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 3 - 불구 - 1 - 군자는 구차한 길을 걷지 않는다(재번역 예정)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의 느낌과 의견입니다. 아무 의견도 없이 남의 주석을 읽으면 그것은 주석자의 생각으로 자기 생각을 덧씌우는 것밖에 안 됩니다. 먼저 스스로 이해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 본문 중 (음영)은 내용에 대해 제가 달아 놓은 주석입니다. 음영 처리가 안 돼 있는 [괄호]는 본문에 생략되어 있을 만한 말을 자연스럽게 읽게 하기 위해 제가 임의로 집어 넣은 말입니다. (음영)은 내용이 이해가 안 될 때, 또는 내용을 파고 들고 싶을 때 읽으면 좋고, 음영 없는 [괄호]는 본문과 이어 읽으면 좋습니다. 간혹 대화체에 있는 <괄호>는 한 사람의 말이 길게 이어질 때 다음에 이어지는 말이 누구의 말인지 표시하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처음에는 (주석)이나 [보충하는 말] 없이 하려 했지만, 고대 한문이 현대 한국어 어법과 상이하고, 논증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어 불가피하게 넣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 《순자》 번역에는 을유문화사에서 나온 김학주(金學主)의 2017년 번역, 자유문고에서 나온 이지한(安止漢)의 2003년 번역, 그리고 전통문화연구회에서 나온 송기채(宋基采)의 번역, 그리고 각 책의 주석을 참고해서 직접 했습니다. 공부하시는 데 참고하실 수는 있지만, 번역 결과를 무단으로 이용하실 수는 없습니다. 번역에 참고한 서적을 제가 밝혔듯이, 이 글의 내용을 참고해서 사용하실 때는 그 출처인 이 블로그를 반드시 밝히셔야 합니다.
* 《순자》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유형주와 상의한 것이 아주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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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2021년 10월 5일 10시 32분에 처음 작성되었습니다.
해설에 대해서는 다음 링크를 참고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40
순자 - 3 - 불구 - 해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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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때문에 눈이 아프시다면 다음 글을 읽으시길 바랍니다.
https://philosophistory.tistory.com/241
<하단 주석> 순자 - 3 - 불구 - 1 - 군자는 구차한 길을 걷지 않는다
* 철학서를 읽을 때는 아무 주석(특히 철학적 의미에 관한 주석)도 읽지 않고 원문 또는 번역문을 읽어 보길 추천드립니다. 저자의 의도도 있고, 주석자의 의도도 있겠으나, 제일 중요한 것은 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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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行不貴苟難,說不貴苟察,名不貴苟傳,唯其當之爲貴。故懷負石而赴河,是行之難爲者也,而申徒狄能之;然而君子不貴者,非禮義之中也。山淵平,天地比,齊、秦襲,入乎耳,出乎口,鉤有須,卵有毛,是說之難持者也,而惠施、鄧析能之;然而君子不貴者,非禮義之中也。盜跖吟口,名聲若日月,與舜、禹俱傳而不息;然而君子不貴者,非禮義之中也。故曰:君子行不貴苟難,說不貴苟察,名不貴苟傳,唯其當之爲貴。《詩》曰:「物其有矣,唯其時矣。」此之謂也。
[위대해 보이지만] 군자[가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기는 것들이 있다.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자면(行) 구난한 짓을(苟難, 苟는 '구차하다', '비루하다', 難은 '어렵다', 즉 '行이 苟難하다'는 것은 '이행하기 어렵긴 어려운데 사리에는 들어 맞지 않는 짓'이라는 뜻이다.)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不貴, 貴는 '귀중하다', '막중하다', '막대하다', '대단하다', '대수롭다'), 논변으로 말하자면(說) 구찰한 논증을(苟察, 察은 '자세히 생각해 살피는 것'이다. 즉 '說이 苟察하다'는 것은 '생각이 깊고 심오하긴 한데 그 만큼 공을 들일 가치는 없는 논증'을 뜻한다.) 요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不貴), 명망에 대해 말하자면(名) 구전한 명성을(苟傳, 傳은 '전하다', '이어지다'는 말이다. 그래서 '名이 苟傳하다'는 말은 '명망이 널리 퍼져 있긴 한데 올바르고 깨끗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군자는] 오직(唯) 행동이나 논변, 명망이(其, 行과 說, 名을 지칭한다.) [예와 의에] 타당할(當) 때만 대단하게(貴) 여길 뿐이다.
