, 마르다는 뜻이라고 하였고, 어떤 데에는 曓이라고 되어 있고, 급해서 서두르는 바가 있다는 뜻이라고 하였다. 《顔氏家訓》에서도 이 글자를 구분해 놓았으니, 아주 분명하다고 하겠다. 지금 이 글자에 대한 주석에서는, 그 뜻을 마르다라고 하기는 하였지만, 그러나, 말라서 뒤틀려 일어난다는 뜻이라면, 글자의 아랫쪽 부분은 마땅히 本이 되어야 한다. 또, 「考工記」의 輪人 부분을 살펴 보면, 槁가 藃라고 적혀 있는데, 鄭玄은 주석에서, “藃는 藃曓하다는 뜻이다. 햇볕에 말리지 않고 물렁물렁하게 두면, 나중에 반드시 휘어지고 상하여서, 幬革이 뒤틀려서 일어난다”라고 하였다. 《釋文》에는 曓에 대해 “步와 角의 반절로 읽는다. 劉昌宗은 步와 莫의 반절로 읽는다고 했다. 蒲와 報의 반절로 읽기도 한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顔氏家訓》은 北齊의 顔之推가 지은 책이다. 그러나 《顔氏家訓》의 어떤 부분에서 曓과 㬥이 구분되어 있다고 하는지는 모르겠다. 「考工記」는 《周禮》의 「冬官考工記」를 이른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이다. 劉昌宗은 東晉 사람으로, 《周禮音》을 지었다. ◈ 不復挺의 不은 부정어다. 挺을 한정한다. ◈ 復는 부사어로, ‘다시’다. ‘부’라고 읽는다. 挺을 한정한다. ◈ 挺은 용언으로, ‘곧다’, ‘곧아지다’라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5년에 周道挺挺/我心扃扃, ‘周나라의 道가 挺挺하니, 내 마음은 扃扃하다’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挺挺/正直也, ‘挺挺은 바르고 곧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즉, 挺은 ‘바르다’ 혹은 ‘곧다’, ‘올곧다’는 뜻일 것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挺/直也//晏子春秋作不復贏矣, ‘挺은 곧다는 뜻이다. 《晏子春秋》에는 不復挺者가 不復贏矣로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盧文弨는 又注贏/舊本訛作羸//案贏/緩也//今據晏子雜上篇改正/亦作嬴, ‘또, 주석 중 贏은 옛 판본에는 羸로 잘못되어 있었다. 살펴 보건대, 贏은 느슨해지다는 뜻이다. 이제 《晏子春秋》 「雜上」에 근거하여, 역시 嬴으로 고친다’라고 하였다. 《晏子春秋》 「雜上」이란, 《晏子春秋》 「內篇 雜上」을 이른다. 「雜篇 雜上」에도 이 이야기가 비슷하게 나와 있는데, 今夫車輪/山之直木也/良匠揉之/其圓中規/雖有槁暴/不復嬴矣, ‘대저, 수레 바퀴는 산에 있는 곧은 나무를, 재주 좋은 장인이 구부리는데, 그러면 그 구부러진 모양이 곱자에 맞게 된다. 그러면 설사 볕을 쬐어서 말리더라도 다시 嬴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 楊倞의 주석 안에 있는 贏은 盧文弨가 지적하였듯, 아마 嬴이 잘못된 글자일 것이다. 지금 《晏子春秋》에는 嬴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嬴은 무슨 뜻일까. 淸代의 孫星衍은 《荀子》와 《晏子春秋》를 비교하면서, 按/嬴挺聲相近, ‘생각해 보건대, 嬴과 挺은 소리가 서로 비슷하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嬴 역시 挺처럼 ‘곧다’라는 의미일 것이다. ◈ 不復挺者의 者는 ‘~한 것’이라는 뜻이다. 관형어구인 槁曓不復挺을 받는다. 즉, 槁曓不復挺者는 ‘말리더라도 다시 곧아지지 않는 것’이 된다. ◈ 輮使之然의 輮는 체언으로, ‘구부린 행위’, ‘구부린 것’을 뜻한다. ◈ 使는 ‘~하게 하다’, ‘~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然을 받는다. 여기서는 ‘~때문에’, ‘~로 인해’처럼 의역하였다. ◈ 使之然의 之는 의미 없는 글자인 듯하다. ◈ 然은 용언으로, ‘그러하다’라는 말이다. 곧았던 나무를 바퀴로 둥글게 만든 일을 이른다. 즉, 使之然은 ‘然하게 하다’, 곧 ‘둥글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 蜀虎案 : 본래 나무는 곧지만, 가공 과정을 거쳐서 구부리면, 다시 본래처럼 곧은 상태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하고 있다. 이 말은 쪽과 얼음의 비유에서와 같이, 본래 품성이 어떻든, 노력을 통해 더 나은 상태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을 뜻한다. ◈◈ 蜀虎又案 : 실제로 나무를 구부릴 때는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한다. 첫 번째 방법은 증기를 오래 쬐이는 것이다. 그러면 나무가 흐물흐물해지는데, 이 때 구부러뜨리면 구부러진 모양 그대로 굳는다. 두 번째 방법은 굽힐 부분에 물을 머금게 하고 다음 불을 쬐거나 삶는 것이다. 두 방법 모두 목재 내부의 수분을 증기로 만들어서 섬유질의 결합을 느슨하게 만드는 것이 그 원리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말리니, 볕을 쬐니 하는 말이 계속 나오는 까닭은, 고대에도 이렇게 나무를 구부렸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으로]
  5. 故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 ◈ 이 節은 《大戴禮記》 「勸學」에도 나오지만, 본문의 순서가 다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이 節 앞에 是故不升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道/不知學問之大也//于越戎貉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者/教使之然也라는 節이 있다. 그런데 是故不升高山의 이 節은, 《荀子》 「勸學」에는 則知明而行無過矣 다음에 나온다. 즉, 내용은 같지만 본문의 순서가 서로 다르다. ◈ 故는 木受繩則直/金就礪則利에 내포되어 있는 인과 관계를 뒤의 君子博學而日參省乎己/則知明而行無過矣와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유독 《荀子》에 이런 용례가 많이 보인다. 故는 일반적으로 A 故 B, ‘A다. 이에 B다’처럼 사용되는데, 《荀子》에는 故 A B, ‘A인 것과 같이 B다’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는 ‘木受繩則直하고 金就礪則利하듯’처럼 해석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故가 是故로 되어 있다. 是故는 ‘이러한 까닭으로’라는 말이다. ◈ 木은 체언으로, ‘나무’다. ◈ 受는 아마 피동을 표현하는 말인 듯하다. 즉, 受繩은 ‘繩을 당하다’, ‘繩에 처하다’, 즉 ‘먹줄에 대지다’라는 말이 된다. 이 경우, 繩은 용언이어야 한다. 번역문에는 능동형으로 고쳐 기재하였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受가 從으로 되어 있다. 從 역시 피동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 繩은 용언으로, ‘먹줄을 대다’라는 말일 것이다. ◈ 受繩則直의 則은 ‘~하면’처럼 해석된다. 就礪則利의 則 역시 그렇다. ◈ 直은 용언으로, ‘곧게 되다’, ‘곧아지다’라는 말이다. ◈ 金은 체언으로, ‘쇠’다. ◈ 就는 아마 受처럼 피동을 표현하는 말일 것이다. 즉, 就礪는 ‘礪를 당하다’, ‘礪에 처하다’, 즉 ‘숫돌에 갈리다’라는 말이 된다. 이 경우, 礪는 용언이어야 한다. 번역문에는 능동형으로 고쳐 기재하였다. ◈ 礪는 용언으로, ‘숫돌로 갈다’라는 말일 것이다. ◈ 利는 용언으로, ‘날카로워지다’, ‘예리해지다’라는 말이다. ◈ 博은 부사어로, ‘널리’, ‘두루’, ‘폭넓게’라는 말일 것이다. 學을 한정한다. ◈ 學은 용언으로, ‘배우다’, ‘공부하다’는 말이다. ◈ 博學而日參의 而는 순접으로,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그런데 《大戴禮記》 「勸學」에는 博學而의 而가 如로 되어 있다. 이는 고대에 如와 而가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 「隱公」 7년에 壬申/及鄭伯盟/歃如忘, ‘壬申에 鄭伯과 盟하는데, 歃하며 忘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林堯叟는 服虔曰/如/而也//蓋歃血而忘之, ‘服虔은 “如는 而라는 뜻이다. 아마 歃血하면서 이를 忘하였다는 말 같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또, 《春秋左氏傳》 「莊公」 7년에 星隕如雨, ‘별이 隕하더니 비가 왔다’라는 말이 있는데, 杜預는 如/而也, ‘如는 而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이 말은 《漢書》 「五行志 下之下」에도 인용되어 있는데, 「五行志」 본문에는 如/而也/星隕而且雨, ‘如는 而라는 뜻이다. 별이 隕한 뒤에 또 비가 왔다는 말이다’라고 하며 劉歆의 설이 인용되어 있다. 또, 《荀子》 「儒效」에 鄕是如不臧/倍是如不亡者/自古及今未嘗有也, ‘이를 鄕하고 臧하지 않은 경우, 이를 倍하고 亡하지 않은 경우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있은 적이 없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盧文弨는 正文兩如字/俱讀爲而, ‘본문의 두 如는 모두 而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모두 王引之의 《經典釋文》 「如」에 수록되어 있다. ◈ 日參省乎己의 日은 부사어로, ‘날마다’, ‘매일’이라는 뜻이다. ◈ 參省乎己는 아마 參己에 省乎가 자의적으로 덧붙여진 말인 것 같다. 