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천왕 대 관구검(삼국사기 동천왕본기 중)

2020. 6. 6. 10:38삼국사기 이야기/고구려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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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고구려는 세 나라 중 가장 북쪽에 있었고, 어떤 식으로든 중국과도 가장 많이 접촉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아예 육지로 중국과 접경하지 않았고, 특히 신라는 한반도 동남부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기도 힘들었습니다. 반면 고구려는 건국 당시부터 중국과 거의 항상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바로 옆이 중국이었으니까요. 수도였던 위나암에서 조금만 나가도 현도군, 낙랑군과 접했고, 그 너머는 요동이고, 그 너머는 요서이며, 요서 너머는 바로 중국의 '내지'인 유주, 지금의 북경 일대였습니다. 신나라와 고구려 사이에 전쟁이 터지기도 했고, 모본왕 때는 한나라의 우북평, 상곡, 어양 등지를 약탈하면서 태원까지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태조대왕 때는 요서에다가 축성하기도 했죠.

 

 

노랑은 우측부터 위나암, 낙랑, 현도, 요동, 요서 / 빨강은 우측부터 유주 일대, 태원

 

 

 

 

 

 

하지만 진나라(秦) 이래로 북방에서 중국의 가장 큰 적은 항상 흉노와 그 일파였기 때문에, 고구려와의 '분쟁'은 중국에게 아주 큰 일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모본왕, 태조대왕대의 정황을 볼 때, 고구려에게는 선비, 오환 등 유목 민족들과 연계된 체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아직 낙랑군이나 대방군조차 넘어서지 못했었고, 그 때문에 순수하게 자력으로 한나라를 공격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태조대왕 때는 아직 현도군도 잡아먹지 못했을 때니, 약탈 기사를 설명하려면 더더욱 선비 등의 연계를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현도군은 지속적으로 서북방으로 쫓겨나긴 했으나, 아직 요동군과 함께 고구려가 서쪽으로 나가는 길을 막고 있긴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엎치락, 뒷치락 하던 고구려와 중국은 동천왕대에 이르러 일대의 반전을 겪고 맙니다. 동천왕은 227년에서 248년까지 재위했는데, 이 때는 위나라가 한나라의 제위를 찬탈한 직후였습니다. 위나라의 문제는 후한의 헌제를 내쫓고 220년에 제위에 올라 천자를 참칭했습니다. 위나라를 이어 촉한과 장강 이남의 해적들도 천자를 참칭하면서, 같은 하늘에 태양이 세 개나 떠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삼국시대입니다. 하지만 말이 삼국시대지, 삼국이 정립하기 전까지는 각지에 '자사'나 '태수', '목'을 참칭하는 군벌들이 늘어서 있었고, 220년에도 요동에는 공손씨가 사실상 독립 상태로 살아 있었으며, 위촉오 세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들도 심심찮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개판입니다. 개판이니까 소설이 재밌죠.

 

또한, 이 시기에는 북방 상황도 예전과는 달랐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모본왕, 태조대왕 시대에는 선비, 오환 등과 고구려 사이의 네트워크가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고구려가 한나라를 상대로 공격적으로 굴 수 있었던 것이죠. 이 때는 그런 네트워크가 붕괴했던 것 같습니다. 조조는 원씨를 공격하면서 원씨에 협력했던 오환도 덤으로 박살내 버렸습니다. 요서의 백랑산에서 원씨의 잔당과 오환왕 답돈을 이기고, 답돈을 잡아 죽여 버린 것입니다. 요동의 공손씨는 조조에게 항복해 세력을 보존할 수 있었으나, 오환족은 완전히 추락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207년입니다. 조씨들은 이 이후에도 꾸준히 북방에 신경을 썼습니다. 이 덕분에 적어도 서진시대에 돌입하기 전까지 유목민족들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일으킬 수도 없었습니다.

 

 

노랑은 좌측부터 백랑산, 요동 / 빨강은 아래부터 오환, 선비

 

 

 

공손씨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손씨는 조씨들에게 완전히 정복당한 적이 없이, 백랑산 전투 이후 형식적으로 예속해 있는 것에 불과했고, 조씨들 역시 공손씨들이 너무 멀리 있었기 때문에 눈엣가시였겠으나 정복할 엄두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공손씨에 비해서는 유씨나 해적들이 훨씬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따라서 조씨와 공손씨는 서로서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공존'할 수 있었습니다.

