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9. 24. 07:55ㆍ순자 이야기(** 수신편 번역 중 잠정 중단)/원문 번역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李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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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0년 5월 4일 13시 24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6
순자 - 1 - 권학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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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178
<하단 주석> 순자 - 1 - 권학 - 2 - 군자의 본성이라고 특별하지는 않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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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嘗終日而思矣,不如須臾之所學也,吾嘗跂而望矣,不如登高之博見也。
登高而招,臂非加長也,而見者遠;順風而呼,聲非加疾也,而聞者彰。
假輿馬者,非利足也,而致千里;假舟檝者,非能水也,而絶江河。
君子生非異也,善假於物也。
나는 하루를 꼬박 사색해 본 적이 있는데, [아무리 사색해 봤자] 잠시 공부한 것만 못했고(吾嘗終日而思矣/不如須臾之所學也, ◈ 吾는 1인칭 대명사다. 아마 荀子 자신을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이 앞에 孔子曰이라는 더 붙어 있다. 《大戴禮記》를 따른다면, 吾는 孔子를 가리키는 말이 될 것이다. ◈ 嘗은 ‘~해 본 적이 있다’는 말이다. 終日而思를 받는다. ◈ 終은 용언인 것 같다. 아마 어떤 기간을 ‘걸치다’, ‘채우다’, 어떤 기간에 ‘상당하다’는 말일 듯하다. 예를 들어, ‘하루에 걸쳐’, ‘한 달에 걸쳐’라고 할 때의 ‘걸치다’와 같다. 日을 받는다. 그러면 終日은 ‘하루에 걸치다’, ‘하루를 채우다’라는 말이 되니, 이 것이 곧 우리가 사용하는 ‘하루 종일’이라는 뜻이다. 終은 終身, 終밤 등의 표현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 日은 체언으로, ‘하루’를 뜻한다. ◈ 而는 순접으로, ‘~하고서’처럼 해석된다. ◈ 思는 용언으로, ‘생각하다’, ‘사색하다’, ‘사유하다’라는 말이다. ◈ 不如는 ‘~한 것만 못하다’, ‘~만 못하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須臾之所學을 받는다. ◈ 須臾는 체언으로, ‘잠시’처럼 아주 짧은 시간을 뜻한다. ◈ 須臾之所學의 之는 관형격 조사 같다. ‘~의’처럼 해석된다. ◈ 所는 ‘~한 바’, ‘~한 것’이라는 말이다. 學을 받는다. ◈ 學은 용언으로, ‘공부하다’는 말이다. 즉, 所學은 ‘공부한 것’이 되고, 須臾之所學은 ‘잠시 동안의 공부한 것’, 즉 ‘잠시 공부한 것’이 된다. ◈ 也는 아마 문장을 끝내는 조사인 듯하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也가 없다. ◈◈ 王先謙은 大戴記吾上有孔子曰三字, ‘《大戴記》에는 吾 앞에 孔子曰이라는 세 글자가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 蜀虎案 : 王先謙이 지적한 것처럼, 《大戴禮記》 「勸學」에는 吾 앞에 孔子曰이라는 더 붙어 있다. 《大戴禮記》가 맞다면, 孔子가 이런 말을 했다는 점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論語》 「衛靈公」에 吾嘗終日不食/終夜不寢/以思/無益/不如學也, ‘나는 하루를 꼬박 먹지도 않고, 야밤 내내 자지도 않으면서 사색해 본 적이 있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공부하는 것만 못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이 바로 《荀子》 「勸學」의 내용과 같다. 邢昺은 此章勸人學也, ‘이 章에서는 사람들에게 공부할 것을 장려하고 있다’라고 하였으니, 「勸學」에 내용이 꼭 맞다는 점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朱熹는 此爲思而不學者言之//蓋勞心以必求/不如遜志而自得也, ‘이 말은 사색만 하고, 공부하지 않는 사람을 위해 한 말이다. 대체로, 자기 마음을 괴롭혀서 갈구하는 짓은, 겸손한 태도로 自得하느니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사색과 공부의 관계에 대해 《論語》 「爲政」에 또 남아 있는 글이 있다. 「爲政」에서는 學而不思則罔/思而不學則殆, ‘공부만 하고 사색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사색만 하고 공부하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라고 하였다. 이 역시 본문 내용과 통하는 면이 있다.), 나는 [또,] 발을 돋워서 멀리 내다 본 적도 있었지만, [발을 아무리 돋워 봤자] 높은 데에 올라서 널리 보는 것만 못했다. [사람들이 높은 곳에 오르면 널리 바라 볼 수 있게 되듯, 군자도 학문을 익히면 만사를 올바르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吾嘗跂而望矣/不如登高之博見也, ◈ 吾는 1인칭 대명사다. 