본래는 參己였을 것이다. 이는 俞樾의 설로, 俞樾의 논증은 문단 말미에 기재하겠다. 《論語》 「學而」에 吾日三省吾身,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參己를 이 말 때문에 오해해서 參省乎己로 고쳤을 듯하다. 주석을 살펴 보면, 楊倞은 參/三也//曾子曰/日三省吾身, ‘參은 세 가지라는 뜻이다. 曾子가 “날마다 세 번 나 자신을 반성한다”라고 하였었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살펴 보면, 楊倞 역시 「學而」의 저 句에 근거해서 參省乎己를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參省乎己가 아니라 參己가 맞다면, 參은 무슨 뜻일까. 參은 용언으로, 아마 ‘헤아리다’, ‘살피다’는 말일 듯하다. 즉, 參己는 ‘자신을 살피다’, 혹은 ‘자신을 헤아리다’, ‘자신을 가늠해 보다’라는 뜻이 된다. 「解蔽」에 參稽治亂而通其度, ‘治亂을 參稽하여 법도를 꿰뚫어 본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句에서 參稽는 같은 의미의 글자 두 개가 모여서 이루어진 단어일 것이다. 稽가 ‘헤아리다’, ‘살피다’는 뜻이므로, 參 역시 같은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 句에 대해 楊倞은 參/驗//稽/考, ‘參은 驗이라는 뜻이고, 稽는 고찰하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였는데, 驗은 ‘살피다’, ‘조사하다’, ‘검증하다’는 말이므로, 이 역시 ‘헤아리다’, ‘살피다’는 의미와 통한다. 參酌이라는 말에서도 參은 ‘헤아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한편, 상기하였듯, 參省乎己가 아니라 參己가 맞다는 설은 본래 俞樾의 설이었다. 俞樾은 省乎二字/後人所加也//荀子原文/蓋作君子博學而日參己//參者/驗也//史記禮書曰/參是豈無堅革利兵哉///索隱曰/參者/驗也///管子君臣篇曰/若望參表///尹注曰/參表/謂立表所以參驗曲直///是參有參驗之義//君子博學而日參驗之於己/故知明而行無過也//後人不得參字之義/妄據論語三省吾身之文/增省乎二字/陋矣//大戴記勸學篇/作君子博學如日參己焉/如而古通用/無省乎二字/可據以訂正, ‘省乎 두 글자는 나중 사람이 집어 넣은 말일 것이다. 《荀子》 원문에는 아마 君子博學而日參己라고만 되어 있었을 것이다. 參이라는 것은 헤아리다는 뜻이다. 《史記》 「禮書」에 “이 점을 參해 볼 때, 어떻게 견고한 革과 정예한 병사가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索隱》에서는 “參은 헤아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管子》 「君臣」에 “參表를 望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는데, 尹知章의 주석에서는 “參表는 사정을 헤아려서 세운 表를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이로써 參에 헤아리다는 뜻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본문은, 君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자신을 헤아리기에, 식견은 명쾌해지고, 행동에도 잘못이 없게 된다는 뜻이 된다. 후세 사람이 參의 뜻을 몰랐기에, 《論語》의 “세 가지로 나 자신을 반성한다”라는 글에 근거하여, 망령되게도 省乎라는 두 글자를 더한 것이니, 지저분한 짓이라 하겠다. 《大戴記》 「勸學」에는 君子博學如日參己焉이라고 되어 있는데, 如와 而는 옛날에 서로 통용되었고, 省乎 두 글자가 없으니, 이 점에 근거하여 증명하고, 본문을 바로잡을 수 있겠다’라고 하였다. 《索隱》은 司馬貞의 《史記索隱》을 이른다. 尹知章은 唐代의 학자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를 이른다. 이처럼 俞樾 역시 參이 驗, 즉 ‘헤아리다’, ‘살피다’는 뜻임을 증명하였고, 또 《大戴禮記》를 통해서 省乎 두 글자가 없는 편이 더 타당하다는 점을 설명하고 있다. 한편 王先謙은 大戴記一本作君子博學如日參己焉/與俞說同//孔氏廣森云/參己者/學乎兩端/以己參之///一本作而日參省乎己焉/與荀子文同//此後人用荀子改大戴記也/荀書自作而日參省乎己//參三義同//群書治要作而日三省乎己/易參爲三//是本文有省乎二字之明證/與楊注義合//俞說非, ‘《大戴記》의 어떤 판본에는 君子博學如日參己焉이라고 되어 있으니, 이는 俞樾의 설과 같다. 그런데 孔廣森은 “參己라는 말은 兩端으로 배우고, 자신을 參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大戴記》의 어떤 판본에는 而日參省乎己焉이라고 되어 있어서, 《荀子》 본문과 동일하기도 하다. 이 점을 감안하면, 후세 사람이 《荀子》를 사용해서 《大戴記》를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요, 그렇다면 《荀書》에는 본래 而日參省乎己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參과 三은 뜻이 같다. 《群書治要》에는 而日三省乎己로, 參을 아예 三으로 바꿔 적어 두었다. 이 점을 가지고 원래 《荀子》에 省乎 두 글자가 있었을 것임을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고, 이렇게 하면 楊倞의 주석과도 의미가 합치된다. 俞樾의 설은 틀렸다’라고 하였다. 孔廣森은 淸代 乾隆帝 시기의 학자였다. 《荀書》는 아마 《荀子》를 이를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구문의 대구를 고려하더라도 博學而日參省乎己 보다는 博學而日參己가 낫고, 또 荀子가 《論語》에서 글을 인용해 오려 했다고 하더라도, 孔子의 말이 아니라 曾參의 말을 인용했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또 參을 ‘헤아리다’라고 해석할 때 본문이 명쾌하게 해석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俞樾의 설이 가장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또, 宋基采 역시 俞樾이 타당하다고 보는 듯하며, 朝川鼎, 于鬯, 梁啓超, 梁啓雄, 王天海 등도 俞樾의 설을 따른다는 점을 소개해 두었다. 나는 俞樾을 따른다. ◈ 己는 체언으로, ‘자신’이다. 君子 ‘자신’을 이른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己 다음에 焉이 더 있다. 焉은 문장을 끝내는 조사일 것이다. ◈ 則知明의 則은 ‘따라서’, ‘이에’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이 則이 故로 되어 있다. 故 역시 ‘따라서’, ‘이에’라는 말이다. ◈ 知明而行無過의 而는 순접으로, ‘그리고’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이 而가 則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則과 而가 고대에는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春秋左氏傳》 「文公」 2년에 勇則害上/不登於明堂, ‘용력을 부리면서 윗사람을 해치면, 明堂에 오르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則은 ‘~하면서’라고 해석된다. 而와 같다. 또, 《春秋左氏傳》 「昭公」 3년에는 寡人願事君/朝夕不倦/將奉質幣/以無失時/則國家多難/是以不獲, ‘寡人은 君을 섬기고자 해서, 조석으로 倦하지 않고, 장차 質幣를 奉하고자 하면서 때를 맞추려 했다. 그러나 나라에 일이 많아서 그럴 수가 없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則은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이 역시 而와 같다. 또, 《荀子》 「榮辱」에 夫貴爲天子/富有天下/是人情之所同欲也//然則從人之欲/則埶不能容/物不能贍也, ‘대저 貴하여 天子가 되고, 부유해서 천하를 가지는 것은 사람의 정리상 모두 바라는 바이다. 然則 사람의 욕구를 따르자면, 형세상 용인될 수가 없고, 物로도 贍할 수 없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然則은 역접으로 해석된다. 즉, 然而와 같다. 이 경우에서도 則과 而는 같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則」에 수록되어 있다. ◈ 知는 체언으로, ‘지혜’, ‘지식’, ‘식견’을 뜻한다. 楊倞은 知/讀爲智, ‘知는 智라고 읽는다’라고 하였다. ◈ 明은 용언으로, ‘분명해지다’, ‘명쾌해지다’라는 말이다. ◈ 行은 체언으로, ‘행위’, ‘행동’을 뜻한다. 楊倞은 行/下孟反, ‘行은 下와 孟의 반절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 無는 용언으로, ‘없어지다’, ‘없게 되다’는 말일 것이다. ◈ 過는 체언으로, ‘과오’, ‘잘못’이다. ◈ 行無過矣의 矣는 문장을 끝내는 조사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矣가 빠져 있다. ◈◈ 蜀虎案 : 君子라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완성된 儒學者의 모습으로 사용된다. 그러나 荀子는 君子가 원래부터 된사람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君子 역시 자신을 갈고 닦아서 그렇게 되었다는 취지로 설명하고 있다. 노력해서 君子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은 《荀子》에 전반적으로 드러나 있다. 性惡說도 이러한 맥락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6. 