 

공손씨들은 본래 공손도가 처음 요동태수를 맡은 이후, 사방을 압박하며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 유명한 발기의 난을 틈타 고구려의 내정에 관여하기도 했고, '요동후'를 참칭하고는, 스스로 천자가 된 것처럼 굴었죠. 그래서 고구려에서도 공손도를 싫어했고, 한나라에서도 싫어했으며, 공손도의 관사 아래 살던 메뚜기도 공손도를 싫어했습니다. 하지만 '효웅' 공손도는 204년에 죽었고, 공손도의 자리는 공손강이 이었습니다. 공손강 역시 고구려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건안 연간 중에 공손강이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불태웠다는 말이 있습니다. 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에 나오죠. 고구려본기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는데, 아마 전쟁이 있긴 있었던 모양입니다. 아니면, 진수가 발기의 난 때의 사건과 혼동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207년에는 조조가 요서까지 들이닥쳤습니다. 쭈구리 공손강은 상기한 것처럼 앞으로는 조씨에 고개를 숙이고, 뒤로는 쭈구리가 되어 깝치지 않고 있었습니다. 공손강은 221년에 죽고, 그 뒤는 공손공이 이었는데, 공손공은 공손강의 동생이고, 모두 공손도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공손공은 228년에 공손공의 아들인 공손연에게 축출되었기 때문에 228년 이후 요동은 공손연이 꽉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손연은 편을 제대로 정하지 않았습니다. 공손연은 위나라와 해적들 사이에서 줄을 탔는데, 사실 어느 쪽에도 진정 협력하지는 않았습니다. 위촉오 중 누가 통일하더라도, 공손씨가 그 세력을 유지하기에 힘들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모두에게서 이익을 취할지언정, 모두의 적이 되어선 안 되는 법인데, 공손연은 모두의 적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나라는 군대 1만 명과 사절단 400여 명을 보내 선물과 관작을 공손연에게 보냈지만, 공손연은 선물은 받고 사신들과 군대는 잡아 죽여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해적 두목 손권은 공손연을 잡아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었습니다. 위나라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위나라에서는 공손연이 오나라와 계속 붙어 먹는 것을 불안하게 여겼는데, 계속 관작을 올려 주며 회유하려 했으나 회유되지 않음에 점차 인내심을 잃고 있었습니다. 결국 공손연은 손권의 원수가 되었고, 조예의 암덩어리가 되었으며, 고구려의 눈엣가시가 되고 말았습니다. 고구려는 왜 싫어했을까요? 공손도 때의 문제도 있었고, 현도군과 낙랑군 등을 총괄하던 공손씨와 충돌이 없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적의 적은 '일시적'으로라도 친구일 수 있습니다. 위나라와 고구려는 공손연을 잡아 죽이기 위해 힘을 합하고 말았습니다. 동천왕 즉위 이후 고구려와 위나라는 이미 여러 번 사신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236년에는 해적들이 사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八年, 遣使和親.(동천왕, 234)

 

十年, 春二月, 孫權, 遣使者胡衞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斬之, 傳首於.(동천왕, 236)

 

十一年, 遣使如, 賀改年號. 是景初元年也.(동천왕, 237)

 

 

사신은 같은 사신인데, 고구려에서는 위나라와만 가까이 지내고 해적들의 사신은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머리는 위나라로 보내 버립니다. 이 때는 아직 공손연을 협공하기 전이라, 위나라와 고구려가 직접 접경하지 않았습니다. 상기한 것처럼 이 시기의 해적들은 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외부의 동맹을 찾았습니다. 공손연에게 배신당한 이후엔 고구려에게 손을 뻗쳤으나, 고구려측에서 이를 거부했던 모양입니다. 손권이 외교라고 한다는 게 대체로 이 모양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없으나, 위나라는 이미 237년에 단독으로 공손연을 공격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군대를 동원했던 장군은 유주자사 관구검이었습니다.

 

 

遣幽州刺史毌丘儉率諸軍及鮮卑, 烏丸屯遼東南界, 璽書徵公孫淵. 淵發兵反, 儉進軍討之, 會連雨十日, 遼水大漲, 詔儉引軍還.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 遼西烏丸都督王護留等居遼東, 率部衆隨儉內附. 己卯, 詔遼東將吏士民爲淵所脅略不得降者, 一切赦之. 辛卯, 太白晝見. 淵自儉還, 遂自立爲燕王, 置百官, 稱紹漢元年. 詔青, 兖, 幽, 冀四州大作海船.(삼국지 위지 명제기, 237)

 