아마 荀子를 가리킬 것이다. ◈ 嘗은 ‘~해 본 적이 있다’라는 말이다. 跂而望을 받는다. ◈ 跂는 용언으로, ‘발을 돋우다’라는 말이다. 跂는 본래 ‘육발이’, 즉 발가락이 정상 보다 많은 사람을 이른다. 《說文解字》 「足部」에는 跂/足多指也//从足支聲, ‘跂는 발에 발가락이 많은 것을 이른다. 足이 들어 있고, 支라고 읽는다’라고 되어 있다. 《方言》에는 躡/郅/跂/𢓜/躋/䠯/登也, ‘躡, 郅, 跂, 𢓜, 躋, 䠯은 오르다는 뜻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혹시 이 해석이 ‘발을 돋우다’라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 《史記》 「高祖本紀」에 軍吏士卒皆山東之人也/日夜跂而望歸, ‘군리들과 사졸들은 모두 山東 사람인지라, 밤이나 낮이나 跂하고 돌아 가기를 바라고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張守節은 跂音丘賜反//說文云/跂/舉踵也///司馬彪云/跂/望也, ‘跂는 丘와 賜의 반절로 읽는다. 《說文》에는 “跂는 발꿈치를 들다는 말이다”라고 되어 있다. 司馬彪는 “跂는 바라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라고 했다. 《說文》은 《說文解字》다. 그러나 상기하였듯, 《說文解字》에는 跂가 육발이로 풀이되어 있다. 그러면 舉踵이라는 말은 어디에 있을까. 《史記》 「人部」에 企/舉踵也//从人止聲, ‘企는 발꿈치를 들다는 말이다. 人이 들어 있고, 止라고 읽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감안해 보면, 아마 跂와 企가 서로 통용되면서, 跂가 企의 의미로도 사용된 듯하다. 司馬彪가 ‘바라다’라고 풀이한 것도, 발꿈치를 들고 갈망하는 모습에서 ‘바라다’는 의미를 파생시켜 사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跂/舉足也, ‘跂는 발을 들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而는 순접으로, ‘~하고서’처럼 해석된다. ◈ 望은 용언으로, ‘멀리 바라 보다’, ‘멀리 내다 보다’라는 말이다. 展望이라는 말과 같다. ◈ 矣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조사다. 의미를 찾는다면, 句를 끝내는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矣가 之로 되어 있다. 之 역시 아마 의미 없는 조사일 것이다. ◈ 不如는 ‘~한 것만 못하다’, ‘~만 못하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登高之博見을 받는다. ◈ 登은 용언으로, ‘오르다’, ‘올라 가다’라는 말이다. 산이나 언덕 같은 데에 ‘오르다’는 뜻이다. 高를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登이 升으로 되어 있다. 升 역시 ‘오르다’는 말이다. ◈ 高는 체언으로, ‘높은 곳’, ‘높은 데’를 뜻한다. 산이나 언덕을 이를 것이다. 登高는 명사구로, ‘높은 데에 오르는 것’, ‘높은 데에 오름’이라는 말이다. ◈ 之는 아마 以처럼, ‘~로써’, ‘~함으로써’라는 말 같다. 그러면 登高之博見은 ‘登高함으로써 博見하는 것’이 된다. 본문의 之를 관형격 조사로 보기는 어렵다. 관형격 조사라면, 登高之博見은 ‘높은 데 오르는 것의 널리 보는 것’이 되는데, 의미야 어거지로 끼워 맞춘다고 해도 영 말이 되지 않는다. 之와 以의 모양이 비슷해서, 쓰다 보니 글자가 잘못되었는지, 아니면 실제로 그렇게 사용하였는지는 모르겠다. 《莊子》 「逍遙遊」에 之人也/之德也, ‘이런 사람들은 德을 가지고서’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之德의 之가 以처럼, ‘~를 가지고서’라고 해석된다. 한편, 《大戴禮記》 「勸學」에는 之가 而로 되어 있다. 그런데 而는 以로 해석할 수 있다. 《墨子》 「尙賢 下」에 使天下之爲善者可而勸也/爲暴者可而沮也, ‘온세상의 善한 사람들을 더욱 권면할 수 있고, 暴한 사람들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고, 또 같은 편에 上可而利天/中可而利鬼/下可而利人, ‘위로는 하늘을 이롭게 할 수 있고, 중간으로는 鬼를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아래로는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다’라는 말이 있다. 《呂氏春秋》 「孟春紀 去私」에는 南陽無令/其誰可而爲之, ‘南陽에 令이 없는데, 누가 맡을 수 있겠느냐’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可而는 모두 可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而가 以와 통용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용된 것이다. 또, 《荀子》 「成相」에는 進諫不聽/剄而獨鹿/棄之江, ‘간언을 올려도 듣지 않으니, 獨鹿을 가지고 목을 베어 강에 버렸다’라는 말이 있는데, 剄而獨鹿의 而는 以, 즉 ‘獨鹿을 가지고’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而」에 수록되어 있고, 또 《荀子》 「成相」의 剄而獨鹿에 대한 王念孫의 주석에도 들어 있다. ◈ 博은 부사어로, ‘널리’, ‘폭넓게’라는 말이다. 見을 한정한다. ◈ 見은 용언으로, ‘보다’라는 말이다. 博見은 명사구로, ‘널리 보는 것’이 된다. 즉, 登高之博見은 ‘높은 데에 올라서 널리 보는 것’이라는 말이다.)