故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 ◈ 故는 不登高山/不知天之高也//不臨深谿/不知地之厚也에 내포되어 있는 인과 관계를 뒤의 不聞先王之遺言/不知學問之大也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즉, ‘不登高山하면 不知天之高也하고, 不臨深谿하면 不知地之厚也하는 것처럼’과 같이 해석된다. 故는 일반적으로 A 故 B, ‘A다. 이에 B다’처럼 사용되는데, 《荀子》에는 故 A B, ‘A인 것과 같이 B다’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이 故가 是故라고 되어 있다. 是故는 ‘이 때문에’, ‘이런 이유로’라는 말이다. ◈ 不登高山의 不은 부정어다. 登을 한정한다. 不知天之高, 不臨深谿, 不知地之厚, 不聞先王之遺言, 不知學問之大의 不도 모두 그렇다. 각각 知, 臨, 知, 聞, 知를 한정한다. ◈ 登은 용언으로, ‘오르다’, ‘올라 가다’라는 말이다. 산에 ‘오르다’는 뜻이다. 명사구인 高山을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登이 升으로 되어 있다. 升 역시 ‘오르다’는 말이다. ◈ 高山의 高는 관형어로, ‘높은’이라는 말이다. 山을 한정한다. ◈ 高山의 山은 체언으로, ‘산’이다. ◈ 不知天之高의 知는 용언으로, ‘이해하다’, ‘깨닫다’, ‘알다’는 말이다. 명사구인 天之高也를 받는다. 不知地之厚, 不知學問之大의 知도 모두 그렇다. 각각 명사구인 地之厚也, 學問之大也를 받는다. ◈ 天之高也의 天은 체언으로, ‘하늘’이다. ◈ 天之高也의 之는 주격 조사로, ‘~이’, ‘~가’처럼 해석된다. 地之厚也, 學問之大也의 之도 모두 그렇다. 이 之들을 관형격 조사로 보고, ‘~의’처럼 해석할 수도 있겠다. ◈ 天之高也의 高는 용언으로, ‘높다’는 말이다. 즉, 天之高는 관형어구로, ‘하늘이 높다는’이라는 뜻이고, 天之高也의 也를 한정한다. 之를 관형격 조사로 해석한다면, 高는 ‘높이’라는 체언으로 해석해야 한다. ◈ 天之高也의 也는 아마 者와 같은 말일 것이다. ‘~라는 것’이라는 뜻이다. 地之厚也, 學問之大也의 也도 모두 이렇게 해석될 것이다. 즉, 天之高也는 天之高者로, ‘하늘이 높다는 것’, ‘하늘이 높다는 점’이라는 말이 된다. 이 경우, 天之高는 상기하였듯 관형어구로 기능한다. 즉, 不知天之高也는 ‘하늘이 높다는 점을 知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된다. 也를 일반적인 용례처럼 문장을 끝내는 조사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면 天之高의 之는 관형격 조사가 되어야 하고, 高는 ‘높이’라는 체언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也가 어떻게 者처럼 해석될 수 있을까.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臨深谿의 臨은 용언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深谿을 받는다. 《說文解字》 「臥部」에는 監에 대해 監/臨下也, '내려다 보다'라고 하였는데, 臨을 다시 臨/監臨, ' 臨은 監臨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으니, 臨 역시 監처럼 '내려다 보다'라고 할 수 있겠다. 《詩》 「大雅 文王之什」의 「大明」에 上帝臨女, '上帝가 너를 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臨/視也, '臨은 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孔穎達 역시 臨視, '보다'라고 풀이하였다. 《詩》 「頌 魯頌」의 「閟宮」에도 같은 말이 있다. 《詩》 「國風 邶風」의 「日月」에는 日居月諸/照臨下土, '해와 달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고, 《詩》 「小雅 北山之什」의 「小明」에는 明明上天/照臨下土, '밝은 上天이 下土를 照臨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照臨은 '굽어 살피다', '굽어 비추다'라는 말이다. 臨이 '보다'가 아니라 '살피다'는 의미이기는 하지만, '위에서 아래를' 살핀다는 의미로는 같다. 《莊子》 「人間世」에도 其高臨山/十仞而後有枝, ‘그 높이는 산을 臨할 정도였으니, 밑둥에서 열 길이나 올라간 뒤에야 가지가 나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臨 역시 ‘내려다 보다’라는 뜻이다. ◈ 深谿의 深은 관형어로, ‘깊은’이라는 말이다. 谿를 한정한다. ◈ 深谿의 谿는 체언으로, 본래 ‘시내’, ‘개울’을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아마 ‘골짜기’나 ‘계곡’을 이를 것이다. 즉, 深谿는 ‘깊은 계곡’, ‘깊은 골짜기’다. ◈ 地之厚也의 地는 체언으로, ‘땅’, ‘대지’다. ◈ 地之厚也의 厚는 용언으로, ‘두텁다’, ‘두껍다’라는 말이다. ◈ 地之厚也의 也는 者와 같다. ‘~라는 점’을 뜻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天之高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즉, 地之厚는 관형어구로, ‘땅이 두껍다는’이라는 말이 되고, 也를 한정한다. 地之厚也는 地之厚者로, ‘땅이 두껍다는 점’을 뜻한다. ◈ 聞先王之遺言의 聞은 용언으로, ‘듣다’라고 해석해도 좋겠지만,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라고 해석하면 더 낫겠다. 명사구인 先王之遺言을 받는다. 《禮記》 「哀公問」에 愿聞所以行三言之道/可得聞乎, '三言之道라는 것을 聞하고 싶다. 聞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聞은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는 말이다. ◈ 先王은 ‘옛 왕’을 이른다. 先은 관형어로, ‘옛날의’, ‘예의’라는 말이고, 王은 체언으로, ‘왕’이다. 《荀子》에는 先王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지만, 구체적으로 누구인지 적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본받아야 될 대상’이라는 뜻으로, 긍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를 가지고 생각해 보면, 아마 夏의 禹나, 殷의 湯, 周의 文王, 武王 같은 사람들을 이를 듯하다. ◈ 先王之遺言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遺言은 ‘남긴 말’이다. 遺는 관형어로, ‘남긴’이라는 뜻이고, 言은 체언으로, ‘말’이다. 先王들이 정치나 교화에 대해 남긴 말이나 교훈들을 이른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遺言이 遺道로 되어 있다. 遺道는 ‘남긴 도리’ 혹은 ‘남긴 방법’이라는 뜻이다. 이를 보면, 遺言이 정치나 교화에 대한 표현임이 더 분명해진다 하겠다. ◈ 學問之大也의 學問은 체언으로, ‘학문’을 이른다. ◈ 大는 용언으로, ‘크다’, ‘위대하다’, ‘대단하다’처럼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美나 善처럼 ‘좋다’, ‘훌륭하다’라고 번역하면 훨씬 나을 듯하다. 《論語》 「八佾」에 大哉問, ‘질문이 大하도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大는 ‘좋다’, ‘훌륭하다’는 뜻이다. ◈ 學問之大也의 也는 者와 같다. ‘~라는 점’을 뜻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天之高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즉, 學問之大는 관형어구로, ‘학문이 훌륭하다는’이라는 말이 되고, 也를 한정한다. 學問之大也는 學問之大者로, ‘학문이 훌륭하다는 점’을 뜻한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大/謂有益於人, ‘大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좋다’, ‘훌륭하다’는 말과 통한다. ◈◈ 蜀虎案 : 先王의 도리를 공부해야 한다는 말이다. [본문으로]