青龍中, 帝圖討遼東, 以儉有幹策, 徙為幽州刺史, 加度遼將軍, 使持節, 護烏丸校尉. 率幽州諸軍至襄平, 屯遼隧. 右北平烏丸單于寇婁敦, 遼西烏丸都督率眾王護留等, 昔隨袁尚奔遼東者, 率眾五千餘人降. 寇婁敦遣弟阿羅槃等詣闕朝貢, 封其渠率二十餘人為侯, 王, 賜輿馬繒採各有差. 公孫淵逆與儉戰, 不利, 引還. (삼국지 위지 왕관구제갈등종전, 관구검)

 

 

237년 당시 위나라에서는 유주자사였던 관구검을 보내 공손연을 공격했습니다. 관구검은 오환과 선비를 동원해 요동으로 갔고, 공손연을 회유하려 했으나 공손연은 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전투가 벌어졌는데, 명제기에서는 관구검이 공손연을 토벌했으나 열흘이나 비가 와서 요수가 넘쳤기 때문에 명제가 관구검에게 회군하라고 하명했다고 합니다. 이 때 우북평과 요서의 오환족들은 관구검을 따랐으며, 결국 공손연은 연왕으로 확실히 독립하고 연호까지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 이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관구검이 먼저 이겼다면 비가 세 달 동안 왔다면 모를까, 상식적으로 고작 비가 열흘 내린 것 가지고 원정을 파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관구검의 열전에는 공손연이 불리해 퇴각했고, 이후 관구검도 퇴각한 것 같으나, 요하가 넘쳤다는 말은 없습니다. 사실 이 말도 이상하죠. 공손연이 불리해 퇴각했으면, 공손연을 '진압'하려는 관구검이 추격하는게 상식 아닐까요.

 

1차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위나라에서는 공손연을 방치해 둘 수 없었습니다. 결국 238년에 재차 공손연을 공격합니다. 이 때 고구려 역시 위나라를 도왔습니다. 아마도 234, 236, 237년의 사건들로 위나라는 고구려를 믿을 수 있었고, 고구려도 위나라를 적어도 공손연에 대해서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해던 것 같습니다.

 

 

十二年, 大傅司馬宣王, 率衆討公孫淵, 王遣主簿·大加, 將兵千人助之.(동천왕, 238)

 

二年春正月, 詔太尉司馬宣王帥衆討遼東 ... 丙寅, 司馬宣王圍公孫淵於襄平, 大破之, 傳淵首于京都, 海東諸郡平. 冬十一月, 錄討淵功, 太尉宣王以下增邑封爵各有差. 初, 帝議遣宣王討淵, 發卒四萬人. 議臣皆以爲四萬兵多, 役費難供. 帝曰:「四千里征伐, 雖云用奇, 亦當任力, 不當稍計役費.」遂以四萬人行. 及宣王至遼東, 霖雨不得時攻, 羣臣或以爲淵未可卒破, 宜詔宣王還. 帝曰:「司馬懿臨危制變, 擒淵可計日待也.」卒皆如所策.(삼국지 위지 명제기, 238)

 

明年, 帝遣太尉司馬宣王統中軍及儉等眾數万討淵, 定遼東. 儉以功進封安邑侯, 食邑三千九百戶.(삼국지 위지 왕관구제갈등종전, 관구검)

 

景初二年, 太尉司馬王率衆討公孫淵, 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238년 전쟁의 총지휘관은 사마의였습니다. 명제기에는 관구검이 나오지 않으나, 열전에는 관구검 역시 사마의의 휘하로 들어가 요동으로 종군했다고 합니다. 아마 관구검은 여전히 유주자사로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사마의가 지휘했기 때문에 삼국지뿐만 아니라 진서에도 그 행적이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무능력하고 무식해서 진서까지 찾아 보지는 못했습니다. 한편 고구려가 참전했다는 말은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의 오환선비동이전에 짧게 나오지만 정작 명제기와 왕관구제갈등종전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 김부식이가 위지의 기록을 베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위나라가 주공이었고, 고구려는 보조적 역할이었을 겁니다. 공손연 토벌은 위나라의 문제였으니까요.

 

 

파랑은 237년의 관구검 단독 공격 / 빨강은 238년의 사마의, 동천왕 연합 공격

 

 

결국 238년의 2차전으로 공손연은 잡혀 죽고 말았고, 양평 사람들은 비열한 예비 반역자 사마의에게 학살당했습니다. 이후 사마의와 관구검 등은 모두 상을 받았으나, 원정을 도왔던 고구려가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두 나라의 관계는 급속하게 나빠집니다.