높은 데에 올라서 [팔을] 들어 올리면, 팔이 더 길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보이는 것은 [더] 멀리 있는 듯하고(登高而招/臂非加長也/而見者遠, ◈ 登은 용언으로, ‘오르다’, ‘올라 가다’라는 말이다. 산이나 언덕 같은 데에 ‘오르다’는 뜻이다. 高를 받는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登이 升으로 되어 있다. 升 역시 ‘오르다’는 말이다. ◈ 高는 체언으로, ‘높은 곳’, ‘높은 데’를 뜻한다. 산이나 언덕을 이를 것이다. ◈ 登高而招의 而는 순접으로, ‘~하고서’처럼 해석된다. ◈ 招는 용언으로, ‘들다’, ‘들어 올리다’라는 말이다. 본래는 ‘초’라고 읽지만, 이 때는 ‘교’라고 읽는다. 뒤에 臂, ‘팔’이라는 말이 나오는 점을 보면, 팔을 ‘들어 올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듯하다. 《淮南子》 「主術訓」에 操其觚/招其末, ‘그 觚를 잡고, 그 끝부분을 招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觚/劒拊//招/㪯也, ‘觚는 검의 손잡이고, 招는 㪯라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㪯는 舉의 속자로, 곧 ‘들어 올리다’는 뜻이다. 《國語》 「周語」에는 而好盡言/以招人過, ‘모조리 말하기를 좋아해서, 남의 잘못을 招하였다’라는 말이 있는데, 韋昭는 招/舉也, ‘招는 들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물론 《國語》의 招가 舉라는 뜻이더라도, 사실을 ‘들다’ 같은 의미이므로, 팔 같은 것을 ‘들어 올리다’는 말은 아니지만, 招가 舉와 통용되었다는 점은 이로써 증명할 수 있고, 또 팔을 들든, 사실을 들든, 모두 ‘들다’에서 파생된 의미임은 분명하다 하겠다. 한편, 《漢書》 「禮樂志」에는 諸族樂人兼雲招給祠南郊用六十七人, ‘諸族의 樂人에게, 雲招를 겸하게 하고, 南郊에 제사를 지내는 데 67명을 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雲招에 대해 顏師古는 招讀與翹同, ‘招는 翹와 같이 읽는다’라고 하였다. 翹 역시 ‘들다’, ‘들어 올리다’, ‘치켜 세우다’라는 뜻이다. 翹의 발음이 바로 ‘교’다. ◈ 臂는 체언으로, ‘팔’이다. ◈ 非加長也의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加長也를 받는다. ◈ 非加長也의 加는 아마 부사어로, ‘더욱’, ‘더’라는 말일 것이다. 長을 한정한다. 《孟子》 「梁惠王 上」에, 鄰國之民不加少/寡人之民不加多, ‘이웃 나라 백성들은 加 줄지 않고, 과인의 백성들은 加 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고, 《戰國策》 「秦策」에 軫馳楚秦之間/今楚不加善秦而善軫/然則是軫自爲而不爲國也, ‘陳軫은 楚와 秦 사이를 오가고 있는데, 楚는 秦을 加 좋아하지 않고, 陳軫을 좋아하고 있다. 그러한 즉, 陳軫은 자신을 위할 뿐, 나라를 위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으며, 《禮記》 「儒行」에 言加信/行加義, ‘말은 加 믿을 만하게 하고, 행동은 加 의롭게 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 사례들에서 加는 모두 부사어로, ‘더’ 혹은 ‘더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사례들은 모두 金元中의 《한문 해석 사전》에 수록되어 있다. ◈ 非加長也의 長은 용언으로, 아마 ‘길어지다’, ‘늘어나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加長은 ‘더 길어지다’, ‘더 늘어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加長은 관형어구 역할을 하면서 也를 한정하고 있으므로, ‘더 길어지는’, ‘더 늘어나는’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非加長也의 也는 아마 者와 같은 말로, ‘~하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관형어구인 加長을 받는다. 즉, 加長也는 加長者로, ‘더 길어지는 것’, ‘더 늘어나는 것’이라는 말이 되고, 非加長也는 ‘더 길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가 된다. 그러면 也를 어떻게 者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禮記》 「檀弓」에 古者冠縮縫/今也衡縫, ‘옛날에는 冠을 세로로 꿰맸는데, 요즘은 가로로 꿰맨다’라는 말이 있고, 《論語》 「陽貨」에는 古者民有三疾/今也或是之亡也, ‘옛날에는 백성들에게 문제가 세 가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라는 말이 있다. 이 문장들에는 모두 古者와 今也가 대구를 이루고 있으니, 이로써 볼 때 今也는 앞의 句를 따라 今者가 되어야 함이 분명하고, 실제로 의미 자체도 그렇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예시들은 王引之의 《經傳釋詞》 「也」에 들어 있다. ◈ 臂非加長也는 《大戴禮記》 「勸學」에 非臂之長也라고 되어 있다. 이 경우, 之는 주격 조사일 것이다. 臂非加長也라고 하면 ‘팔은 더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가 되고, 非臂之長也라고 하면 ‘팔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가 된다. 이처럼 臂가 주어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목적어를 이루는 句에 포함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의미는 같다. ◈ 而見者遠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 見者遠은 아마 ‘보이는 것이 멀게 느껴진다’와 같은 표현 같다. 見者는 체언으로, 아마 ‘보이는 것’을 이를 듯하다. 