  7. 干越夷貉之子/生而同聲/長而異俗/教使之然也, ◈ 干은 나라 이름으로, 이 글에서는 정황상 吳나라를 이르는 듯하다. 즉, 干越이라는 말은 吳越과 같다. 干은 邗의 가차자일 것이다. 邗은 지명이다. 江蘇省 江都縣에 邗城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의 南京 동북쪽, 泰州 서쪽, 鎭江 북쪽에 위치에 있다. 《春秋左氏傳》 「哀公」 9년에, 秋/吳城邗/溝通江淮, ‘가을에 吳나라가 邗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서 長江과 淮水를 이었다’라는 말이 있다. 杜預는 於邗江築城穿溝/東北通射陽湖/西北至末口入淮/通糧道也//今廣陵韓江是, ‘邗江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서, 동북쪽으로는 射陽湖와 통하게 하였고, 서북쪽으로는 물길이 末口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가게 하여, 군량을 수송할 길을 낸 것이다. 지금 廣陵의 韓江이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邗城은 지리적으로 長江 북안이고, 또 淮水 이남이므로, 《春秋左氏傳》의 기사와 정황이 맞아 떨어진다. 그런데 《管子》 「小問」에 昔者吳干戰, ‘옛날에 吳와 干이 싸움을 벌였을 때’라는 말이 나온다. 이 점으로 미루어 볼 때, 干은 본래 吳와는 독립된 나라로, 管仲이 집권하기 이전 시대부터 이미 吳나라와 전쟁을 벌여 왔을 것이다. 그러다가 이후에 吳나라에 합병되었고, 마침내 魯나라 哀公 9년, 즉 기원전 486년에는 吳軍이 옛날의 干, 즉 邗 지역에 축성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說文解字》 「邑部」에는 邗/國也/今屬臨淮//从邑干聲//一曰邗本屬吳, ‘邗은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臨淮 지역에 있었다. 邑이 들어 있고, 干이라고 발음한다. 일설에는, 邗이 본래 吳나라에 속한 지역이었다고도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역시 邗이 吳와는 별개의 국가였음을 시사한다. 그러면 吳나라와 干나라가 별개의 나라였음에도, 본문의 干을 吳라고 간주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차피 吳나라가 干나라를 병합하여 한 나라가 되었기에, 지역의 이름을 따서 吳와 干을 서로 혼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魏나라는 秦나라에게 西河 지역을 탈취당한 뒤, 安邑에서 大梁으로 천도했는데, 이 때부터 魏나라를 梁나라라고 부르기도 했다. 당시에는 나라 이름을 그 나라에 속한 지역에 기초하여 정하고, 또 불렀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을 것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干越이 아니라 于越이라고 되어 있는데, 干과 于의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于로 잘못 기재된 듯 보인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干越/猶言吳越//呂氏春秋/荊有次非/得寶劍於干越///高誘曰/吳邑也, ‘干越이라는 말은 吳越이라는 말과 같다. 《呂氏春秋》에 “荊에 次非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干越에서 보검을 얻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高誘는 “吳나라의 邑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呂氏春秋》 인용문은 「恃君覽 知分」에 나온다. 그러나 지금 「知分」에는 荊有次非者/得寶劍于干遂이라고 되어 있으니, 者가 추가로 있고, 또 於干越이 于干遂로 바뀌어 있다. 또, 이 부분에 대해 高誘는 干遂/吳邑, ‘干遂는 吳나라의 邑이다’라고 하였다. 즉, 楊倞은 干을 吳와 같거나, 吳에 속해 있는 지역이라고 보고 있다. 이에 대해 王先謙은 謝刻從盧校/干作于//注文作于越猶言於越, ‘《謝刻本》에서는 盧文弨의 교정을 좇아, 干이 于로 되어 있고, 楊倞의 주석은 “于越은 於越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이어 인용하겠지만, 盧文弨는 《元刻本》, 《大戴禮記》를 좇아, 干이 아니라 于가 맞다고 간주하였는데, 《謝刻本》에서는 盧文弨의 의견을 좇아, 본문과 주석을 盧文弨의 주장에 맞게 고쳤다는 뜻이다. 盧文弨는 于越宋本作干越//今從元刻/與大戴禮同//注於越/舊作吳越/訛//所引呂氏春秋見知分篇//次非/俗本作佽飛/唯宋本與呂氏同//呂氏于越作干遂/淮南同/注干音寒///國策作干隧//然楊氏自作于越/故以於越爲釋, ‘于越은 《宋本》에는 干越이라고 되어 있다. 나는 《元刻本》을 따르니, 《元刻本》은 《大戴禮》와 같다. 楊倞의 주석에 있는 於越이라는 말은, 옛 판본에는 吳越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틀린 말이다. 楊倞이 인용한 《呂氏春秋》 내용은 「知分」에 보인다. 次非는 俗本들에는 佽飛라고 되어 있다. 오직 《宋本》만이 《呂氏》와 같다. 《呂氏》에는 于越이 干遂라고 되어 있는데, 《淮南》과 같다. 《淮南》의 주석에서는 干의 音을 寒이라고 했다. 《國策》에는 干隧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楊倞이 직접 于越이라고 적어 놨으므로, 나도 於越의 의미로 풀이하였다’라고 하였다. 《大戴禮》은 《大戴禮記》를 이른다. 《呂氏》는 《呂氏春秋》를 이른다. 《淮南》은 《淮南子》를 이른다. 干의 音이 寒이라고 한 주석은, 《淮南子》 「原道訓」에 붙어 있는 高誘의 주석을 이른다. 次非 이야기는 《呂氏春秋》 뿐만 아니라 《淮南子》 「原道訓」에도 나오는데, 지금 《淮南子》에는 于干遂가 아니라 於干隊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高誘는, 干音寒//國在今臨淮//出寶劍/蓋爲莫邪洞鄂之形也, ‘干의 音은 寒이다. 이 나라는 지금의 臨淮 지역에 있었다. 寶劍이 나왔는데, 아마 莫邪나 洞鄂의 形이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國策》은 《戰國策》을 이른다. 《戰國策》에 干隧라고 되어 있는 부분이란, 아마 「秦策」의 智氏見伐趙之利/而不知榆次之禍也//吳見伐齊之便/而不知干隧之敗也, ‘智氏는 趙나라를 쳐서 얻을 이익은 생각했지만, 榆次에서 당할 화는 생각지 못했고, 吳나라는 齊나라를 공격해서 얻을 편리는 생각했지만, 干隧에서 패할 일은 생각지 못했다’라는 말을 뜻할 것이다. 이 節에서 干隧가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劉台拱은 淮南原道訓/干越生葛絺///高注/干/吳也///楊氏此注/以干越爲吳越/蓋用高義//觀下文引呂氏春秋注可見//盧改非也//今原道訓作于越/亦妄庸人所改, ‘《淮南》 「原道訓」에는 “干越에서 葛絺가 난다”라는 말이 있고, 高誘의 주석에서는 “干은 吳나라다”라고 하였다. 그러니 楊倞이 이 주석에서 干越을 吳越과 같은 말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마도 高誘의 의견을 차용한 바일 것이다. 아랫쪽 글에서 《呂氏春秋》의 주석을 인용해 놓은 점을 통해서도 이를 알 수 있다. 盧文弨가 교정을 잘못한 것이다. 지금 「原道訓」에는 于越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또한 멋도 모르는 놈이 망령되게 고친 바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淮南》은 《淮南子》다. 王念孫은 劉說是也//宋刻呂夏卿本錢佃本/竝作干越//干越夷貉四者/皆國名/不得改干越爲于越//古書言干越者多矣//凡改干越爲于越者/皆所謂知其一說/不知又有一說者也//大戴記之于越/亦後人所改/辯見漢書貨殖傳//淮南道藏本及朱東光本/皆作干/它本皆改爲于, ‘劉台拱의 설이 옳다. 宋나라 때 새긴 《呂夏卿本》, 《錢佃本》에는 모두 干越이라고 되어 있다. 干, 越, 夷, 貉 네 가지는 모두 나라의 이름이다. 따라서 干越을 于越로 고칠 수는 없다. 옛 글에도 干越이라고 표현된 경우가 많다. 대저, 干越을 于越로 고친 사람은 대체로, 하나의 설만 알고, 다른 설들은 모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大戴記》에 于越이라고 되어 있는 것 역시 나중 사람이 고친 바이니, 이에 대한 논증은 《漢書》 「貨殖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道藏本 淮南子》와 《朱東光本》에는 모두 干이라고 되어 있다. 다만 다른 판본들에는 모두 于로 고쳐져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淮南》은 《淮南子》를 이른다. 갑자기 《漢書》 「貨殖傳」가 언급된 이유는 이렇다. 《漢書》 「貨殖傳」에는 故其父兄之教不肅而成/子弟之學不勞而能/各安其居而樂其業/甘其食而美其服/雖見奇麗紛華/非其所習/辟猶戎翟之與于越/不相入矣, ‘따라서 父兄이 엄하게 가르치지 않아도 교육이 이루어지게 되었고, 子弟들은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각자 자기 집에서 편안하게 쉬고, 자기 일을 즐겁게 하였으며,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자기 옷을 훌륭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설사 특출나게 예쁘거나, 화려한 것을 보더라도, 자신이 해 온 방식과는 달랐기 때문에, 비유하자면 戎翟과 于越이 서로 서로에게 침입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던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王念孫은 《讀書雜志》를 통해, 「貨殖傳」의 于越이 干越이어야 한다는 점을 논증하였었다. 이 논증에 대해서는, 王先謙이 대체로 요약해 두었다. 그 말은 아래에 있는 王先謙의 의견 속에 포함되어 있다. 한편, 「貨殖傳」에 대해, 孟康은 于越/南方越名也, ‘于越은 남쪽에 사는 越의 이름이다’라고 하였고, 顏師古는 于/發語聲也//戎蠻之語則然//于越猶句吳耳//辟讀曰譬, ‘于는 말을 시작하는 소리다. 戎蠻의 말이 곧 그렇다. 于越은 句吳와 같다. 辟는 譬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孟康과 顏師古는 于를 干으로 고치지 않고, 모두 于 그대로 해석하고 있다. 俞樾은 案盧刻誠非/而楊注原文謂猶言吳越/亦恐不然//干與越竝言/則干亦國名//管子内業篇/昔者吳干戰/未齓不得入軍門/國子擿其齒/遂入/爲干國多///則干與吳且爲敵國/非即吳明矣//尹知章注管子/以干爲江邊地///非是//辯見管子//字本作邗//說文邑部/邗/國也/今屬臨淮//從邑干聲//一曰邗本屬吳///蓋邗古國名/後爲吳邑//哀九年左傳/吳城邗///是也//古書言干越者/則當從國名之本訓/不得因其後爲吳邑/而即訓爲吳也, ‘생각해 보건대, 《盧刻》은 진정 잘못되었고, 楊倞의 주석 원문에서 吳越과 같은 말이라고 한 부분도 또한 아마 그렇지 않은 듯하다. 干과 越은 함께 사용되었으니, 干 역시 越처럼 나라의 이름일 것이다. 《管子》 「内業」에 “옛날 吳와 干이 싸움을 벌였는데, 유치가 빠지지 않은 자는 軍門으로 들어 갈 수가 없었기에, 나라의 아이들이 자기 이빨을 뽑아 버리고는 마침내 軍門으로 들어가, 干나라를 위해 싸운 사람이 많았다”라는 말이 있다. 