 

 

 

 

 

동천왕은 갑자기 서안평을 공격했습니다.

 

 

十六年, 王遣將襲破遼東西安平.(동천왕, 242)

 

正始三年, 宮寇西安平.(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위에서부터 요동, 서안평, 낙랑

 

 

서안평은 일반적으로 지금의 단동으로 봅니다. 의주에서 압록강 건너편입니다. 당시 유주자사는 요동과 낙랑, 대방 역시 관할했습니다. 서안평이 떨어지면 요동에서 낙랑으로 이어지는 육로가 끊어지는 셈입니다. 바닷길이 지금처럼 쉽게 열리는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서안평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했습니다. 한나라와 위나라에서도 서안평을 지키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고구려에서도 서안평을 함락시키는 것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중국의 입장에서는 낙랑, 대방을 지키는 창구였고,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낙랑과 대방을 잡아 먹을 첫 번째 걸림돌이었으니까요. 따라서 서안평은 비단 동천왕 때의 관심사만은 아니었습니다.

 

 

秋八月, 王遣將, 襲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妻子.(태조대왕, 146)

 

十二年, 秋八月, 遣将襲取遼東西安平.(미천왕, 311)

 

 

태조대왕 때도 공격한 적이 있었고, 나중에 미천왕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가 서안평을 '점령'한 것이 바로 미천왕 때입니다. 서안평이 떨어지자, 때라도 만난 듯 낙랑과 대방도 고구려에 바로 넘어가 버리니, 313년과 314년의 일입니다. 태조대왕과 동천왕은 서안평을 공격하고 약탈했을 뿐, 점령하고 영유하지는 못했죠. 서안평을 공격했던 태조대왕 때에도 고구려는 한나라와 일관되게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동천왕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유주자사로 재직 중이던 관구검은 관할령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두고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238년과 242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가 이렇게 나빠졌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요동, 낙랑, 대방 때문에 더 이상 팽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장기적으로 위나라와 사이가 나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나라도 공손연이 없어진 시점에서 고구려가 곱게 보일 수 없었겠죠. 242년에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 전쟁이 터졌을 때, 이것이 상기한 이유 때문에 '자연적'으로 터진 것인지, 아니면 어떤 사건이 있어서 갈등 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측하자면, 요동을 공격할 때 위나라가 고구려에 무언가를 약속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기록이 없습니다. 누가 타임머신을 발명하면 꼭 확인해 주시길 바랍니다.

 

242년에 서안평이 공격당한 뒤,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에는 다른 충돌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동천왕은 245년 10월에 신라를 공격하기도 합니다.

 

 

冬十月, 出師侵新羅北邉.(동천왕, 245)

 

十六年, 冬十月, 髙句麗侵北邉. 于老將兵出撃之, 不克, 退保馬頭柵. 其夜苦寒, 于老勞士卒, 躬燒柴煖之, 羣心感激.(조분이사금, 245)

 

 

이 사실은 고구려본기와 신라본기에 모두 나옵니다. 신라 북쪽 경계를 공격했다는데, 신라의 북계를 경상북도 북부로 생각하고, 여기서는 동천왕의 공격 위치를 영주와 단양 사이의 죽령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노랑은 죽령 / 빨강은 동천왕의 공격 방향

 

 

관구검이 군사 행동을 일으킨 것은 이듬해인 246년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고구려는 아주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다만, 고구려가 패한 건 같지만, 세부적인 내용에서는 삼국사기와 위지의 기록이 좀 다릅니다.

 

 