見은 관형어로 ‘보이는’이라는 말이고, 者는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遠은 용언으로,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말일 듯하다. 팔을 드는 사람이 언덕 위에 있고, 관측자는 낮은 곳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이 팔을 들면, 언덕 위에 있는 사람은 관측자에게 아마 팔 때문에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見者가 遠해진다고 표현하였을 듯하다. 이 방법은, 이 句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而聞者彰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다소 이상하지만, 의미와 대구를 모두 만족시키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다. 見者遠를 해석할 수 있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더 있다. 첫 번째 방법은 者를 ‘~하는 사람’이라고 보고, 見者를 ‘보이는 사람’, 혹은 ‘보는 사람’이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見者遠은 ‘보이는 사람은 멀어진다’ 혹은 ‘보는 사람은 멀어진다’처럼 해석될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구문의 의미가 불분명해질 뿐더러, 팔을 들었다는 앞의 내용과도 합치되지 않는다. 두 번째로, 者를 諸로 볼 수도 있다. 諸는 之於 또는 之乎와 같으므로, ‘~에서’처럼 해석될 것이다. 그러면 見者遠은 見之於遠이 되고, 이는 ‘遠에서 見한다’, 즉 ‘먼 곳에서도 보인다’라는 말이 된다. 이렇게 보면 문맥과 잘 합치되고, 번역 역시 매끄럽다. 그러나 이 句와 대구를 이루고 있는 而聞者彰은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따라서 者를 諸로 간주할 수는 없다. ◈◈ 蜀虎案 : ‘높이 올라서 팔을 든 사람이 멀리까지 볼 수 있다’라는 뜻이 아니라, ‘높이 올라서 팔을 들면 더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는 뜻인 것 같다.), 바람을 업고 소리를 지르면, 소리가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들리는 것은 [더] 또렷해진다. [군자는 공부를 통해 세상일이 이러하다는 이치를 깨닫게 된다.](順風而呼/聲非加疾也/而聞者彰, ◈ 順은 용언으로, ‘따르다’, ‘거스르지 않다’라는 말이다. 風을 받는다. 즉, 順風이란, ‘바람을 따르다’, 즉 ‘바람을 거스르지 않다’, ‘바람을 업다’라는 따위의 말일 것이다. ◈ 風은 체언으로, ‘바람’이다. ◈ 順風而呼의 而는 순접으로, ‘~하고서’처럼 해석된다. ◈ 呼는 용언으로, ‘소리를 지르다’, ‘부르짖다’라는 말이다. ◈ 聲은 체언으로, ‘소리’다. ◈ 非加疾也의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加疾也를 받는다. ◈ 非加疾也의 加는 아마 부사어로, ‘더욱’, ‘더’라는 말일 것이다. 疾을 한정한다. 加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 나온 非加長也의 加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非加疾也의 疾은 용언으로, 아마 ‘빨라지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加疾은 ‘더 빨라지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加疾은 관형어구 역할을 하면서 也를 한정하고 있으므로, ‘더 빨라지는’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非加疾也의 也는 아마 者와 같은 말로, ‘~하는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관형어구인 加疾을 받는다. 즉, 加疾也는 加疾者로, ‘더 빨라지는 것’이라는 말이 되고, 非加疾也는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된다. 也가 者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은 앞에 있는 非加長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聲非加疾也는 《大戴禮記》 「勸學」에 非聲加疾也라고 되어 있다. 聲非加疾也라고 하면 ‘소리는 더 빨라지는 것이 아니다’가 되고, 非聲加疾也라고 하면 ‘소리가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가 된다. 이처럼 聲이 주어 역할을 하느냐, 아니면 목적어를 이루는 句에 포함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의미는 같다. ◈ 而聞者彰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 聞者는 체언으로, ‘들리는 것’을 이르는 듯하다. 聞은 관형어로, ‘들리는’이라는 말이고, 者는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만약 者를 ‘~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한다면, 聞者는 ‘듣는 사람’ 혹은 ‘들리는 사람’이 될 텐데, 그러면 서술어인 彰과 전혀 맞지 않게 된다. ◈ 彰은 용언으로, 소리가 ‘뚜렷해지다’, ‘또렷해지다’라는 말일 것이다. 즉, 聞者彰은 ‘들리는 것은 또렷해진다’라는 말이 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彰이 著라고 되어 있다. 著는 ‘두드러지다’, ‘분명해지다’라는 말이다. ◈◈ 蜀虎案 : 듣는 사람 입장에서 더 또렷하게 들린다는 말일 것이다.)