이로써 보건대, 干과 吳는 서로 적대 관계였을 것이요, 干이 吳가 아님이 분명하다. 《管子》에 대해 尹知章은 “干은 長江의 邊에 있던 지역이다”라고 하였는데, 옳지 않다. 이에 대한 말은 《管子》에 보인다. 干은 본래 邗이었을 것이다. 《說文》 「邑部」에 “邗은 나라 이름으로, 지금의 臨淮 지역에 있었다. 邑이 들어 있고, 干이라고 발음한다. 일설에는, 邗이 본래 吳나라에 속한 지역이었다고도 한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邗은 옛날에 있던 나라의 이름으로, 나중에 吳나라의 邑이 되었을 것이다. 哀公 9년에 대한 《左傳》에 “吳나라가 邗에 성을 쌓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과 같다. 옛 글에 干越이라고 한 사례들은 마땅히 나라 이름이었던 干 본래의 뜻을 따른 표현일 것이지, 나중에 吳나라의 邑이 된 점에 근거하여서 吳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표현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다. 《管子》 인용문은 「内業」이 아니라 「小問」에 있다. 이 인용문은, 干나라에 유치를 영구치로 다 갈지 않은 자는 軍門으로 들어가 병사로 싸울 수가 없다는 규칙이 있었는데, 吳나라와 싸움은 이미 일어 났으므로, 어린 아이들이 자기 유치를 뽑아 버리고, 병사가 되어 干나라를 위해 싸움을 벌인 사례가 많았다는 뜻이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王先謙은 王氏雜志引文選江賦注所引墨子/以利荊楚干越///吳都賦/包括干越///莊子刻意篇/干越之劍///及淮南原道訓/以證漢書貨殖傳之于越/當爲干越//其義允矣//今案/鹽鐵論殊路篇/干越之鋌不厲/匹夫賤之///亦一證也//吳干先爲敵國/後干併於吳/管子吳干戰/及左傳吳城邗/即其明證//干爲吳滅/而吳一稱干/猶鄭爲韓滅/而韓亦稱鄭[竹書紀年/書韓哀侯作鄭哀侯]//俞氏所駁/亦非也//今依劉王說/改從宋本, ‘王念孫은 《文選》 「江賦」에서 《墨子》의 “荊楚와 干越을 이롭게 한다”라는 句節을 인용한 주석, 「吳都賦」의 “干越을 包括하다”라는 말, 《莊子》 「刻意」의 “干越의 劍”, 그리고 《淮南》 「原道訓」을 《雜志》에 인용하고는, 이를 가지고 《漢書》 「貨殖傳」에 있는 于越이라는 표현은 마땅히 干越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취신할 만하다. 이제 생각해 보건대, 《鹽鐵論》 「殊路」에 “干越의 쇳덩이도 厲하지 않으면 匹夫조차도 보잘것 없다고 생각한다”라는 말이 있으니, 이 역시 근거로 삼을 수 있겠다. 吳와 干은 처음에 적대하였지만, 나중에는 干이 吳에게 합병당하였는데, 이 점은 《管子》에서 “吳와 干이 싸웠다”라고 한 句와, 《左傳》에서 “吳가 邗에 성을 쌓았다”라고 한 句로 분명하게 증명할 수 있다. 干이 吳에게 망하고서, 吳를 干이라 부르기도 했으니, 이 점은 鄭이 韓에게 망하고서, 韓을 또한 鄭이라 불렀던 사례와 같겠다.[王先謙의 부연 : 韓哀侯가 《竹書紀年》에는 鄭哀侯라고 되어 있다.] 俞樾의 논증은 또한 틀렸다. 나는 劉台拱과 王念孫의 설에 근거하여, 《宋本》을 따라 고쳤다’라고 하였다. 「刻意」는 《外篇》에 속한다. 《淮南》은 《淮南子》다. 《雜志》는 王念孫의 《讀書雜志》를 이른다. 《左傳》은 《春秋左氏傳》이다. 《竹書紀年》 「安王」에, 二十一年/韓滅鄭/哀侯入于鄭, ‘21년에 韓이 鄭을 멸망시켰다. 哀侯는 鄭으로 들어갔다’라는 말이 있을 뿐, 哀侯를 직접 鄭哀侯라고 불렀다는 말은 찾을 수가 없다. 王先謙이 《宋本》을 따라 고쳤다고 한 말은, 于越이 아니라 《宋本》에 기재되어 있는 것처럼 干越로 보고, 본문을 고치겠다는 뜻이다. ◈ 夷는 체언으로, ‘동쪽 오랑캐’ 혹은 ‘동쪽 야만인’을 뜻한다.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동쪽 방위에 살던 이민족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禮記》 「王制」에 東方曰夷/被髮文身/有不火食者矣, ‘동쪽 사람들을 夷라고 한다. 가발을 쓰고, 몸에 그림을 그렸으며, 요리할 때 불을 사용하지 않기도 한다’라는 말이 있고, 또 그 뒷부분에는 中國夷蠻戎狄/皆有安居和味宜服利用備器/五方之民/言語不通/嗜欲不同, ‘中國과 夷, 蠻, 戎, 狄은 모두 安居, 和味, 宜服, 利用, 備器를 가지고 있으며, 五方의 백성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도 같지 않다’라는 말이 있다. 孔穎達은 此一節論中國及四夷居處言語衣服飲食不同之事, ‘이 節에서는 中國과 四夷가 사용하는 거처, 언어, 의복, 음식이 같지 않다는 점에 대해 논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고대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東夷 등은 자신들과 아주 상이하다고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이 夷를 단지 다르다고 느낀 것만은 아니었다. 중국인들은 夷를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論語》 「八佾」에는 夷狄之有君/不如諸夏之亡也, ‘夷狄에게 군주가 있다고 한들, 중국에 군주가 없는 상태 보다 못하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子路」에는 居處恭/執事敬/與人忠//雖之夷狄/不可棄也, ‘있을 때 삼가고, 일을 처리할 때는 공경스러우며, 다른 사람에게는 진심을 다하는 일은, 夷狄에게서라도 버릴 만한 바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들처럼 夷는 기본적으로 禮法이나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도리를 모르는 야만인으로 생각되었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夷가 戎으로 되어 있다. 戎은 ‘서쪽 오랑캐’를 뜻하는 말이다. ◈ 貉은 체언으로, 여기서는 ‘북쪽 오랑캐’ 혹은 ‘북쪽 야만인’ 정도로 해석될 수 있겠다. 앞에 나왔던 干越이 남쪽 오랑캐, 夷가 동쪽 오랑캐를 뜻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본래는 高句麗의 일파를 貉 혹은 貊이라고 한다. 그러나 高句麗만 貉인 것은 아니며, 중국 동북부에서 滿洲에 이르기까지 넓게 퍼져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은 貉을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論語》 「衛靈公」에 言忠信/行篤敬/雖蠻貊之邦行矣, ‘말은 믿을 만하게 하고, 행동은 공경스러운 태도로 해야 한다. 이는 비록 蠻이나 貊의 나라일지라도 이행하는 바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맥락만 보더라도 蠻貊이 야만족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은 자명하다 하겠다. 朱熹는 蠻/南蠻//貊/北狄, ‘蠻은 南蠻, 貊은 北狄을 이른다’라고 하였으니, 貊이 북쪽 오랑캐라는 점도 또한 알 수 있다. 또, 《孟子》 「告子 下」에는 夫貉/五穀不生/惟黍生之//無城郭宮室宗廟祭祀之禮/無諸侯幣帛饔飧/無百官有司/故二十取一而足也//今居中國/去人倫/無君子/如之何其可也, ‘저 貉의 땅에는 五穀이 나지 않고, 다만 기장만 자란다. 城郭도 없고, 宮室도 없고, 宗廟도 없고, 祭祀를 지내는 예법도 없으며, 諸侯나 幣帛, 饔飧도 없고, 百官이나 有司도 없다. 그러니 20분의 1만 취해도 충분한 것이다. 지금 중국에 살면서, 人倫이 없어지고, 君子도 없어진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 일이겠는가’라는 말이 있으니, 이 말에서도 貉은 야만인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에 대해 趙技는 貉在北方/其氣寒/不生五穀//黍早熟/故獨生之//無中國之禮/如此之用/故可二十而取一而足也, ‘貉은 북쪽에 산다. 공기가 차가워서 五穀이 자라지 않는다. 기장은 빨리 익으니, 그래서 기장 혼자 자라는 것이다. 貉에게는 중국의 예법도 없으며, 저러저러한 기물이나 제도도 없다. 그러니 20분의 1만 거두어도 충분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今之居中國/當行禮義/而欲效夷貉無人倫之敘/無君子之道/豈可哉//皋陶器者少/尙不可以爲國/況無君子之道乎, ‘중국에 산다면, 마땅히 禮義를 실천하여야지, 도리어 人倫도 없고, 君子의 도리도 없는 夷貉을 본받으려 하니, 어찌 될 일이겠는가. 皋陶의 그릇이 작다 한들, 오히려 나라라고 할 수가 없는 법인데, 하물며 君子의 도리가 없는 꼴이야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朱熹는 貉/北方夷狄之國名也, ‘貉은 북쪽 夷狄의 나라 이름이다’라고 하였다. 趙技와 朱熹의 말에서도 貉이 야만족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 干越夷貉之子의 之는 관형격 조사다. ‘~의’처럼 해석된다. ◈ 干越夷貉之子의 子는 체언으로, ‘아이’, ‘자식’, ‘자손’을 이른다. ‘아이’라고 하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겠다. ◈ 生은 용언으로, ‘태어나다’, ‘나다’라는 말이다. ◈ 生而同聲의 而는 ‘~하면’, ‘그러면’처럼 해석된다. 則과 같다. 長而異俗의 而도 그렇다. 《禮記》 「喪服小記」에 士妾有子而爲之緦/無子則已, ‘士妾에게 자식이 있으면 삼베로 만들고, 자식이 없으면 그만 둔다’라는 말이 있고, 《墨子》 「明鬼 下」에 則先死者/非父則母/非兄而姒也, ‘그러면, 먼저 죽는 사람은, 아비가 아니면 어미이고, 형이 아니면 姒다’라는 말이 있으며, 《史記》 「季布欒布列傳」에 與楚則漢破/與漢而楚破, ‘楚나라와 함께하면 漢나라를 깨뜨리고, 漢나라와 함께하면 楚나라를 깨뜨린다’라는 말이 있다. 