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필산 전투(삼국사기 보장왕본기 중)

2020. 4. 29. 11:34삼국사기 이야기/고구려본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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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주필산 전투는 1차 고구려 당 전쟁 중의 중요한 전투입니다.

 

일단 삼국사기 기록으로는 고구려군이 대패했기 때문에 탁발선비가 안시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고 하죠. 하지만 삼국사기의 해당 부분 기록의 신빙성이 아주 미심쩍습니다. 정황상 김부식이와 친구들은 고구려측에서 남은 사료가 없어서 중국 사료를 그대로 베낀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이 본인도 불평한 적이 있습니다.

 

 

柳公權小說曰, “住蹕之役, 髙句麗與靺鞨合軍, 方四十里, 太宗望之, 有懼色.” 又曰, “六軍爲髙句麗所乗, 殆將不振, 候者告, ‘英公之麾, 黒旗被圍.’帝大恐.” 雖終於自脫, 而危懼如彼, 而新舊書及司馬公通鑑不言者, 豈非爲國, 諱之者乎.

 

 

보장왕본기에 나오는 말입니다. 대충, '유공권이라는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주필산에서 이세적이가 포위당해서 짝눈이가 개쫄았다고 하는데, 이거 왜 구당서, 신당서, 자치통감에 없냐. 이 새끼들 구라 친 거 아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1차전의 정황을 보더라도 아주 의뭉스럽습니다. 대부분, 거의 모든 야전과 공성전에서 탁발씨가 이겼는데, 탁발씨는 고작 안시성 하나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선물을 '하사'하고 물러나고 말죠. 거기다가 전술적으로 승리한 군대답지 않게 요하 하류 지역을 건너다가 얼어 뒤지는 병사들도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짝눈이는 1차전 이후 아주 후회했다고 합니다.

 

 

帝以不能成㓛, 深悔之嘆曰, “魏徵若在, 不使我有是行也.”

 

 

전략적으로는 졌더라도 전술적으로라도 이긴 놈의 감정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된 원인은 당시 중국인들의 마음 속에 짝눈이가 우리나라의 호태왕 같은 왕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쨌건 영웅은 영웅인데, 그 영웅의 가장 큰 실패가 고구려 원정이니까 이걸 미화하려고 꼴값을 떤 게 아닌가 한 거죠. 물론 추측임.

 

어쨌거나, 결국 결국 1차 고구려 당 전쟁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을, 적어도 탁발씨가 전적으로 요동을 휩쓸고 지나갔다고 보면 안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탁발씨가 고구려 경내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갔다, 특히 요동 지역에서 그랬다는 점은 믿을 수 있어도, 그 세부적인 전황은 우리가 맥락에 따라 좀 가려 들어야 한다는 말이죠.

 

 

 

삼국사기에서는 1차전이 시작된 뒤 탁발씨가 요동 지역으로 들어와 여러 전투에서 이겼다고 하고 있습니다.

 

 

 

 

대충 전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453- 짝눈이는 정주에서, 이세적이는 유성(요서)에서 출진함.

6454- 이도종이가 수천 명으로 신성 공격. 신성 수비군, 탁발씨 선발대 10여 명에 벌벌 떰.

                장검이가 건안성에서 고구려군을 이기고 수천 명을 죽임.

                이세적과 이도종이 개모성을 공격해 1만 명 사로잡고 양곡을 10만 석이나 얻음. 개모성을 개주로 함.

                장량, 정명진, 왕대도는 동래(산동)에서 수군으로 바다를 건너 비사성 공격.

6455- 비사성 함락. 남녀 8천 명 사로잡힘.

                이세적은 요동성으로 진군.

                짝눈이는 요택(요하 하류의 늪지대) 건넘.

                고구려에서 신성, 국내성의 보기 4만 명을 보냈는데 이도종과 이세적이 막아 수천 명을 잡아 죽임.

                탁발군 본대가 마수산(요동성 서쪽, 나중의 주필산?)에 주둔.

                짝눈이, 이세적 등이 요동성을 함락시킴. 죽은 자 만 명, 체포된 병사 만 명, 남녀 4만 명, 양곡 50만 석. 요동을 요주로 개칭.

645?- 이세적이 백암성에 이르자 백암성주 손대음이 항복. 백암성을 암주로 개칭.

                연개소문이 7천 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했으나, 이세적이 이를 모두 사로잡음. 개모성을 개주로 개칭

                짝눈이가 안시성 공격.

 

 

기록을 보면 이게 역사서인지, 짝눈이 위인전인지 구분이 안 갑니다. 예전에 김일성이가 솔방울 수류탄으로 활약했다고 프로파간다를 뿌렸다던데, 수준이 비슷한 것 같네요.