二十年, 秋八月, 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將歩騎二萬人, 逆戰於沸流水上, 敗之, 斬首三千餘級. 又引兵再戰於梁貊之谷, 又敗之, 斬獲三千餘人. 王謂諸將曰, “之大兵, 反不如我之小兵, 毋丘儉者, 之名將, 今日命在我掌握之中乎.” 乃領鐡騎五千, 進而擊之, 爲方陣, 决死而戰, 我軍大潰, 死者一萬八千餘人.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 冬十, 月攻䧟丸都城, 屠之, 乃遣將軍王頎追王. 王奔南沃沮, 至于竹嶺, 軍士分散殆盡, 唯東部宻友獨在側, 謂王曰, “今追兵甚迫, 勢不可脫. 臣請决死而禦之, 王可遯矣.” 遂募死士, 與之赴敵力戰. 王間行脫而去, 依山谷聚散卒自衞, 謂曰, “若有能取宻友者, 厚賞之.” 下部劉屋句前對曰, “臣試徃焉.” 遂於戰地, 見宻友伏地, 乃負而至. 王枕之以股, 久而乃蘇. 王間行轉輾, 至南沃沮, 軍追不止. 王計窮勢屈, 不知所爲, 東部人紐由進曰, “勢甚危迫, 不可徒死. 臣有愚計, 請以飮食牲犒軍, 因伺隙, 刺殺彼將. 若臣計得成, 則王可奮擊, 決勝矣.” 王曰, “諾.” 紐由軍詐降曰, “寡君獲罪於大國, 逃至海濵, 措躬無地, 將以請降於陣前, 歸死司寇, 先遣小臣, 致不腆之物, 爲從者羞.” 將聞之, 將受其降. 紐由隱刀食器, 進前拔刀, 刺將胷, 與之俱死, 軍遂亂. 王分軍爲三道, 急擊之, 軍擾亂, 不能陳, 遂自樂浪而退. 王復國論㓛, 以宻友·紐由爲第一. 賜密友巨谷·青木谷, 賜屋句鴨渌·杜訥河原, 以爲食邑. 追贈紐由爲九使者, 又以其子多優爲大使者. 是役也, 將到肅愼南界, 刻石紀㓛, 又到丸都山, 銘不耐城而歸. 初其臣得來, 見王侵叛中國, 數諫, 王不從. 得來嘆曰, “立見此地, 將生蓬蒿.” 遂不食而死. 毋丘儉令諸軍, 不壊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동천왕, 246)

 

 

황색은 위에서부터 현도, 비류수, 환도성, 불내성 / 자색은 위로부터 황초령, 죽령 / 적색은 관구검의 공격 방향

 

 

일단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246년 8월에 관구검이 1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에서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동천왕은 비류수에서 요격해 관구검을 크게 이겼습니다. 머리를 벤 것이 3천 급이었다고 합니다. 비류수는 지금의 혼강으로 추정합니다. 혼강은 동가강입니다. 혼하가 아닙니다. 혼하와 혼강은 다르니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양맥에서 싸웠는데 이 때 역시 동천왕이 크게 이겼습니다. 이 때도 머리를 베거나 잡은 적병이 3천여 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인 세 번째 전투에서는 관구검이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항전했기에 동천왕이 크게 졌고, 1만 8천여 명이나 죽었다고 합니다. 이기고 질 수야 있는데, 이 차이가 너무 커서 좀 의뭉스럽습니다. 동천왕은 마지막 전투에서 패해 기병을 이끌고 압록원으로 도주했다고 합니다. 아마 강계나 그 이남 지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관구검의 공격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두 달 뒤인 10월에 관구검이 환도성을 공격해 함락시킨 겁니다. 관구검은 왕기라는 장군을 보내 동천왕을 추격했는데, 동천왕은 남옥저의 죽령에까지 도주했다고 합니다. 죽령은 지금의 황초령으로 볼 수도 있고, 단양과 영주 사이의 죽령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245년에 고구려와 신라가 전쟁을 벌였다는 기사가 있으므로, 멀리 본다면 남쪽의 죽령으로도 볼 수야 있겠습니다... 단, 위의 지도에서는 황초령으로 가정했습니다. 혹자는 이 때 남쪽 죽령으로 도주했다고 가정하고, 이것을 가지고 신라의 미추왕이 고구려 유민의 도움을 받아 즉위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글을 보시면 됩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41

 

태조 성한왕(삼국사기 제사지 중)

제사지 처음 부분에는 왕실의 오묘에 대한 말들이 있습니다. 이 중 혜공왕 시기에 대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至第三十六代惠恭王, 始定五廟. 以味鄒王爲金姓始祖, 以太宗大王·文武大王, 平百

philosophistory.tistory.com

 

 

동천왕은 밀우와 유유 같은 '용사'들의 활약으로 겨우 반격할 기회를 잡았고, 위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밀우와 유유는 삼국사기에 따로 열전이 있을 정도로 당대에 이름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고구려본기와 거의 같으니 따로 인용하지는 않습니다.