예문들에서 而는 모두 ‘그러면’으로, 則과 의미가 같다. 而가 則과 서로 교차되어 쓰인 사례도 있다. 《禮記》 「樂記」에 喜則天下和之/怒則暴亂者畏之, ‘즐거우면 天下가 어우러지고, 빡치면 暴亂한 자들이 두려워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荀子》 「樂論」에는 喜而天下和之/怒而曓亂畏之라고 되어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可以仕則仕/可以止則止/可以久則久/可以速則速, ‘출사할 만하면 출사하고, 그만둘 만하면 그만두며, 久할 만하면 久하고, 速할 만하면 速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孟子》 「萬章 下」에는 이 말이 可以速而速/可以久而久/可以處而處/可以仕而仕라고 되어 있다. 而와 則이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소개되어 있다. ◈ 同은 부사어로, ‘똑같이’, ‘동일하게’라는 말이다. 聲을 한정한다. ◈ 聲은 용언으로, ‘소리를 내다’라는 뜻이다. 즉, 生而同聲은 ‘태어나면 똑같이 소리를 낸다’라는 말이 된다. 나는 ‘태어났을 때 내는 소리는 똑같다’라고 의역하였다. ◈ 長은 용언으로, ‘자라다’, ‘크다’라는 말이다. ◈ 異는 아마 부사어로, ‘다르게’라는 말일 것이다. ◈ 俗은 아마 용언으로, ‘풍속이 이루어지다’, ‘풍속이 형성되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長而異俗은 ‘자라면 다르게 풍속이 이루어진다’는 말이 된다. 나는 ‘자라나면서 풍속은 달라진다’라고 의역하였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俗 다음에 者가 한 글자 더 있다. 즉, 生而同聲/長而異俗이 아니라, 生而同聲/長而異俗者라고 되어 있다는 뜻이다. 《大戴禮記》의 경우, 生而同聲과 長而異俗이 각각 관형어구가 되어, 者를 한정하게 되고, 《荀子》의 경우, 生而同聲과 長而異俗이 각각 節로 기능하게 된다. 문법 구조적인 차이만 존재할 뿐, 의미는 같다. ◈ 教는 체언으로, ‘가르친 것’, ‘교육시킨 것’을 이른다. ‘교화한 것’이라고 해석해도 좋겠다. ◈ 使는 ‘~하게 하다’, ‘~하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然을 받는다. 여기서는 ‘~때문에’, ‘~로 인해’처럼 의역하였다. ◈ 使之然의 之는 의미 없는 글자인 듯하다. ◈ 然은 용언으로, ‘그러하다’라는 말이다. 자라나면서 풍속이 달라지게 된 일을 이른다. 즉, 使之然은 ‘然하게 하다’, 곧 ‘풍속이 달라지게 만들다’라는 뜻이다. ◈◈ 蜀虎案 : 干, 越, 夷, 貉은 모두 풍속이 상이하고, 존재하는 지역도 다른데, 태어났을 때는 모두 ‘으아앙’하면서 똑같이 울지만, 자라나면서 말도, 습관도, 상식도 모두 달라진다. 荀子는 이 점이 干, 越, 夷, 貉 사람들이 그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 節의 요지 역시 선천적인 요인 보다는, 후천적인 학습이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더 크게 결정한다는 荀子의 생각과 일치한다. ◈◈ 蜀虎又案 : 본문을 해설할 때 설명하였듯, 干 혹은 邗이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논쟁이 많았다. 《墨子》에도 干越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 干 대해서도 여러 학자들이 논박을 펼쳤다. 《荀子集解》에 인용된 설과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그래도 여러 설들을 찬찬히 검토해 본다는 취지에서, 孫詒讓의 《墨子閒詁》 중, 이 干에 대해 인용된 설들을 부분적으로 발췌해 실어 둔다. 《墨子》 「兼愛 中」에는 以利荊楚干越與南夷之民, ‘이로써 荊, 楚, 干, 越, 그리고 南夷 사람들을 이롭게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王念孫은 干越/卽吳越/非春秋所謂於越也//畢改干越爲于越/亦非, ‘干越은 곧 吳越이라는 말이다. 《春秋》에 나오는 於越이 아니다. 畢沅은 干越을 于越로 고쳤으니, 또한 틀렸다’라고 하였다. 《春秋》 「定公」 5년, 40년, 「哀公」 13년에 於越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王念孫이 於越이 아니라고 한 까닭은, 畢沅이 《墨子》 본문의 干越을 《春秋》에 나오는 於越과 같은 말인 줄 알고, 于越로 고쳤기 때문이다. 於와 于는 의미가 같은 글자다. 그리고 王念孫은 또, 莊子刻意篇曰/夫有干越之劍者///釋文/司馬彪云/干/吳也//吳越出善劍也///案/吳有谿名干谿//荀子勸學篇曰/干越夷貉之子//楊倞曰/干越/猶言吳越///淮南原道篇曰/干越生葛絺///高注曰/干/吳也///是干越/卽吳越也//干越/爲二國/若春秋之於越/卽是越/而以於爲發聲/與干越不同, ‘《莊子》 「刻意」에 “저 干越의 검을 갖고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이 있는데, 《釋文》에서는 司馬彪가 “干은 吳나라다. 吳와 越에서는 좋은 검이 나온다”라고 한 말을 인용해 두었다. 생각해 보건대, 吳나라에 干谿라는 이름의 계곡이 있는 듯하다. 한편 《荀子》 「勸學」에 “干越과 夷貉의 아이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楊倞은 “干越은 吳越이라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淮南》 「原道」에는 “干越에는 葛絺가 난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干은 吳나라다”라고 설명하였으니, 이 干越은 곧 吳越이라는 뜻일 것이다. 干越은 두 나라를 이른다. 《春秋》에 나와 있는 於越 같은 표현은 곧 是越이라는 말로, 於를 발어사처럼 쓴 것이다. 즉, 이 於越은 干越과는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刻意」는 《莊子 外篇》에 속한다. 《釋文》은 陸德明의 《經典釋文》을 이른다. 《淮南》 「原道」는 《淮南子》 「原道訓」을 이른다. 지금 《淮南子》 「原道訓」에는 干越生葛絺이 아니라 於越生葛絺이라고 되어 있는데, 누가 干을 于라고 착각하고, 이를 다시 같은 의미의 於로 바꾸어 놓은 결과일 것이다. 劉台拱은, 干/與哀九年左傳/吳城邗/溝通江淮之邗/同, ‘干은 哀公 9년에 대한 《左傳》의 “吳나라가 邗에 성을 쌓고, 도랑을 파서 長江과 淮水로 통하게 만들었다”에 있는 邗과 같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설들에 대해 孫詒讓은 案/王劉說是也//干/邗之借字//說文邑部云/邗/國也/今屬臨淮//一曰邗本屬吳///管子內業篇云/昔者吳干戰///據管子說/則吳干/本二國/後干爲吳所滅/遂通稱吳爲干/故此云干越矣, ‘생각해 보건대, 王念孫과 劉台拱의 설이 타당하다. 干은 邗의 가차자다. 《說文》 「邑部」에 “邗은 나라 이름이다. 지금의 臨淮 지역에 속한다. 일설에는 邗이 본래 吳나라에 속했다고 한다”라는 말이 있고, 《管子》 「內業」에 “옛날에 吳와 干이 싸움을 벌였다”라는 말이 있다. 《管子》에 나온 이야기에 근거해 보면, 吳와 干은 본래 두 나라였되, 나중에 干이 吳에게 망하여, 마침내 吳를 干이라고 부르게 되었기에, 이에 이와 같이 干越이라고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昔者吳干戰이라는 말은 「內業」이 아니라 「小問」에 나온다. 孫詒讓의 결론은 내가 본문에서 추론하였던 바와 동일하다. [본문으로]
  8. 詩曰, ◈ 詩는 체언으로, 《詩》, 즉 《詩經》을 이른다. ◈ 曰은 말을 표현하거나, 다른 곳의 글을 인용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曰이 云으로 되어 있다. 云 역시 曰과 같다. [본문으로]
  9. 嗟爾君子/無恆安息//靖共爾位/好是正直//神之聽之/介爾景福, ◈ 嗟는 독립어로, ‘아아’처럼 감탄하거나 탄식하는 말이다. ◈ 嗟爾君子의 爾는 2인칭 대명사로, 여기서는 ‘너희’, ‘너희들’이라고 해석될 것이다. ◈ 君子는 체언으로, ‘군자’다. 주어 역할을 하고 있다. 글의 첫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君子는 본래 王이나 諸侯의 자제 같은 귀족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본래 「小明」에서도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荀子는 君子라는 표현을 儒家적인 맥락에 맞추어 사용하였을 것이므로, 본문의 君子는 관직에 올라서 자기 직무를 처리하려 하는 爲政者라고 해석해야 타당할 듯하다. 鄭玄은 其友未仕者, ‘출사하지 않은 자기 친구들’이라고 풀이하였고, 朱熹는 君子/亦指其僚友也, ‘君子는 자기 동료들을 또한 가리키는 표현이다’라고 풀이하였다. ◈ 無는 부정어로, ‘~하지 말아라’라는 말이다. 勿과 같다. ◈ 恆은 부사어로, ‘언제나’, ‘항상’이라는 말이다. 鄭玄은 恆/常也, ‘恆은 언제나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朱熹의 《詩經集傳》에는 恆이 恒으로 되어 있는데, 朱熹는 恒/常也, ‘恒은 언제나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恆과 恒은 같은 글자다. 그런데 無恆安息은 ‘恆 安하게 息하지 말라’라는 뜻이므로, 나는 恆을 문맥에 맞게 ‘잠시라도’, ‘조금이라도’로 의역하였다. ◈ 安은 부사어로, ‘편안하게’라는 말이다. 息을 한정한다. ◈ 息은 용언으로, ‘쉬다’, 가만히 ‘있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安息은 지금의 ‘안주하다’라는 말과 의미가 같다. 