 

 

 

이 와중에 바로 고구려군이 15만 명을 보내 안시성을 구하려 합니다. 이 싸움은 아마 마수산에서 벌어진 것 같은데, 전투가 끝난 뒤 산 이름을 주필산으로 고쳤다고 하네요. 그래서 보통 이 전투를 주필산 전투라고 부릅니다.

 

 

 

 

삼국사기를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북부 욕살 고연수, 남부 욕살 고혜진, 대로 고정의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 15만 명을 주어 안시성을 구하게 했다고 합니다. 욕살을 광역시장이나 도지사 정도라고 보면 대로는 총리의 위치이니, 사실 이 병력은 고정의가 총 지휘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帝至安市城, 進兵攻之, 北部耨薩髙延壽·南部耨薩髙恵眞, 帥我軍及靺鞨兵十五萬, 救安市.(삼국사기 보장왕본기)

 

 

짝눈이는 이걸 보고 안색 하나 안 바꾸고 씹덕들 만화에 나올 법하게 말을 하죠.

 

 

帝謂侍臣曰, “今爲延壽䇿有三. 引兵直前, 連安市城爲壘, 㨿髙山之險, 食城中之粟, 縦靺鞨掠吾牛馬, 攻之不可猝下, 欲歸則泥潦爲阻, 坐困吾軍, 上䇿也. 拔城中之衆, 與之宵遯, 中䇿也. 不度智能來與吾戰, 下䇿也. 卿曹觀之. 彼必出下䇿, 成擒在吾目中矣.”(삼국사기 보장왕본기)

 

 

대충, 적들에게는 이러이러한 전략이 가능한데, 고구려놈들은 반드시 상책이 아니라 하책을 고를 거다라는 말입니다. 어디서 많이 본 말 아닌가요? 삼국지연의에도 이런 말이 나오죠? , 신당서, 자치통감이 만들어지고 삼국지연의가 생기기까지 대충 3~400년의 차이가 있는데, 이 새끼들은 소설 쓰는 데 발전이 없는 거죠.

 

 

 

아무튼, 자세한 경과는 여러분이 삼국사기를 직접 읽어 보시면 됩니다. 짝눈이가 솔방울 수류탄 던지는 내용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 실을 가치가 없습니다. 내용은 짝눈이가 신묘한 계책을 내어 고구려군을 유인해 고연수, 고혜진을 붙잡아 항복받았다는 겁니다.

 

전과도 아주 화려합니다. 길을 끊어 항복 받은 병력이 36800명입니다. 그 중 욕살 이하 관장(아마 장교?)3500명이나 되었답니다. 말갈군은 3300명인데, 구덩이에 파묻었다네요.(이근행 병신) 앞의 3500명은 내지(중국)으로 옮기고, 나머지는 자비롭게도 풀어 주어 평양으로 가게 했다고 합니다. 노획한 말은 5만 필, 소는 5만 두, 명광개(개좋은 갑옷) 1만 벌, 기타 기계도 그 정도라고 합니다. 항장 고혜진은 사농경, 고연수는 홍려경으로 임명해 공무원 연금도 타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이후에는 안시성주가 아주 뛰어나다고 이세적이에게 말 하며 소설이 끝날 밑밥을 깔죠.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支之乱, 城守不服, 支擊之, 不能下, 囙而與之. 津安兵弱而糧小, 若岀其不意攻之, 必克. 公可先攻津安, 津安下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城有所不攻者也.’”(삼국사기 보장왕본기)

 

 

차라리 이세적이가 촛불을 밟아 꺼뜨려서 눈깔 보존을 위한 기도에 실패했다고 해라, ㅂㅅ. 아무튼 이 이후는 주필산 전투를 벗어나기 때문에 더 자세히 말 안 함.

 

 

 

그런데 주필산 전투 기록은 아주 의뭉스럽습니다. 근거도 나름 있습니다.

 

첫 번째는 김부식이와 친구들 본인이 소개한 유공권의 글과는 내용이 아주 배치된다는 점입니다. 유공권의 글에는 짝눈이가 쫄았고, 위급한 상황도 있었다고 돼 있는데, 고구려본기에는 짝눈이가 웃으며 고구려군을 이겼다고 되어 있으니까요. 시벌, 기록이 말이 되게 차이가 나야지. 유공권이야 말로 동호의 피를 이어받은 진정한 중국인이 아닌가 합니다.