 

위군은 격파되기 전에 금석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돌에 자기들의 공적을 새겼습니다. 인용한 동천왕본기에는 '丸都山銘不耐城'라고 했는데, 환도산에 이르러 '불내성'이라고 새겼다는 말입니다. '不耐城'은 글자 그대로 보면 '못 견디는 성이다'라고 볼 수 있지만, 사실 고유 명사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안변에는 불내성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낙랑 동부도위의 치소였기 때문입니다. 위씨조선이 망한 뒤, 한나라에서는 군을 네 개 두었지만, 이 군들은 차차 낙랑군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언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토착 세력에 상실했던 강원도 동북부 지역을 낙랑군이 탈환하면서 이 지역에 동부도위를 뒀었거든요. 환도산은 아마 환도성을 의미할 것이고, 불내성은 고유 명사로 본다면 안변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 내용은 관구검의 열전에는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이라고 되어 있기에 아마 환도산과 불내성 두 군데에 공을 적은 명문을 남겼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겠습니다. 맥락상으로도 그렇습니다. 숙신의 남쪽 경계라면 아마 강원도 중북부일 텐데, 그곳에 환도성이 있을 리는 없겠죠.

 

 

 

이번엔 삼국지 위지를 봅시다.

 

 

 

 

七年春二月, 幽州刺史毌丘儉討高句驪, 夏五月, 討濊貊, 皆破之. 韓那奚等數十國各率種落降.(삼국지 위지 삼소제기, 246)

 

其五年, 爲幽州刺吏毌丘儉所破. 語在儉傳.(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고구려)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舉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삼국지 위지 오환선비동이전, 예)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 舉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삼국지 위지 왕관구제갈등종전, 관구검)

 

六年, 复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慎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溉灌, 民賴其利. 遷左將軍, 假節監豫州諸軍事, 領豫州刺史, 轉為鎮南將軍.(삼국지 위지 왕관구제갈등종전, 관구검)

 

 

노랑은 위로부터 현도, 비류수, 환도성, 매구, 불내성 / 빨강은 244년 관구검의 공격 / 청색은 245년 관구검의 공격 / 자색은 245년 낙랑과 대방의 영동 공격

 

 

오환선비동이전의 고구려조에는 관구검의 열전에 나와 있다고 할 뿐, 다른 말이 없습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기 귀찮았던 모양입니다. 다만 '其'라는 것은 앞의 기록과 이어지는 말로, 위나라의 연호인 정시를 의미합니다. 즉, 고구려조에서는 정시 5년인 244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이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삼소제기에서는 정시 7년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했다고 했습니다. 이 전쟁은 2월에 시작되었고, 5월에는 예와 맥을 모두 이겨, 동이의 번국이 수십 개나 투항했다고 했습니다.

 