毛亨과 朱熹는 息/猶處也, ‘息은 있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 靖共은 용언으로, 아마 ‘올바르다’, ‘올바르게 처리하다’ 혹은 ‘잘 처리하다’라는 의미인 듯하다. 毛亨은 靖/謀也, ‘靖은 도모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鄭玄은 共/具, ‘共은 갖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毛亨과 鄭玄을 따른다면 靖共은 ‘도모하고 갖추다’라는 말이 되는데, 목적어가 爾位, 즉 ‘너의 직위’, ‘너의 직무’이므로, 너의 직무를 ‘도모하고 갖추다’, 즉 일을 ‘처리하다’처럼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한편 朱熹는 靖/與靜同, ‘靖은 靜과 같다’라고 하였고, 共에 대해서는 따로 풀이하지 않았다. 그런데 靜에는 ‘올곧다’라는 뜻이 있다. 또, 共을 公의 가차자로 보면, ‘공정하다’와 같이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靖共은 靜公, ‘올곧다’, ‘바르다’, 즉 ‘올곧게 처리하다’, ‘올바르게 처리하다’라는 뜻이 될 것이다. 靖共을 이렇게 풀이하면, 뒤의 句인 好是正直의 正直과도 의미가 상통하게 된다. 그러면 靜은 어떻게 ‘올곧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詩》 「國風 邶風」의 「靜女」에 靜女其姝/俟我於城隅, ‘靜한 여자는 아름다운데, 성 모퉁이에서 나를 기다린다’라는 말이 있는데, 毛亨은 靜/貞靜也, ‘靜은 올곧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였다. 靖, 靜, 貞 등은 발음이 비슷해서 서로 통용되었을 것이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靖共이 靖恭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삼가 처리하다’, ‘공손하게 처리하다’처럼 해석할 수 있겠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靖/謀, ‘靖은 도모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爾位의 爾는 2인칭 대명사인데, 여기서는 관형어로, ‘너의’처럼 해석된다. 位를 한정한다. ◈ 位는 체언으로, ‘지위’, ‘직위’를 이른다. 여기서는 ‘직위를 가지고 하는 것’, 즉 ‘직무’라고 해석하면 문맥상 타당하겠다. ◈ 好는 용언으로, ‘좋아하다’, ‘훌륭하게 여기다’라는 뜻이다. 正直을 받는다. 여기서는 正直한 태도를 ‘좇다’, ‘따르다’처럼 해석해야 할 듯하다. 《莊子》 「養生主」에 臣之所好者道也, ‘臣이 好하는 바는 道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好 역시 ‘좇다’, ‘따르다’는 의미에 가깝겠다. 朱熹는 好를 去聲, ‘去聲으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한편 鄭玄은 好/猶與也, ‘好는 與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鄭玄 역시 ‘따르다’, ‘좇다’라는 의미를 취한 듯하다. 그러면 與는 어떻게 ‘따르다’처럼 풀이할 수 있을까. 《國語》 「齊語」에 桓公知天下諸侯多與己也, ‘桓公은 天下의 諸侯이 자신을 與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알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無不從也//與/從也,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뜻이다. 與는 따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是는 아마 之처럼, 의미 없는 조사로 사용된 듯하다.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사용되었을 것이다. 是는 之와 같이 사용되었다. 《詩》 「國風 衛風」의 「氓」에 ‘배신한 것 是 생각지 못한 까닭이니, 역시 끝나 버리고 말았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배신한 것 之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라는 뜻이다. 즉, 이 是는 之와 같이 주격 조사처럼 사용되고 있다. 《大戴禮記》 「文王官人」에 ‘평소에 어질고 생각이 있는 사람에게는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기르는 일을 使是해야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중 使是는 使之와 같은 뜻이다. 여기서 是는 之와 같이 의미 없는 조사로 사용되었다. 「文王官人」에는 平人이 아니라 平仁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 王引之가 잘못 인용한 모양이다. 나는 仁에 맞추어 번역하였다. 또, 《春秋左氏傳》 「襄公」 40년에는 ‘晉나라의 命은 未是有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곧 未之有라는 뜻이다. 未之有는 ‘있던 적이 없었다’는 말로, 여기서 之는 의미 없는 조사다. 未是有의 是 역시 之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王引之는 是訓爲之/故之亦訓爲是/互見之字下, ‘是를 之라고 풀이할 수 있으니, 之 역시 是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점은 之에 대한 내용에 수록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是氏」 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 正直은 체언으로, ‘정직한 태도’, ‘바르고 곧은 태도’를 이른다. 正은 ‘바르다’는 말이고, 直은 ‘올곧다’는 말인데, 이 둘은 의미가 가깝다. ◈ 神은 체언으로, ‘신’, ‘신명’을 이른다. ◈ 神之의 之는 아마 주격 조사인 듯하다. ◈ 聽은 용언이다. 聽之의 之를 받는다. 원래 의미 대로 ‘듣다’라고 해석해도 말이 되지만, ‘살피다’라고 하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그러면 ‘神이 살펴 주신다’라는 뜻이 된다. 《戰國策》 「秦策」에 小軫欲去秦而之楚/王何不聽乎, ‘小軫은 秦을 떠나 楚로 가려 한다. 王은 어찌 이를 聽하지 않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聽/察也, ‘聽은 살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聽之의 之는 대명사로, 君子가 취하는 태도, 즉 靖共爾位와 好是正直을 가리킨다. ◈ 介는 용언으로, 아마 ‘돕다’는 말일 듯하다. 毛亨과 朱熹는 모두 介景/皆大也, ‘介와 景은 모두 크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鄭玄은 介/助也, ‘介는 돕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介와 景을 모두 ‘크다’라고 풀이하면, 介爾景福는 아마 ‘커다란 福을 키워 주실 것이다’ 따위로 해석될 것이고, 景을 ‘크다’라고 풀이하고, 介를 ‘돕다’라고 풀이하면, ‘커다란 福을 가지고 도와 주실 것이다’처럼 해석될 것이다. 나는 介를 ‘돕다’라고 풀이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고 생각된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介/助//景/大也, ‘介는 돕다는 말이고, 景은 크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介爾의 爾는 아마 以처럼, ‘~로써’, ‘~를 가지고’처럼 사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면 介爾景福은 ‘景福을 가지고 介한다’라는 의미가 된다. 다만 爾가 以처럼 사용된 사례를 찾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詩》 「小雅 北山之什」의 「楚茨」와 「大田」, 《詩》 「大雅 文王之什」의 「旱麓」, 「大雅 生民之什」의 「行葦」, 또 《詩》 「頌 周頌」의 「潛」에는 모두 以介景福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보다시피 以介景福과 介爾景福은 어순이 다르고, 또 爾와 以가 다를 뿐이다. 두 句의 의미가 같다면, 「小明」의 爾를 以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겠다. ◈ 景福의 景은 관형어로, ‘큰’, ‘커다란’이라는 말일 것이다. 福을 한정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介를 풀이할 때, 毛亨과 朱熹, 楊倞이 景을 大, ‘크다’라고 풀이하였음을 이미 소개하였었다. ◈ 福은 체언으로, ‘복’, ‘복록’을 이른다. ◈◈ 楊倞은 詩/小雅小明之篇, ‘이 詩는 「小雅」의 「小明」이다’라고 하였고, 또 無恆安息/戒之不使懷安也//言能謀恭其位/好正直之道/則神聽而助之福/引此詩以喩勤學也, ‘無恆安息이라는 말은, 안일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경계하는 말이다. 자기 직무를 공손하게 처리하고, 올곧은 길을 좋아할 수 있다면, 神이 살펴서 도와 복을 내린다는 뜻이다. 荀子는 이 詩를 인용해서 부지런하게 공부해야 한다는 점을 비유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 蜀虎案 : 楊倞이 설명하였듯, 이 시는 《詩》 「小雅 北山之什」의 「小明」이다. 외지에서 근무 중인 관리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고백함과 동시에, 그래도 올바르고 정직한 태도로 자기 직분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朱熹는 이 내용이 大夫가 동료 大夫에게 당부하는 말이라고 했다. 荀子는 아마 無恆安息과 好是正直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시를 인용했을 것이다. 荀子는 자신의 논설이 끝날 때마다 《詩》를 자주 인용하는데, 《詩》 원전의 내용과 비교했을 때, 荀子 본인의 주장과 잘 합치되는 경우도 있고, 잘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내 생각에 이 시는 「勸學」 본문과 잘 이어지는 편인 것 같다. 그런데 이 시에 나오는 君子는 유가적인 君子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귀족이자 고관인 大夫를 뜻한다. 즉, 朱熹의 주석을 따라 大夫와 大夫의 대화로 이 시를 이해한다면, 이 시는 귀족 관리들 사이의 대화에 불과한 것이다. 孔子 이후로 君子의 뜻이 大夫 같은 귀족에서 儒家적인 정치인, 학자로 바뀌면서 儒學者들은 《詩》를 이렇듯 '재정의된' 君子의 뜻에 맞춰 해석하게 되었다. 앞으로 《荀子》에 《詩》가 인용될 때는 이 점들을 감안해 해석해야 할 것이다. [본문으로]