마차를 사용하는 사람은 [마차를 탄다고] 발걸음이 빨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걸어 가는 것에 비해 훨씬 쉽게] 천 리를 가고(假輿馬者/非利足也/而致千里, ◈ 假는 용언으로, ‘빌리다’라는 말이다. 輿馬를 받는다. 여기서는 물건의 힘이나 기능을 ‘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이 假는 물건을 ‘사용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그러면 荀子는 왜 用이 아니라 假라고 하였을까. ‘필요에 따라 만물의 특성을 잘 이용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여기서는 ‘사용하다’라고 번역하였다. 《禮記》 「王制」에 大夫祭器不假, '大夫는 祭器를 假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假는 '남에게 빌리다'는 말이다. 《春秋左氏傳》 「成公」 2년에는 唯器與名/不可以假人, '오직 器와 名만은 남에게 假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고, 「昭公」 32년에는 是以爲君愼器與名/不可以假人, '그래서 군주된 자는 器와 名을 신중하게 다루어야 하니, 남에게 假해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있다. 이 두 문장에서 假는 '빌려 주다'는 말로 사용되었다. 《莊子》 「大宗師」에 假於異物/託於同體, ‘각종 외물들의 육신을 假하다가 지금은 인간의 한 몸에 의탁해 있는 것일 뿐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假 역시 ‘빌리다’는 뜻이다. ◈ 輿馬는 체언으로, ‘마차’라는 말이다. 輿는 ‘수레’를, 馬는 히히힝거리는 ‘말’을 뜻한다. 즉, 輿馬는 ‘수레와 말’이므로, 곧 한 단어로 ‘마차’가 된다. ‘수레와 말’이라고 따로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뒤의 句에 나오는 舟檝이 곧 한 단어로 ‘배’, ‘나룻배’를 뜻하므로, 輿馬 역시 ‘마차’처럼 한 단어로 보는 편이 타당하겠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輿馬가 車馬로 되어 있다. 車는 輿와 마찬가지로 ‘수레’를 뜻한다. ◈ 假輿馬者의 者는 ‘~하는 사람’이라는 말 같다. 관형어구인 假輿馬를 받는다. 즉, 假輿馬者는 ‘輿馬를 假하는 사람’, 곧 ‘마차를 사용하는 사람’이 된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利足也를 받는다. ◈ 利는 용언으로, ‘빠르게 하다’라는 말이다. 《淮南子》 「墬形訓」에 輕土多利/重土多遲, ‘輕土에는 利한 사람이 많고, 重土에는 더딘 사람이 많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利/疾, ‘利는 빠르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 足은 체언으로, ‘발’, ‘발걸음’이다. 즉, 利足은 ‘발을 빠르게 하다’, ‘발걸음을 빠르게 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이 句에서 利足는 也를 한정하는 관형어구이므로, ‘발을 빠르게 하는’,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非利足也의 也는 者와 같다.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관형어구인 利足을 받는다. 즉, 利足也는 利足者로, ‘발걸음을 빠르게 하는 것’이 된다. 也가 者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앞에 나온 非加長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而致千里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 致는 어떤 장소에 ‘이르다’, ‘도달하다’라는 말이다. 千里를 받는다. 즉, 致千里는 ‘천 리나 떨어진 곳에 이르다’, 곧 ‘천 리를 가다’라는 말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가다’라고 의역하였다. 《周禮》 「春官宗伯」에는 大卜에 대해, 掌三夢之法/一曰致夢/二曰觭夢/三曰咸陟, ‘大卜은 세 가지 꿈에 대한 法을 관장한다. 세 가지 꿈이란, 첫 번째는 致夢이요, 두 번째는 觭夢이요, 세 번째는 咸陟다’라는 말이 있는데, 鄭玄은 致夢/言夢之所至/夏后氏作焉, ‘致夢이란, 꿈이 이르는 바를 뜻한다. 夏后氏가 만든 것이다’라고 하였고, 賈公彦은 馴致爲至/故云夢之所至也, ‘鄭玄은 致를 이르다고 풀이하였다. 그래서 꿈이 이르는 바라고 풀이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 千里는 체언으로, 아마 ‘천 리나 떨어진 곳’을 이를 것이다. ◈◈ 蜀虎案 : 마차의 특성을 이용하면, 발걸음이 빠르지 않더라도, 천 릿길을 갈 수 있다. 즉, 축지법 같이 이상한 재주를 익히지 않더라도, 마차라는 物을 잘 사용하면 문제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나룻배를 사용하는 사람은 [나룻배를 탄다고] 수영을 잘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수영하는 것에 비해 훨씬 쉽게] 강이나 바다를 건넌다. [이와 같이 만물의 특징과 쓰임새를 알고, 활용하면, 어려운 일이라도 쉽고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假舟檝者/非能水也/而絶江河, ◈ 假는 용언으로, ‘빌리다’는 말이다. 舟檝을 받는다. 여기서는 假輿馬者에서처럼, ‘사용하다’라고 의역하였다. ◈ 舟檝은 체언으로, 아마 ‘나룻배’를 이를 것이다. 舟는 ‘배’를 이른다. 檝은 楫과 같은 글자로, 배를 젓는 ‘노’를 이른다. 즉, 舟檝은 ‘배와 노’로, 곧 ‘나룻배’를 뜻한다. 檝은 판본에 따라 楫으로 되어 있기도 한 것 같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舟檝이 舟楫으로 되어 있다. ◈ 非는 용언으로, ‘~가 아니다’라는 말이다. 能水也를 받는다. ◈ 能은 용언으로, 아마 ‘~를 할 수 있게 되다’ 혹은 ‘~를 잘하게 되다’라는 말일 것이다. 水를 받는다. 이 경우, 다른 용언을 보조하는 것이 아니라, 能 자체로 용언의 역할을 한다. 즉, 본문에서 能은 용언이고, 能이 받는 水는 체언이 된다. 