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의 난(삼국사기 신문왕본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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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나오는 지명들을 다음 지도를 통해 이해하시면 글을 한층 더 쉽게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달마시안의 한국 고대 지도 링크
나당전쟁 당시 석문에서 크게 진 신라군은 대방 전선을 포기하고 임진강, 한강에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그리고 대방 지역에서 한창 나라를 세우고 있던 안승, 검모잠 등의 짭고구려 세력은 의지할 데가 없어집니다.
석문전투 이후 1여 년 동안이나 신라와 탁발부의 교전 기록이 없는데, 아마 탁발부가 짭고구려를 평정하기 위해 시간을 썼던 것 같습니다.
이후 짭고구려의 안승은 신라로 망명하고, 신라에서는 안승을 금마군에 두어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합니다.
이름은 나라 같지만, 실제로는 신라의 괴뢰국이었고, 백제와 달리 평화적으로 흡수하게 된 고구려 귀족들을 옹기종기 모아 놓는 역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신문왕은 나당전쟁이 끝난 후인 683년 10월에 안승을 경주로 불러 김씨 성을 주고 경주에 살게 합니다.
그런데 그 틈을 타 684년 11월에 반란이 터집니다. 보덕국에서 안승의 조카인 대문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킨 거죠.
대문은 복실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대문의 난이라고도 하고, 복실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아마 고구려 귀족들 중엔 신라에 협조하는 것을 좋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반대한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안승이 보덕국에 왕으로 있었을 때는 이를 억눌렀던 것 같은데, 경주로 빠지니 억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추측임.
이 반란은 곧 진압된 것 같습니다. 김영윤이라는 사람이 이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김영윤열전에도 사실 반란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나와 있지 않습니다.