[예를 들어 보겠다.] 무릇(故) 품에(懷) 돌을 안고(負石, 王念孫은 負가 抱, 즉 '안다', '품다'라는 말이라고 했다. 《예기》 「내칙」의 三日始負子, '사흘째가 되면 비로소 자식을 負한다'에 대해, 鄭玄은 負를 抱라고 했고, 《회남자》 「설림훈」의 負子而登牆, '자식을 負하고 담장에 오르는 것은'에 대해서도, 高誘는 負를 抱라고 했다. 아마 고대에는 負가 '등에 지다'와 '품에 안다'는 뜻으로 통용되다가, '등에 지다'로 정착된 모양이다. 사실 글만 봐도 負는 '품에 안다', '품다'는 뜻이 되어야 한다. 강에 빠져 죽으려고 한다면 돌을 품에 안고 뛰어들지, 등에 업고 뛰어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강에 들어간다고(赴河, 赴는 '들어가다') 해 보자. 이런 행위가(是行, 是는 懷負石而赴河를 가리킨다.) 하기 어려운 짓이기는(難爲者, 爲는 '하다', 者는 '~한 것') 하지만 신도적(申徒狄, 《장자 잡편》 「외물」에 등장한다. 務光은 湯에게 선양 제의를 받자 廬水에 빠져 죽었다. 이 소식을 들은 紀他라는 사람이 窾水에 스스로 빠져 죽었다. 紀他가 죽자, 제후들이 紀他를 위문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申徒狄도 3년 뒤에 황하에 빠져 죽었다. 재밌는 점은 紀他와 申徒狄은 선양을 제의받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莊子는 「대종사」에서 亡身不眞, 즉 '道를 깨우치려고는 하지 않고 道에게서 내려 받은 자기 몸만 버렸다'고 하며 이들을 비판했다.)은 해내고 말았다.(能之, 之는 懷負石而赴河) 그러나(然而) 군자는 [그럼에도 이런 짓을] 대수롭다고 생각하지 않는다.(不貴者, 직역하면 '이런 짓은 군자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짓이다'이다.) [왜 그럴까.] 예와 의에 맞지(禮義之中, 中은 '적중하다', '맞아 들어가다') 않기 때문이다.
산과 연못을 평탄하다고 하고, 하늘과 땅이 똑같[이 낮]다고 할 수도 있고(山淵平/天地比, 《장자 잡편》 「천하」에 天與地卑/山與澤平, '하늘과 땅은 모두 낮고, 산과 연못들은 모두 평탄하다'라는 말이 있다. 惠子의 설이다. 楊倞은 《音義》 등을 인용해 말 뜻을 설명하고 있다. 참고할 만하다.), 제나라와 진나라가 같은 곳에 있다고 할 수도 있다.(齊秦襲, 襲은 '포개지다', '겹치다'라고 보면 타당하다. 楊倞은 合이라고 하였는데, 그 뜻은 '같은 곳에 있다'는 것으로 같다. 齊나라와 秦나라는 각각 당시 중국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이지만, '천하를 하나로 보면 어디에 있든 결국 한 나라나 같다'는 취지의 명제로 보인다. 《장자 잡편》 「천하」에 소개된 惠子의 설 중, '我知天下之中央/燕之北/越之南是也', 즉 '나는 천하의 중앙이 어디인지 안다. 연나라의 북쪽이자 월나라의 남쪽, 이곳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과 뜻이 같을 것이다.) [입에서 나가야 할 말이] 귀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와야 할 소리는] 입에서 나온다고 할 수도 있으며(入乎耳/出乎口, 山淵平부터 卵有毛까지의 다른 명제들을 감안할 때, 이 명제들에는 '만물은 동일한 면이 있다', '만물은 어떤 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 같은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그 '상대적 동일성'이 入乎耳와 出乎口에도 적용된다고 생각해 보자. 원래 우리 말은 입에서 나오고, 다른 소리는 우리 귀로 들어온다. 이 말을 '상대적 동일성'에 의거하여, '입에서 나가야 할 말은 귀로 들어오고, 귀로 들어와야 할 소리는 입에서 나온다'고 꼬아 놓았다고 해 보자. 그럼 다른 명제들의 주제와도 잘 합치된다.), 잠박에 수염이 있고, 알에 털이 있다고 할 수도 있다.