반면, 水를 용언으로 보고, 能을 용언인 水를 보조하는 표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대구를 이루고 있는 非利足也와 대구를 이루지 못하게 된다. 非利足也에서 利는 용언이고, 足은 체언이었기 때문이다. 非利足也와 맞추려면, 能이 용언이고, 水가 체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能이 독립적인 용언으로 사용된 사례는 어디에 있을까. 《禮記》 「中庸」에 唯聖者能之, ‘오직 聖者만이 之를 能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문장에서 能은 ‘~를 할 수 있다’라는 용언으로 사용되었다. 또, 《廣韻》 「下平聲」에서는 能/工善, ‘能은 工善하다는 뜻이다’라고 풀이하였는데, 工善은 ‘~에 소질이 있다’, ‘~를 잘하다’라는 뜻으로, ‘잘하게 되다’라는 의미와 같다. 여기서는 利足의 利가 ‘빨라지다’라고 해석되었음을 감안하여, 能을 ‘잘하게 되다’라고 번역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能/善, ‘能 잘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나의 풀이와 의미가 가깝다. 한편, 俞樾 역시 能을 용언으로 간주하였으나, 俞樾은 耐, ‘견디다’라고 풀이하였다. 俞樾은 能/當讀爲耐//漢書食貨志/能風與旱///鼂錯傳/其性能寒///趙充國傳/漢馬不能冬///師古注竝曰/能/讀曰耐///此文能字正與彼同, ‘能은 마땅히 耐로 읽어야 한다. 《漢書》 「食貨志」에 “바람과 가뭄을 能한다”라는 말이 있고, 「鼂錯傳」에는 “그 품성상 추위를 能한다”라는 말이 있으며, 「趙充國傳」에는 “漢나라 말은 겨울을 能하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모든 경우에 대해 주석에서 “能은 耐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이 문장의 能도 바로 저 경우들과 같다’라고 하였다. 《漢書》 「食貨志」는 《漢書》 「食貨志 上」을 이른다. 이에 대해 顏師古는 能讀曰耐也, ‘能은 耐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鼂錯傳」은 《漢書》 「爰盎晁錯傳」을 이른다. 이에 대해 顏師古는 能讀曰耐//此下能暑亦同, ‘能은 耐로 읽는다. 아래에 있는 下能暑에서 역시 그렇다’라고 하였다. 「趙充國傳」은 《漢書》 「趙充國辛慶忌傳」을 이른다. 이에 대해 顏師古는 能讀曰耐, ‘能은 耐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俞樾처럼 ‘견디다’라고 풀이하면, 能水는 耐水, ‘물에 견디다’라는 말이 되는데, 의미야 끼워 맞출 수 있다 하더라도, 자연스럽지 못하다. ◈ 水는 체언으로, ‘수영’이다. 水와 泳은 고대에 통용되었을 듯한데, 「勸學」 외에서 水가 ‘수영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된 사례를 찾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水가 ‘수영하다’라는 의미임을 증명하는 정황적 증거들은 존재한다. 이 句는 여러 글들에 인용되어 있는데, 어떤 글들에서는 水로 그대로 인용되어 있고, 어떤 글들에는 游라고 인용되어 있다. 그런데 游는 ‘헤엄치다’, ‘수영하다’라는 말이다. 본문의 水가 곧 游의 의미이기 때문에 이렇게 游로 인용된 경우가 존재할 것이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그대로 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淮南子》 「主術訓」에는 이 句가 乘舟楫者/不能游而絶江海, ‘舟楫을 乘한 사람은 游하지 못하더라도 江海를 絶한다’라고 인용되어 있고, 《說苑》 「談叢」에는 이 句가 乘船楫不游絶江海, ‘船楫을 乘하면 游하지 않더라도 江海를 絶한다’라고 인용되어 있으며, 《文子》 「上仁」에는 이 句가 乘舟楫者不游而濟江海, ‘舟楫을 乘한 사람은 游하지 않더라도 江海를 濟한다’라고 인용되어 있다. 즉, 이 水는 游, ‘헤엄치다’, ‘수영하다’라는 말과 같다. 水가 ‘수영’이라면, 能水는 ‘수영을 잘하게 되다’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 能水는 也를 한정하는 관형어구이므로, ‘수영을 잘하게 되는’처럼 해석해야 할 것이다. ◈ 非能水也의 也는 者와 같다.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관형어구인 能水를 받는다. 즉, 能水也는 能水者로, ‘수영을 잘하게 되는 것’이 된다. 也가 者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은 앞에 나온 非加長也의 也 부분에서 이미 설명하였다. ◈ 而絶江河의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 ‘하지만’처럼 해석된다. ◈ 絶은 용언으로, ‘가로지르다’, ‘건너다’, ‘지나다’라는 말이다. 江河를 받는다. 즉, 絶江河는 ‘江河를 건너다’라는 말이 된다. 絶은 본래 ‘끊다’는 말이므로, ‘끊다’에서 ‘가르다’로, ‘가르다’에서 ‘가로지르다’, ‘건너다’라는 의미가 파생되었을 것이다. 이 말은 《淮南子》 「主術訓」에 동일하게 인용되어 있는데, 高誘는 絶/猶過也, ‘絶은 지나다는 말과 같다’라고 하였다. 또, 이 말은 《文子》 「上仁」에는 濟江海라고 되어 있는데, 濟는 물을 ‘건너다’라는 말이다. 즉, 본문의 絶 역시 ‘건너다’, ‘지나다’라는 말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다른 사례들도 있다. 《漢書》 「成帝紀」에 不敢絶馳道, ‘감히 馳道를 絶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顏師古는 絶/橫度也, ‘絶은 가로지르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呂氏春秋》 「先識覽 悔過」에는 絶諸侯之地, ‘제후의 땅을 絶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高誘는 絶/過也, ‘絶은 지나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또, 《史記》 「天官書」에 後六星絶漢抵營室曰閣道, ‘뒤의 별 여섯 개는 은하수를 絶하여 營室에 이르니, 閣道라고 한다’라는 말이 있는데, 司馬貞은 絶/度也, ‘絶은 건너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張守節은 直度曰絶, ‘곧장 건너는 것을 絶이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본문에 대해, 楊倞은 絶/過, ‘絶은 지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江河는 아마 江海가 잘못된 말인 듯하다. 