 

두 번째는 대로 고정의가 주필산 전투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소설적 구조'에서 고정의는 전투 전에 짝눈이를 띄워 주며 고연수, 고혜진에게 경고하는 역할을 하지만, 어쨌건 기록이 있으니 참전했을 것이고, 욕살 보다 대로가 높은 관직이니 고연수, 고혜진만 '신묘한 계책'에 걸렸다 한들, 이것은 소수(적게는 수 천, 많게는 수 만?)일 것이고 고정의의 본대는 그대로 남아있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욕살이 사농경이나 홍려경이 됐으니, 고정의는 국상 정도는 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탁발부 공무원 연금 지급 대상에서는 빠져 있단 말이죠. 안 잡힌 겁니다.

 

세 번째는 안시성에서 탁발씨가 패한 이후의 행적이 아주 지리멸렬하다는 점입니다. 만약 제가 앞에 정리한 기록들처럼, 탁발부가 요동 지역의 고구려 요새들을 전부 다 깨 부수고, 이를 유지해서 요동을 '점유'할 정도라고 한다면, 짝눈이의 퇴각로가 춥고, 얼어 뒤지고, 배 고프고, 불안했을 수가 없습니다. 퇴각로라는 게 고달프긴 하더라도 아마 그 정도는 아니었을 거라는 거죠. 탁발씨는 신성을 벌벌 떨게 만들었고, 건안성에서 수천 명을 잡아 죽였으며, 개모성을 함락시키고 양곡 10만 섬을 빼앗고,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요동성을 함락시켜 양곡 50만 섬을 얻었으며, 백암성을 항복시켰습니다. 근데 군량이 모자랐데요. 안시성 포위 중 군량이 모자라자 빨리 ㅌㅌ했다는 말이 남아 있습니다.

 

 

帝以遼左早寒, 草枯水凍, 士馬難久留, 且糧食将盡, 勑班師.(삼국사기 보장왕본기)

 

 

60만 섬이나 얻은 새끼들이 군량이 모자라? 급하고 위험하게 요택을 건너 퇴각한 것도 고구려군의 내습이 두려웠거나 실제로 내습이 있어서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는 아마 빼앗았던 성들도 다시 탈환당했다고 보는 편이 맞겠져. 1차전 초기 기사가 전부 사실이라도 하더라도, 이후 주필산과 안시성에서 전투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고구려군이 이 성들을 탈환했다면 어땠을까요? 애초에 신성, 건안성은 함락되었다는 말도 없고요. 개모성도 함락 기사가 두 번이나 있는데, 혹이 이 기록도 뺏고 빼앗는 과정이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주필산 전투 이후에 짝눈이는 오골성(압록강 서북쪽)을 통해 평양을 직접 공격할 것을 모의하기도 하는데, 이런 말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고구려 수 전쟁 때처럼 전략적으로 수세에 몰려 도박수를 날리려 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사실 짝눈이 새끼의 2차 고구려 당 전쟁 때는 평양으로 도박수를 던졌다가 몰살당할 뻔했죠.

 

 

네 번째는 2, 3번째와 함께, 고구려군의 주력이 여전히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일단 고정의에 관해 승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고정의의 본대는 주필산 전투에서 몰살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퇴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애초에 36800명 포로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10만 명이 남게 남아 있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탁발씨는 신성을 뚫지 못했는데, 신성(옛 현도성?)은 고구려 초기부터 요동에서 국내성으로 들어오는 길을 막는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보장왕은 신성, 국내성에서 보기 4만 명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동부 지역이나 남부의 병력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크겠습니다. 신성 이북 지역, 즉 옛 부여 지역 병력도 아마 그대로 남아있었을 거에요.

 

애초에 탁발부가 고구려 안에 들어와서 회전을 벌인 것은 이 주필산 전투 뿐이고, 주필산에서조차도 기록상 고구려군을 괴멸시키지 못했습니다. 그 와중에 평양 직공 도박수도 나온 거겠죠.

 

 

 

정리하면, 고구려본기에는 주필산에서 고구려군이 아주 크게 진 것처럼 표현해 놓았으나, 아마 병력 대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야 이후 정황에 잘 맞습니다. 그리고 주필산 전투 전후로 고구려군은 요동 지역 요새들을 탈환하려 했고, 정황상 안시성에서 짝눈이가 퇴각할 즈음엔 요새들을 대부분 탈환하는 데 성공했고, 아마도 요동, 개모성에서 얻었다는 군량들도 고구려군이 다시 찾아 오는 데 성공했던 것 같습니다.

 

1차전에서 굳게 버틴 요동 방어선은 2차전에서도 뚫렸다는 기록이 없는데, 3차전에서 재수 없게 신성이 이세적에게 함락되면서 쭉 뚫려 버립니다.

 

 

* 교훈은, 영웅군담소설도 좀 성의 있게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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