(鉤有須/卵有毛, 卵有毛는 《장자 잡편》 「천하」에 나오는 말이다. 司馬彪는 '털이나 깃털에는 그에 해당하는 기운이 있어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라도 털이 있다'고 설명했다. 司馬彪를 따른다면 卵有毛은 '시간에 따라 물체가 변하더라도, 모든 특성이 어느 시간대에든 포괄되어 있다'는 주장일 것이다. 鉤有須도 그런 맥락에서 해석해 보자. 일반적으로 須는 '수염', 鉤는 '갈고리'로 해석한다. 《설문해자》에는 須를 面毛, '얼굴에 난 털', 鉤는 曲, '구부러진 것'이라고 했다. '낚싯바늘'을 鉤라고 하기도 하며, 누에를 치는 잠박을 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제 須를 '털'이라고 한다면, 鉤有須는 '낚싯바늘에는 털이 있다', '잠박에는 털이 있다'는 뜻이 된다. 卵有毛의 주제가 '물체가 변하더라도 모든 특성이 시간대에든 포괄되어 있다'였음을 생각해 보자. 잠박으로는 누에를 치고, 낚싯바늘로는 물고기를 낚는다. 그런데 누에에게는 실, 즉 털이 생기고, 물고기에도 수염이 나 있다. 그러면 鉤有須를 '낚싯바늘에 털이 있다' 또는 '잠박에 털이 있다'라고 해석하고, 卵有毛와 같은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게 된다. 나는 鉤를 曲으로 보고, 曲을 '잠박'으로 해석한 경우를 택했다. 山淵平부터 卵有毛까지의 논증을 살펴 보면, 모두 '만물은 동일한 면이 있다', '만물은 어떤 면에서 보면 모두 동일하다'와 같은 주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물론」에서 莊子는 惠子의 方生之說을 평가하면서, 方生之說이 道를 따르는 것만 못하지만, 반대로 儒墨처럼 是非를 가리는 짓이라고 비판하지는 않았다. 참고할 만하다.) 이런 논변들이(是說, 是는 山淵平부터 卵有毛까지를 가리킨다.) 논증하기 어려운 것들이기는(難持者, 持는 '견지하다', '유지하다'이다. 說, 즉 '논변'을 '유지하는 것'이므로, '논증하다'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혜시와 등석(惠施鄧析, 惠施는 惠子다. 名家의 학자이고, 莊子의 친구이자 합종을 주장했던 魏나라의 정치인이었다. 惠子의 행적은 《전국책》에 다수 전한다. 鄧析은 鄧析子다. 鄭나라 사람으로, 子産과 동시대 사람이었다. 《여씨춘추》의 「심응람 이위」에 행적이 짧게 전한다. 楊倞은 劉向이 鄧析을 두고 '操兩可之說/設無窮之辭'이라고 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열자》 「역명」에서 인용한 문구이다. 여기서 兩可之說이란, 대립되는 두 주장을 모두 긍정하는 것을 이른다. 예를 들어 '나는 배가 고프다', '나는 배가 고프지 않다'를 모두 옳다고 하고 논증을 이어갔다는 말이다. 鄧析은 분명 말재주가 아주 뛰어났을 것이다.)은 해내고 말았다.(能之, 之는 山淵平부터 卵有毛까지를 가리킨다.) 그러나 군자는 [그럼에도 이런 논변들을] 요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와 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도척(盜跖, 유명한 도적이다. 《장자 잡편》 「도척」, 《장자 외편》 「거협」에 등장하지만, 역사적 행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은 [자기] 명성이 해나 달과 같[이 드높아지]기를 탐냈는데(吟口, 이설이 많다. 《한시외전》 「권3」에도 吟口라고 되어 있다. 한편 《설원》에는 盜跖吟口/名聲若日月이 盜跖凶貪/名如日月로 되어 있다. 吟은 '신음하거나 탄식하듯 읊다'는 말이다. 吟口가 말이 될지는 차치하더라도, 盜跖이 吟口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楊倞은 吟口 그대로 해석했다. 郝懿行은 《설원》의 凶貪을 고려하여, 원래 貪凶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흉악한 명망을 탐했다'는 뜻이다. 