기록이 제일 자세한 것은 왕관구제갈등종전입니다. 이곳에서는 고구려가 여러 차례 선빵을 날렸기 때문에 관구검이 보병과 기병 만여 명을 인솔해 현도로 나아갔다 합니다. 비류수에서 싸운 것은 삼국사기와 같으나, 위지에서는 양구에서 또 싸웠다고 했고, 또한 위지에는 동천왕이 관구검에게 연패했다고 했습니다. 관구검은 환도산으로 가서 고구려의 수도를 파괴하고, 사람들을 학살했습니다. 동천왕은 처, 자식만 데리고 숨었으며, 관구검은 이에 회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시 6년인 245년에 관구검은 다시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이번에는 전투 기록도 없습니다. 동천왕은 매구로 도주했고, 현도태수 왕기가 동천왕을 추격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매구는 북옥저나 동부여 어딘가로 봅니다. 다만 삼국사기와 맞춰 보려면 옥저로 보는 것이 맞겠습니다. 위군은 옥저를 지나 1000여 리를 행군했으며, 숙신의 남쪽 경계에까지 이르러 금석문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이 고구려본기에 나왔던 그 말입니다. 환도산과 불내성에 명문을 남겼을 겁니다. 이 때 주살되거나 항복한 자가 8천여 명이었으며, 공을 논해 후로 봉해진 자는 1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관구검은 이 공로로 드디어 변방 유주에서 '탈출'해 예주자사로 전임되었으며, 좌장군으로 승진하고, 진남장군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다만 오환선비동이전의 예조는 주목해 볼 만합니다. 예조에서는 정시 6년에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이 고구려 치하에 들어갔던 영동의 예를 공격해, 불내후 등이 항복했다고 했습니다. 불내는 상기한 대로 안변으로 봅니다. 정시 6년은 245년으로, 다른 기록을 참고할 때 관구검이 재침했을 때입니다. 이 때 동천왕은 옥저 남쪽까지 도주했는데 위군이 추격했다고 했으므로 시기가 맞아 떨어집니다. 1차 원정은 모를까, 2차 원정 당시에는 관구검이 낙랑과 대방의 병력까지 동원하여 고구려가 대무신왕 이래 점유했던 옥저와 영동의 예를 고구려에서 이탈시키려 했으며, 이것은 이 때 위나라에서 아주 작심하고 전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는 증거입니다. 아마 불내 등은 오래지 않아 다시 고구려에게 복속했겠으나, 정시 8년인 247년에 불내후를 불내예왕으로 봉했다는 것을 보면 동천왕 당대에는 수복하지 못한 것 같고, 아마 중천왕 이후는 되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바꿔 보면, 이 때 고구려의 실질 통치 영역은 환도 근처로 한정돼 있었으며, 기타 영역들은 대체로 복속시키고, 예속시킨 상태일 뿐, 아주 완벽히 '고구려령'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두 사료의 기록이 좀 다르죠? 서안평을 공격했다는 연도는 242년으로 모두 같습니다. 하지만 개전 연도는 다릅니다. 고구려본기를 따른다면 이 전쟁은 246년에 시작돼 아마 246년을 넘기지 않은 것 같습니다. 위지에서는 정시 5년인 244년에 시작되어 명년인 245년에 끝났다고 합니다. 다만 삼소제기에서는 246년으로 되어 있어, 고구려본기와 같습니다. 초전 기록도 다릅니다. 고구려본기에서는 동천왕이 연승하다가 마지막에 패했다고 하고, 위지에서는 관구검이 연승했다고 했습니다. 비류수에서 싸운 것은 같지만, 그 후에 고구려본기에서는 양맥에서 싸웠다고 하고, 위지에서는 양구에서 싸웠다고 합니다. 이후 환도성이 털린 것은 양측이 다 같으나, 고구려본기에서는 한 번의 전쟁만 있었다고 하고, 위지에서는 환도성을 함락시킨 이후 관구검이 퇴각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공격해 왔다고 했습니다. 저 남쪽까지 도주한 것은 같으나, 그 이후의 기록은 고구려본기가 더 상세하고, 위지는 간략합니다. 아마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참고할 사료가 국내에 더 남아 있지 않았겠나 싶습니다. 도주한 이후에, 고구려본기에서는 동천왕이 반격해서 위군을 쫓아냈다고 했고, 위지에서는 위군이 돌아갔다는 말이 아예 없습니다.

 

기록이 상세함에는 고구려본기가 더 낫고, 정황에 잘 맞기로는 위지가 나은 점이 있습니다. 다만 위지에서는 시종일관 고구려를 깔보는 투로 기술돼 있습니다. 위지에서는 환도성이 떨어진 이후 고구려가 조직적으로 반격했다는 말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습니다. 불내, 즉 안변까지 동천왕을 추격해 들어간 것이라면 단순히 약탈이나 하려고 온 것은 아닐 텐데, 언제 철수했다는 기록도 나오지 않은 것이 미심쩍습니다. 이 때 고구려가 망해서 '하구려군'이 만들어지지 않은 것을 볼 때, 위지 보다는 고구려본기를 취신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합니다. 수도까지 함락시켜 놓고 그대로 회군했다기엔 미심쩍은 점이 많으니까요. 다만 고구려는 한나라 때부터 대대로 중국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위나라 조정에서 고구려의 수도를 턴 점, 동천왕을 죽기 직전까지 몰아 붙인 점을 들어 논공행상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로 고구려는 한동안 낙랑 등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한동안 중국에 직접 관여하기 보다는 주변의 숙신을 때려잡는 데 힘을 쏟았습니다.

 