江海는 체언으로 ‘강과 바다’를 이른다. 江河가 본래 江海였을 것이라는 설은 王念孫이 주장한 바이다. 王念孫은 江河本作江海/海與里爲韻//下文/不積小流/無以成江海///亦與里爲韻//今本海作河/則失其韻矣//文選海賦注引此正作絶江海/大戴記勸學篇/說苑說叢篇/竝同//文子上仁篇作濟江海/文雖小異/作江海則同, ‘江河는 본래 江海라고 되어 있었을 것이다. 海와 里는 운을 이룬다. 뒤에 나오는 不積小流/無以成江海라는 문구의 海 역시 里와 운을 이룬다. 지금 판본에는 海가 河로 되어 있는데, 이러면 운이 맞지 않다. 《文選》에 있는 「海賦」에 대한 주석에서는, 이 글을 인용해 두었는데, 絶江海라고 올바르게 되어 있고, 《大戴記》 「勸學」과 《說苑》 「說叢」에도 모두 동일하게 되어 있다. 《文子》 「上仁」에는 濟江海라고 되어 있다. 글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江海라고 되어 있기로는 같다’라고 하였다. 《文選》의 주석은 李善이 모아 둔 주석을 이른다. 그런데 「海賦」에 대한 주석에는 不積小流/無以成河海는 인용되어 있어도, 이 부분의 絶江河가 인용되어 있지는 않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說叢」은 「談叢」의 오기일 것이다. 絶江海가 인용되어 있는 곳도 「談叢」이다. 《說苑》에는 「說叢」이라는 편이 없다. 《淮南子》 「主術訓」에도 이 글이 인용되어 있다. 「主術訓」에 역시 絶江海라고 되어 있다. 나는 한자의 韻에 대해서 아는 점이 없기에, 王念孫의 설이 韻이라는 측면에서 타당한지, 부당한지에 대해 논할 수는 없지만, 내용상 江河 보다는 江海가 더 적합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王念孫을 따라 江海로 보고, ‘강이나 바다’라고 번역하였다. 王念孫이 지적하였듯, 《大戴禮記》 「勸學」에는 江河가 江海로 되어 있다. ◈◈ 蜀虎案 : 나룻배의 특성을 이용하면, 수영을 하지 못하더라도 강이나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즉, 수영으로 바다를 건널 체력이 없더라도, 나룻배라는 物을 잘 사용하면 문제 없이 살아 갈 수 있다는 뜻이다.)
군자의 품성은 비범하지 않다. [사람들이 마차와 나룻배를 활용해서 천 리를 가고, 물을 건너듯, 군자는 학문을 닦았기에 팔을 들면 더 멀리서도 보이고, 바람을 업으면 말을 더 또렷하게 전할 수 있다는 이치를 알게 된다. 즉, 군자는 날 때부터 비범한 것이 아니라, 다만 학문을 갈고 닦아서] 만사를 잘 처리하게 되었을 뿐이다.(君子生非異也/善假於物也, ◈ 君子는 ‘군자’라는 말이다. 여기서 관형어로, 生을 한정하고 있다. ‘군자의’처럼 해석된다. 《大戴禮記》 「勸學」에는 君子生이 君子之性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로써 이 君子가 관형어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더 분명하게 알 수 있다. ◈ 生은 체언이다. 본래 生은 ‘태어나다’는 말인데, 여기에서는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 ‘타고 나는 것’, 즉 ‘품성’, ‘본성’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곧, 性과 같다. 《荀子》에는 生이 性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다소 있다. 상기하였듯, 《大戴禮記》 「勸學」에는 生이 아예 性으로 되어 있다. 《禮記》 「中庸」에는 或生而知之, ‘어떤 사람은 生하면서부터 이 점을 알고 있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生은 ‘태어나다’, ‘나다’라는 의미로, 그 의미가 본문의 生과 유사하다. 《書》 「周書 君陳」에 惟民生厚/因物有遷, ‘백성들은 태어나면서 돈후한데, 物 때문에 바뀐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에 대해 孔安國은 言人自然之性敦厚/因所見所習之物有遷變之道, ‘사람이 타고난 性은 돈후한데, 보고, 겪는 物 때문에 바뀌게 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고, 蔡沈은 言斯民之生/其性本厚/而所以澆薄者/以誘於習俗/而爲物所遷耳, ‘백성들이 태어났을 때, 그 性은 본래 돈후하지만, 야박하게 변하는 까닭은, 세상의 습속에 꾀이기 때문이니, 物 때문에 바뀌었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부분의 生 역시 본문의 生처럼 性과 같이 해석된다. 본문에 대해, 王念孫은 生/讀爲性//大戴記作性, ‘生은 性이라고 읽는다. 《大戴記》에는 性이라고 되어 있다’라고 하였다. 《大戴記》는 《大戴禮記》다. ◈ 非는 아마 不과 같은 부정어인 듯하다. 異를 받는다. 만약 非를 ‘~가 아니다’라는 용언으로 해석한다면, 異를 체언으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면 君子生非異也는 ‘君子의 生은 異한 것이 아니다’라고 해석될 것이다. 반면, 非가 부정어라면, ‘君子의 生은 異하지 않다’가 된다. 부정어인 쪽이 보다 자연스럽다. ◈ 異는 용언으로,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뜻인데, 이는 곧 ‘특별하다’, ‘특이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긍정적으로 해석되므로, ‘비범하다’처럼 번역할 수 있겠다. 따라서 生非異는 ‘生이 異하지 않다’, 즉 ‘품성이 비범하지 않다’라는 말이므로, 이는 곧 君子가 천성적으로는 보통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뜻이다. 