俞樾은 《역》의 「설괘」를 인용해 黔口 또는 黔喙라고 보았다. '짐승처럼 탐욕스럽다'는 뜻이다. 王先謙은 《후한서》 「양통열전」 중 口吟舌言에 대한 章懷의 주석에 語吃不能明了, 즉 '말을 더듬어서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라고 하여 '말을 더듬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한서》 「양웅전 하」에서 양웅이 孟軻雖連蹇/猶為萬乘師, 즉 '맹가는 말을 더듬었지만 오히려 만승 군주의 스승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王先謙도 盜跖吟口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였을 것이다. 劉師培는 원래 貪 한 글자였는데, 필사하는 과정에서 吟口으로 분해되었다고 보았고, 潘重規는 吟口를 그대로 보아서 '읊조린다는 말이므로, 입 밖으로 나오면 말을 잘한다는 뜻'이라고 보았다. 李止漢은 盜跖吟口를 '盜跖이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회자되어'라고 번역했는데, 뜻은 통하지만 어순이 이상하다. 그런데 순자는 이 글애서 苟한 行, 說, 名을 좇지 말라고 하고 있고, 앞에서 行, 說에 대해 이야기했으니 이제 名을 따질 차례다. 이 점을 토대로 보면 劉師培처럼 보아서 盜跖貪名聲/若日月로 보아야 가장 타당할 것이다. 宋基采, 金學主도 劉師培를 따르고 있다.), [결국에는 바라는 대로 되어서, 그 명성이] 순이나 우와 동렬에 올라(與舜禹, 與는 '함께'), [사람들의 입에] 쉴새 없이 함께 오르내리게 되었다.(俱傳而不息, 俱는 '함께', '전부', '모두', 不息은 '쉬지 않다', '쉴 새 없이') 그러나 군자는 [그럼에도 이런 명성을]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왜 그럴까.] 예와 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故) [내가] 군자는 행동으로 말하자면 구난한 짓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고, 논변으로 말하자면 구찰한 논증을 요긴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명망에 대해 말하자면 구전한 명성을 대단하게 여기지 않으니, 오직 행동이나 논변, 명망이 [예와 의에] 타당할 때만 대단하게 여긴다고 했던 것이다.(曰) [이에 대해] 《시》에 이런 말이 있다.
"먹을 것이 많기도 한데(物其有矣, 有는 多, '많다', 其는 뜻 없는 조사다. 物은 원문에 나온 여러 물고기들과 술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두] 때에 맞구다.(唯其時矣, 時는 '때에 맞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제철'이라는 뜻 같기도 하다. 唯와 其는 모두 의미가 없다.)"(출전은 《시》 「소아 백화지십」의 「魚麗」다. 麗는 통발이나 그물 같은 데 물고기가 '걸리다', '잡히다'라는 뜻이다. 원래 시는 물고기를 잡아서 술과 함께 풍족하게 먹고 노는 모습이다. 순자는 行, 說, 名이 苟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다. 行이 어렵다고 해도, 說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名이 아무리 드높다 해도, 모두 禮와 義에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즉, 반대로 行, 說, 名을 쌓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禮와 義에 들어 맞아야 의미가 있다. 순자는 唯其時矣에서 時를 바로 禮와 義에 맞는 것, 즉 禮義之中에 비유하기 위해 이 시를 인용한 것이다. 물론 원전의 뜻과 잘 합치되지는 않는다.)
이 말이 [바로] 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