의뭉스러운 점은 더 있습니다. 고구려본기에서 동천왕은 위나라의 군대는 많지만 우리 적은 군대 보다 못하다(之大兵反不如我之小兵)라고 합니다. 하지만 고구려본기에서는 위군이 1만 명, 고구려군이 2만 명이라고 했으니 고구려군이 많고, 위군이 적어야 합니다. 동천왕은 반대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아마 중국계 사서도 참고했겠지만, 국내 계열 사서들도 보았을 텐데, 신채호는 김부식이와 친구들이 이것을 뒤섞다가 모순된 말을 넣어 둔 게 아닌가 추정했습니다. 제 생각에도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고구려는 요동 보다 더 동쪽에 있는 먼 나라인데, 관구검이 고작 1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친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관구검은 아마 오환, 선비 같은 유주 관할의 이민족들도 끌고 왔을 것이고, 유주 관할인 낙랑의 병력도 동원했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본다면, 고구려 보다 위군이 전술적으로 우세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지에서 지원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위지에는 관구검이 열세를 극복한 것처럼 나와 있지만요. 만약 위군이 1만 명이라면, 비류수에서 3천이 뒈지고, 양맥에서 또 3천이 뒈지면 전체 병력이 6할 이상이 뒈진 건데, 이건 전략적으로 그 군대가 궤멸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관구검이 대십자가나 케로시오 상징기처럼 사기를 올리는 상징물도 아니고, 위군이 최후의 1명까지 남아 싸우는 멍청이들도 아닐 텐데, 이건 말도 안 되지요. 애초에 '候'로 봉해진 자가 100여 명이라고 한 걸 보아도 전쟁 규모가 고작 이 정도일 수가 없습니다. 게다가 삼소제기에서는 동이의 번국 수십 개가 투항했다고 하고, 오환선비동이전의 예조에서는 낙랑과 대방의 군대까지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한 것을 볼 때, 위군은 고구려를 이기고 고구려에 속해 있단 옥저나 동예 지역을 공격해 고구려에서 이탈시키려 했던 것 같습니다. 이탈 현상은 일시적이었던 것 같긴 하지만, 다시 말하자면 이 전쟁이 단순히 고구려를 털고 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작은 전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리하면, 동천왕대에 위나라 고구려를 공격한 사건은 사료에 나와 있는 것 이상으로 대규모 침공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고구려군은 선전했으나 결국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환도성이 털리고 동천왕은 남쪽 저 멀리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위나라는 고구려 막하에 있던 번국들을 고구려에서 일시적으로라도 이탈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위군이 고구려를 아예 정복할 생각은 없었는지, 아니면 동천왕이 반격에 성공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는지, 결국 위군은 철수했고 고구려는 망하지 않았습니다. 이 때 고구려가 털리지 않았다면, 미천왕 이후 모용씨 보다 한 체급 이상의 국가로 남아 있을 수도 있었겠는데 싶습니다. 미천왕 이후 광개토왕이나 장수왕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는 끊임없이 연나라'들'과 싸우게 되거든요.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깎은 전쟁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가장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오환이나 선비의 동향도 이 전쟁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만약 조조가 오환을 토벌하지 않았고, 조조 사후에도 선비나 오환을 위나라가 토벌하지 않고 방치해 두었다면 관구검과 동천왕의 전쟁은 없었거나, 아님 훨씬 나중으로 늦춰졌을 것입니다.

 

 

 

 

 

전쟁 이후, 동천왕은 환도에서 평양으로 천도합니다.

 

 

二十一年, 春二月, 王以丸都城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及廟社. 平壤者, 夲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동천왕, 247)

 

 

이 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은 아닙니다. 낙랑군이 아직 살아 있었거든요. 환도 근처 어딘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秋九月, 王薨. 葬於柴原, 號曰東川王. 國人懷其恩德, 莫不哀傷. 近臣欲自殺, 以殉者衆, 嗣王以爲非禮, 禁之. 至葬日, 至墓自死者甚多. 國人伐柴, 以覆其屍, 遂名其地曰柴原.(동천왕, 248)

 

 

동천왕은 전쟁에서 패했을지언정 백성들이 미워하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248년에 동천왕이 죽자 사람들이 따라 죽으려 하여 실제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가 모를 이야기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만 고구려와 위나라 사이의 전쟁이 이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尉遅, 將兵來伐. 王簡精騎五千, 戰於梁貊之谷, 敗之. 斬首八千餘級.(중천왕, 259)

 

 

중천왕 12년인 259년에 위나라의 장군 울지해(尉遲楷)가 공격해 온 것입니다. 중천왕은 기병 5천 명으로 위군을 깼는데, 벤 수급이 8천여 개나 된다고 했습니다. 이 기록은 삼국지에는 전하지 않고, 제가 알기로는 고구려본기에만 있습니다. 여기서 적장인 울지해는 성이 '울지'입니다. 울지씨는 중국의 내지인이 아니라 선비족인 울지부에서 갈라져 나왔습니다. 259년이면 중국의 삼국이 통일되는 270년 보다 11년 앞이니, 이 시기 선비, 오환 등은 위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나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때의 공격이 위나라 치하에 있던 선비의 단독 공격인지, 아니면 위나라 조정에서 제대로 파견한 것인지, 혹은 당대의 유주 또는 평주자사가 선비에게 사주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떻든 간에 중천왕은 동천왕의 아들이자 태자였기 때문에, 절치부심하고 기다리다 위군을 깼을 것이므로, 선대의 치욕을 조금이나마 설욕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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