  10. 神莫大於化道/福莫長於無禍, ◈ 神은 체언으로, ‘신묘한 것’, ‘신이한 것’이라는 뜻이다. 앞에 인용된 「小明」에서는 神이 ‘神明’이나 ‘신’으로 해석되었었다. 물론 荀子가 이 句에서 神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동기는 「小明」에서 왔을 것이나, 이 神을 ‘神明’처럼 해석하면 공부를 권하는 전체 맥락과 잘 합치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신묘한 것’이라고 번역하였다. ◈ 神莫大於化道의 莫은 용언으로, ‘없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大於化道을 받는다. 즉, 莫大於化道는 ‘大於化道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된다. 福莫長於無禍의 莫도 그렇다. 이 莫은 명사구인 長於無禍를 받는다. 즉, 莫長於無禍는 ‘長於無禍한 것이 없다’라는 말이 된다. ◈ 大는 용언으로, 아마 ‘위대하다’라는 말 같다. ◈ 大於化道의 於는 비교하는 말로, ‘~보다’, ‘~보다 더’라는 뜻이다. 즉, 大於化道는 ‘化道한 것 보다 더 大한 것’이 된다. 長於無禍의 於도 그렇다. 長於無禍는 ‘無禍한 것 보다 더 長한 것’이 된다. ◈ 化道는 명사구로, 아마 올바른 길로 ‘교화하고 이끌어 주는 것’이라는 말 같다. 化는 ‘교화하다’는 말이다. 道는 導로 해석될 수 있다. 導는 ‘이끌어 주다’, ‘계도하다’라는 말이다. 「正名」에 故其民之化道也如神/辨埶惡用矣哉, ‘이렇듯 백성들의 化道는 신명이 이루시듯 진행될 것이니, 무슨 까닭으로 따져서 설명해 주어야 하겠는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 化道 역시 ‘교화되고 계도되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潛夫論》 「德化」에 人君之治/莫大於道/莫盛於德/莫美於教/莫神於化//道者/所以持之也/德者/所以苞之也/教者/所以知之也/化者/所以致之也, ‘군주가 다스리는 방법으로는, 道 만큼 위대한 것이 없고, 德 만큼 盛한 것이 없으며, 교육 만큼 훌륭한 것이 없고, 교화 만큼 신묘한 것이 없다. 道라는 것은 持할 수단이요, 德이라는 것은 감싸 줄 수단이요, 교육이라는 것은 깨우칠 수단이요, 교화라는 것은 致할 수단이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역시 참고로 읽어 볼 만하다. 그러면 道를 어떻게 ‘이끌어 주다’라고 풀이할 수 있을까. 《論語》 「爲政」에 道之以政/齊之以刑/民免而無恥//道之以德/齊之以禮/有恥且格, ‘백성들을 정치로 道하고, 형벌로 바로잡으면, 백성들은 형벌은 면하겠으나 부끄럽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이요, 德을 가지고 道하고, 禮를 가지고 바로잡으면, 부끄럽다고 느끼고 잘못을 바로잡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邢昺은 道/謂化誘, ‘道는 교화하고, 이끌어 준다는 말이다’라고 하였고, 朱熹는 道/音導/下同//道/猶引導/謂先之也, ‘道는 導라고 읽는다. 아래로도 그렇다. 道는 인도하다는 말과 같으니, 모범을 보인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邢昺과 朱熹의 표현은 각각 다를지라도, 의미하는 바는 ‘이끌어 주다’로 같다. ◈ 福은 체언으로, ‘복된 것’이라는 뜻이다. ◈ 長은 용언으로, 아마 ‘훌륭하다’, 혹은 ‘낫다’는 말 같다. 나는 ‘낫다’라고 번역하였다. 《國語》 「楚語」에 使長鬣之士相焉, ‘長한 수염의 士에게 相하게 했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長鬣/美鬚髯也, ‘長鬣이란, 훌륭한 수염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즉, 長은 美, ‘훌륭하다’처럼 해석될 수 있다. 《孟子》 「公孫丑 上」에 敢問夫子惡乎長, ‘감히 묻건대, 선생은 무엇에 長한가’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長은 ‘낫다’, ‘잘하다’라는 말로 사용되었다. ◈ 無禍는 명사구로, 아마 ‘화를 당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는 말 같다. 無는 부정어로, 禍를 한정한다. 禍는 ‘화를 당하다’라는 말일 것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無禍가 旡咎라고 되어 있다. 咎는 ‘잘못’이니, 禍와 같다. 旡는 내 생각에 无, 즉 無와 같은 말 같다. 그러면 旡咎 역시 無禍와 의미가 같다 하겠다. ◈◈ 楊倞은 爲學則自化道/故神莫大焉//修身則自無禍/故福莫長焉, ‘학문을 닦으면 자신을 교화하고, 계도하게 된다. 그래서 신묘하기로는 더 위대한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또, 자신을 수양하면 스스로 화를 당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복되기로는 더 나은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楊倞은 앞의 句를 학문에 대한 말로, 뒤의 句를 수양에 대한 말로 이해하고 있다. ◈◈ 俞樾은 上引詩云/神之聽之/介爾景福///此文神字福字/即本詩文也//今本此二句提行屬下節/非是, ‘앞에서 인용한 詩에, “신명께서 너희들의 태도가 올바르다는 점을 살피시고, 커다란 복을 내리셔서 너희를 도우실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다. 이 부분의 神과 福은 인용한 詩에서 가져 온 말일 것이다. 지금 판본에는 이 두 句를 아랫쪽 節에 포함되도록 옮겨 놓았으니,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俞樾이 본 판본에서는 神莫大於化道/福莫長於無禍를 앞의 詩의 내용과 이어 보지 않고, 이 다음 본문인 吾嘗終日而思矣 부분과 이어서 보았다는 뜻이다. 즉, 문단이 잘못 나뉘어 있다는 말이라 하겠다. ◈◈ 王先謙은 舊本以荀子它篇引詩爲例/遂斷上引詩爲一節/以此二句提行/固屬非是//但下文物類之起至君子愼其所立乎一段/言榮辱禍福之理/正與引詩及此二句相應/若斷屬上節/亦未安//各篇引詩亦多在篇中/不盡屬一節之末//此處不當分段/今正, ‘옛 판본에서는 《荀子》의 다른 편에서 詩를 인용한 경우에 비추어 보았다. 그래서, 앞에서 詩를 인용한 부분을 끊어서 한 節로 간주하였고, 이 두 句의 줄을 바꾸어 놓았으니, 사실 옳지 않다. 다만 아랫쪽 글 중 物類之起부터 君子愼其所立乎까지의 한 문단 내용이 榮辱과 禍福의 이치라는 점을 미루어 볼 때, 바로 인용된 詩 및 이 두 句와 통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만약 이 句를 위의 節에 포함시킨다면, 이 역시 괜찮지는 않겠다. 다른 편들에서 詩를 인용한 사례들을 볼 때, 편 중간에 詩가 인용된 경우가 많고, 節들의 끝에 꼭 속해 있도록 되어 있지는 않다. 이 부분도 문단을 나눌 만하지는 않으니, 지금 바로잡는다’라고 하였다. 王先謙은 이 두 句를 뒤에 포함시킬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꼭 앞에 포함시켜야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 蜀虎案 : 楊倞은 이 句를 앞뒤로 분리하여, 앞을 爲學, 즉 공부, 뒤를 修身, 즉 수양에 대한 내용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修身은 「勸學」의 주 주제가 아니고, 또 修身에 대한 내용이 본문 중에 섞여 있었다고 할 수도 없다. 따라서 두 句 모두 學問에 대한 이야기라고 간주하는 편이 낫겠다. ◈◈ 蜀虎又案 : 神 부분에서 설명하였듯, 사실 이 句에서 神의 의미는, 「小明」에 나온 神의 의미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小明」의 神은 ‘神’이나 ‘神明’처럼 초월적인 존재를 이른다. 그러나 이 句의 神은 문맥상 ‘신묘한 것’, ‘신묘한 일’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小明」에서 神과 福이 나왔기에, 이 句에서 荀子가 神과 福을 소재로 하여,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또 문단을 마무리짓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보더라도 사실이다. 따라서 이 句는 俞樾의 의견처럼, 「小明」과 이어지는 내용으로 간주해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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