楊倞은 生非異/言與眾人同也, ‘生非異라는 말은, 보통 사람들과 동일하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異가 ‘비범하다’처럼 해석된다는 점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史記》 「仲尼弟子列傳」에 皆異能之士也, ‘모두 異한 능력의 선비들이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異은 ‘비범하다’, ‘특출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외에도 神異, 異人 같은 말들에서도 異는 ‘특출나다’, ‘비범하다’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 《大戴禮記》 「勸學」에는 非異也와 善假於物也 사이에 而가 더 들어 있다. 즉, 君子之性非異也/而善假於物也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而는 역접으로, ‘그러나’라고 해석하거나, 아니면 ‘다만’처럼 해석해야 하겠다. ◈ 善은 용언으로, ‘잘하다’라는 말이다. 명사구인 假於物을 받는다. ◈ 假는 용언으로, 아마 일을 ‘처리하다’라는 말 같다. 앞에서는 ‘빌리다’, ‘빌려서 쓰다’, ‘사용하다’, ‘활용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앞에 나왔던 假와, 이 假는 동일하게 해석하기 어렵다. 앞에 나왔던 假는 보통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용되었지만, 이 假는 君子를 대상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 假를 풀이하려면 먼저 假於物의 物을 해석해야 한다. 物은 본래 ‘사물’, ‘만물’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君子는 儒家적인 爲政者를 이른다. 이에, 나는 이 의미에 맞추어서, 物을 ‘萬事’, 즉 爲政者가 처리해야 할 ‘일’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면 假는 ‘萬事’에 대한 용언이 되어야 하고, 그러면 ‘처리하다’라고 풀이해야 가장 정합되리라 생각된다. ◈ 於는 ‘~에 대해’라는 뜻이다. 物을 받는다. 여기서는 ‘~를’처럼 번역하였다. ◈ 物은 체언으로, ‘萬事’를 이른다. 爲政者가 처리해야 할 ‘일’을 뜻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善假於物의 假를 풀이할 때 이미 설명하였다. 따라서 善假於物은 ‘物에 대해 假하기를 善하다’, 즉 ‘세상 만사를 처리하기를 잘하다’라는 말이 된다. 여기서는 ‘만사를 잘 처리하게 되다’처럼 의역하였다. 주석을 참고하면, 楊倞은 善假於物의 物을 學처럼 해석하고 있는데, 그러면 善假於物은 ‘학문에서 깨달은 이치를 빌려 쓰기를 잘하다’라는 뜻이 된다. ◈◈ 楊倞은 皆以喩修身在假於學, ‘이 말은 모두 자신을 수양하는 도리가 학문에서 깨달은 이치를 빌려 쓰는 데에 달려 있다는 점을 비유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楊倞은 善假於物의 物을 學처럼 해석하고 있다. ◈◈ 蜀虎案 : 吾嘗終日而思矣부터 善假於物也까지의 문단은 맥락을 해석하기 어렵다. 각 문장의 내용은 쉽지만, 이 문장들이 내용상 따로 노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문단은 총 네 부분으로 나뉜다. 먼저 첫 번째인 吾嘗終日而思矣/不如須臾之所學也//吾嘗跂而望矣/不如登高之博見也 부분은 말할 것도 없이, 사리를 깨우치는 데에는 학문 만한 것이 없다는 의미다. 그런데 두 번째 부분인 登高而招/臂非加長也/而見者遠//順風而呼/聲非加疾也/而聞者彰은 학문과 직접 상관이 없다. 두 번째 부분은 내 생각에, 세상의 이치가 이러이러하다는 점을 설명하는 말 같다. 세 번째 부분인 假輿馬者/非利足也/而致千里//假舟楫者/非能水也/而絶江河 역시 학문과는 직접 상관이 없다. 아마 사물의 이치를 깨우치면, 어려운 일도 쉽게 처리할 수 있다는 말 같다. 마지막 부분인 君子生非異也/善假於物也는 君子에 대한 글이지만, 역시 학문과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善假於物이 있기에, 세 번째 부분과 이어지는 듯 보인다. 그러면 이 네 부분을 어떻게 이어야 할까. 혹시 한 문단으로 묶을 수 없는데, 내가 잘못 묶은 것이 아닐까. 그렇지는 않다. 이 뒷부분에서는 살아 가는 환경이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므로, 君子生非異也/善假於物也와 전혀 이어지지 않으며, 앞부분에서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설명하면서 「小明」을 인용하여 내용이 완결되었다. 따라서 吾嘗終日而思矣부터는 새로운 문단이 시작된다고 간주해야 한다. 楊倞은 善假於物의 物을 學으로 해석하였고, 이 방식이 무난하지만, 그러면 또 두 번째와 세 번째 부분이 교량 역할을 하지 못하고 붕 떠 버린다. 그래서 나는, 君子는 학문을 배우는데, 그 학문을 통해 두 번째 부분 내용과 같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을 수 있고, 세상의 이치를 깨달으면 마차나 나룻배를 활용하듯 爲政者의 입장에서 萬事를 쉽게 처리할 수 있게 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면, 君子가 남들과 달리 세상 萬事를 쉽게 처리할 수 있는 까닭은, 결국 학문을 배웠기 때문일 따름이므로, 君子가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고, 또 학문의 중요성도 동시에 부각시킬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보면 흐름이 상대적으로 뚜렷해진다. 어떤 句文이 원문에서 누락되지 않았나 의심해 보기도 하였지만, 《大戴禮記》 「勸學」을 비롯해, 《荀子》를 인용한 다른 글들에, 이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이 인용되어 있지는 않으므로, 또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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